가부장제(家父長制), 안되나요?

2003.06.20 08:22

전지은 조회 수:383 추천:26

가부장(家父長)이란, 역사적으로 고대로마에서 가부장의 주체가 되던 사람, 이라고 국어 사전은 정의하고 있다. 또한 사전에서는 그 중심에 있는 사람이 꼭 아버지로만 대변되지 않고 가족의 중심 역할 내지는 절대적 권력을 가지는 사람에 의미를 둔다는 것을 강조한다.
한국의 어느 참여연대에선 아버지의 성만 쓰지 말고 어머니의 성도 함께 쓰거나 아이에게 선택권을 주어서 둘 중 하나를 쓸 수 있도록 하자는 운동이 한창 진행 중이란다. 아버지의 성을 따른다고 꼭 부계중심의 가부장 제도인가 그리고 그것이 반듯이 절대권력과 부합되는 의미인가?
미국 속에서 특히 이민 사회 속에서 아버지의 위치는 어디쯤 와 있을까. 절대권력으로 대변되던 월급봉투 내지는 경제적인 모든 것을 책임졌던 한국에서의 입지와는 사뭇 다르다. 양말 한 짝, 속옷 하나 세탁할 줄 몰랐고 스스로 라면 하나 끓일 줄 몰랐던 이민 일세대의 아버지들. 새로운 땅에서 문화와 언어와 싸우기에도 힘겨웠지만 하루가 다르게 적응해 가는 아이들과 영악한 마누라 앞에서 조금은 주눅 들었고 무능력하다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 아버지들이 아내의 성을 따르지는 않는다.
더하여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는 조기유학, 원정출산 등등의 경우 부권의 의미는 가부장의 의미를 더욱 탈색되게 하기에 충분하다. 경제권을 쥐고 있는 것으로 절대권력을 행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은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쯤으로 치부되고, 남편은 카드만 넣으면 돈이 나오는 ATM 기계처럼 날짜에 맞추어 송금해 오기에 바쁘고 아이들과 엄마는 가정이라는 구심점의 울타리를 잃은 채 스스로 결손 가정을 만들어 그 속에서 힘들게 바퉁 거리고 있다.
옛날, 별 불편한 것 없이 엄마와 할머니와 함께 살던 초등학교 시절, 난 결손 가정의 의미를 잘 깨닫지 못했다. 사춘기를 지나며 '아버지의 부재'는 어머니에겐 눈물보따리였고 내겐 상처였다. 세 살배기 어린 딸과 젊은 아내를 두고 그분인들 먼 하늘 나라로 가시고 싶었을까?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 낸 결손 가정은 목줄을 조여 왔다. 버둥거리면 거릴 수록 더욱 조여 오는 아픔들. 고통 속에서 그건 내 탓이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어도 어머니의 가슴에 더 큰 상처를 내는 것이 두려웠다. 바람막이가 없는 가정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웠다. 세상이란 벌판에서 울타리가 없었던 것은 돌이켜 보건대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한번만이라도 아버지가 있어봤으면, 어려운 일이 있었을 때 머리 맞대고 상의 할 수 있고 가슴을 연 사랑을 나눌 수 있었으면 했던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 결손 가정이라는 꼬리표는 늘 아린 가슴이 되게 했다.
그 아린 경험 후의 난, 누구에게든 스스로 부계 중심의 가부장제도를 거부하며 가정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구심점을 잃어 가는 모험은 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들의 일생에서 6-7년 길게는 10년 이상이 뭉텅 짤려나간 채 아버지의 자리가 없다면 그건 분명 상처이다. 아버지가 매일 매일 무엇을 자상하게 해 주어서가 아니라 가정의 한 버팀목으로 서 있는 것, 가부장의 위치에 있는 것만이 사회의 기초 단위인 가정이 흔들리지 않는 다고 강변하는 것은 구닥다리 사고 방식과 세대차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유년의 나에겐 아버지의 자리는 크고 높았으며 그 어떤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강건하시면 하실 수록 가슴의 빈자리는 늘 구멍이 뻥 뚫려 있었고 바람이 불어드는 것처럼 서늘했다.
어머니로 대변되는 따스함과 아버지로 대변되는 견고함이 동시에 잘 조화를 이룰 때에 그 평행선 속의 아이들은 좋은 인성을 키워갈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는 절대군주가 아니며 동시에 ATM기계도 아니다. 든든한 후원자, 두툼한 손으로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시며 묵묵히 웃음을 보내 주시는 분 아닐까? 이민 사회 속에서 허둥대는 아버지들께는 좀더 시간과 여유를 드리고 한국에 두고 온 아버지들께는 함께 살며 부닥트리기도 하고, 살 가운 맛도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들이자. 가부장이 말 그대로의 중심에 설 수 있을 때야말로 축이 흔들리지 않는 사회의 기본 단위인 가정을 만들어 갈 수 있을 테니까.
아버지날이다. 우리 모두 그분들에게, 파이팅!!! 외쳐본다. 가정의 중심에, 사회의 중심에, 든든한 축이 되어 서실 수 있도록.
(한국일보 6월 12일, 목요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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