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을 향연

2003.10.21 03:02

전지은 조회 수:516 추천:57

아직 짙은 푸르름을 그대로 간직한 이곳, 캘리포니아이지만 석양이 지는 바닷가의 얕은 바람은 그리움이라는 오래된 지병을 불러온다. 긴 팔 소매의 스웨터를 꺼내 입었어도 가슴까지 서늘해지는 것은 꼭 기후 탓만은 아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9월이 되면 꼭 그래야 하는 것처럼 계절병을 앓는다. 올핸 다행히 지병이 덧나기 전에 서울과 강릉을 찾았다. 두고 온 곳의 색깔은 기억과 추억 속에서 유난히 아름답다.
긴 시간 비행하여 가야 하는 곳이라서 일까 '잠시 다녀왔으면' 하는 것은 생활의 한 부분에서 조금은 사치스런 일이었다. 늘 적당한 핑계거리가 있어야 했고 이번엔 이름도 거창하게 <한민족 문화 공동체 대회>에 참가하기. 구실이 좋았던 탓일까. 첫날 환영연으로 만들어진 모천제에 가슴이 뭉클한 감동을 받았으며, 다음날 가을비 속에서 조병화 시인의 생가이며 박물관인 편운재와 박두진 시인의 생가, 미리내 성지, 유기박물관 견학으로 이어지는 강행군 이였어도 경기도 안성 문학 기행이 피곤하지 않았다. 연이어 이틀동안 계속되었던 문학 포럼은 이민문학의 문제제시와 방향, 현재와 미래, 작가들의 삶 속에서의 문학 이야기들로 이어졌다. 한국말을 구사하지 못하는 한인작가들도 모든 글쟁이들이 다 그러하듯 '문학 이야기'에 시간가는 줄 몰랐고 분위기를 바꿔 호프집에서도 문학을 이야기하고 인생을 나누는 풋풋함이 있었다.
닷새의 빡빡한 일정이었지만 프로그램 내내 누구에겐가 참으로 감사한 마음이었다. 난 고국을 떠나 있으며 늘 방관자의 자세로 바다 건너를 바라보았고 경원 시 했다. 가끔 계절병을 앓는 것과 두고 온 사랑하는 사람들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한번도 기댈 생각을 하지 못했던 곳. 그리움은 가슴이 시린 일이었을 뿐 어떤 모습으로도 그 안에 함께 서서 땀흘리며 스스로 가슴을 덥히지 못했다.
멀리서 바라다 뵈는 모습은 대부분 우울했으며 언제쯤 그곳은 날 위해 따뜻한 손을 내밀어 줄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한번도, 내 스스로 그곳의 따스함에 묻혀 보려 노력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지리한 빗속으로 더러운 것들이 쓸려 내려가 버린 도심에 서 있어서였을까, 거리는 깨끗했고 질서정연했으며, 공공시설들은 낯선 방문객에 친절했다. 함께 어울리며, 같은 모습으로 낯설지 않다는 것은 참으로 편하고 좋은 일임을 새삼 깨달았다. 진한 흙 냄새 같은 향수가 늘 주위를 맴돌고 있었음에도 부정하고 싶었던 것은 쓸데없는 객기였는지도 모른다.
두고 갔다고, 꺼내 보이는 것만으로도 아픔이라는 생각 들었던 가을의 고운 색들을 다시 꺼낸다. 계절이 이른 탓에 단풍도 아직 붉게 물들지 않았고 노란 은행잎도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돌아 온 이곳처럼 아직 푸르른 곳. 긴 장마비속에 그곳을 두고 난 다시 떠나야 했다. 20년의 세월동안 한번도 가슴을 연 일이 없는 고국. 첫사랑의 설레임으로 꼭 껴안는다. 아직 완벽하지 않으면 어떤가, 좀 서투르면 또 어떤가. 나의 오래된 지병을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고마우며, 언제든 달려 갈 수 있는 곳이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땅.
계절이 깊어지고 색들이 짙어지면 난 좀더 깊이 생각해 봐야겠다. 가을 향연을 베풀어 준 그 그리웠던 곳, 한동안 추억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시렸던 "고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한국일보 목요 칼럼.10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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