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피리

2003.07.13 01:17

전지은 조회 수:548 추천:74

오늘은 어제보다 죽음이 한치 더 가까워도
평화로운 별을 보며 웃어주는 마음
살아라 오늘을 더 높이
내 불던 피리 찾아야겠네
-이해인 수녀님의 '11월의 기도' 중에서-

매일 출근을 하게 되면 만나게 되는 것은 '죽음이 찾아오는 소리'이다. 중환자실, 각각 다른 모습으로 죽음 근처에 다 달아 있거나 죽음의 문턱에서 뒷걸음쳐 나오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는 곳. 나의 하루가 시작되고 나의 하루를 마무리하는 곳이기도 하다. 강산의 모습이 바뀌었을 세월, 쉬지 않고 만났던 일상이고 보면 가끔은 무디어 질만도 한데, 아직도 문턱에 서있는 이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말없이 손을 잡고 서 있기도 한다.
아흔이 넘은 백발의 할머니가 먼저 타계하신 할아버지의 사진을 가슴에 안고 숨을 거두시는 순간. 주위에서는 '호상'이라고 말하고 가족 모두의 사랑 속에서 할아버지 곁으로 돌아 가시는 모습은 고귀하고 아름답다. 어느 분의 어머니로써, 어느 청년의 인자한 할머니로써, 좋은 이웃의 자리일 빈 공간은 한동안 남아지겠지만 가족이라는 사랑의 공동체 안에서 좋은 기억으로 채워지리라.
젊음이 가장 큰 버팀 목이였을 이의 죽음은 남겨진 이들 가슴속에 커다란 추를 달아 놓는다. 살만하면 액마가 시기를 한다는 옛말처럼,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의 위치에 달했을 때 불청객으로 찾아드는 질환들. 넘겨야할 큰산들은 비껴주지 않고 풀어야 할 매듭들은 더욱 단단해 진 탓일까, 죽음의 문턱으로 한 걸음씩 다가드는 이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게 매달아 놓은 중환자실의 기구들과 약물들은 몸부림치면 칠수록 옥죄는 것을. 스스로 포기 할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순간, 그들을 지켜보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자책해 보곤 한다.
어떤 경우가 되었든 본인이 아닌 지켜보아야 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살얼음 위에 선 자세로 어쩔 줄 몰라한다. 어떻게 도와주어야만 그들의 마지막 순간에 진실로 함께 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의문으로 남아있다. 배우자의 입장이 되어 보기도 하고 십대의 아들, 딸이 되어 보기도 하고, 굽은 허리의 어머니가 되어 보기도 하지만 객관적인 입장에서 지켜보아야 하는 마지막 시간이란 여하한 말로도 위로가 될 수 없음을 깨닫는 것이 내 직업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더 가슴 아픈 것은 자식 같은 청년들이 죽는 일이다. 내 아이와 비슷한 연령. 아직 꽃봉오리도 피워 보지 못한 아이들이 죽음을 준비 할 땐 정말 이일을 직업이라는 이름으로 꼭해야 하나, 회한이 들 때도 있다. 신이 있다면 이들만은 지켜줘야 하지 않을까, 생명을 주셨다면, 쓰실 곳이 있어서가 아닐까, 쓰여 보지도 못하고 가야 하는 길을 재촉하는 일들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신의 꼭두각시놀음 같기도 하고 신에게 원망도 해보지만 그 순간은 여하한 방법으로도 잡아 매여지지 않는다.
그러나 하늘이 사람을 부를 때, 어떤 경우라도 응답은 늘 평화롭다는 것이다. 질환의 고통 중에 있었더라도, 두고 가는 가족들의 안타까움에, 어머니의 품에 안겨 가는 마지막 시간. 매여 있던 모든 것을 풀어서일까, 그들의 얼굴엔 한치의 고통도 없다. 가쁜 숨을 몰아 쉬었던 고통도 최후의 순간엔 숨을 모두어 깊이 쉬곤 아주 편안하게 숨을 놓는다. 인고의 아픔도 사라질 그 순간. 아직 세상의 어두운 면을 보지 못하고 엄마의 따듯한 품속에서 하늘 나라로 가는 아기는 천사처럼 평화롭다. 따뜻한 품에 안기어 천상의 나라로 들 아기들. 어린이들의 죽음도 마찬가지로 떠나가는 것의 의미를 몰라서인지 별 두려움이 없이 이별을 준비한다. 허나 많은 가족과 세상의 많은 일들을 남기고 가는 대부분의 어른들은 최후의 순간까지 마지막 시간의 끈을 놓지 못해 안간힘을 다 쓴다.
더구나 세상에 남겨진 우리들이야말로 먼저간 자식을, 부모를, 배우자를, 사랑하는 가족을, 평생 가슴의 업보로 안고 살아야 하는 죄인들이 아닐까. 따스한 계절인데도 남겨진 이들의 가슴엔 구멍이 뻥 뚫려 서늘한 바람이 불어든다.
가끔 하늘 나라에 갔다왔다는 이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중환자실이라는 특수성 때문일 수도 있으나 이야길 들어보면 하늘 나라는 천상의 향유와 아름다움이 가득한 곳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그곳엔 고운 빛이 가득하고 신비로운 안개가 가득하단다. 누구 언성을 높이는 사람도 없고 미워하는 일도 없고 모두들 미소를 띤 얼굴이란다. 만나고 싶은 사람들은 그곳에서 꼭 기다려 준다나. 평화의 그곳에 찾아들기 위해 준비를 해본다. 이해인 수녀님의 시구처럼 오늘을 더 높이 살며.
이런 생각이 들면 평화가 있는 곳으로 마을을 열고 가는 이들을 배웅하는 것, '어제보다도 죽음이 한치 더 가까워도' 그 시간 함께 할 수 있음이 나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그들이 고른 숨을 쉬는 마지막 순간, 따스한 물로 얼굴을 닦아주고, 손을 잡아 주고, 거추장스럽게 달려 있던 생명을 연장하려던 욕심스런 장식과 기구들을 떼어주고, 온몸에 한기를 느끼는 가족들과 깊은 포옹을 나눌 수 있는 직업. 그들 평화의 미소 속으로 부름 받고 있음으로 오늘도 안개 어스름한 새벽, 중환자실로 출근을 서둘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나의 피리를 찾아 분다. 가늘더라도 이어질 듯 높고 고운 소리 오래 오래 퍼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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