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脫), 캘리포니아

2003.12.15 10:13

전지은 조회 수:608 추천:50

전 지은
산들이 온통 노랗게 내려앉은 곳. 먼지 날리는 붉은 자갈길에 또 다른 나를 풀어놓는다. 두고 온 것은 무엇이고 거두어 갈 것은 무엇인가. 바다를 건널 때의 설레임도 이젠 숲 속 어느 곳에 떨궈두고 아스펜 추리 황금빛 몸사위를 흔드는 산맥을 넘는 길만 찾아 나선다. 낙엽이 지는 곳은 혼돈의 모습으로 다가들고 발목이 푹푹 빠지는 산길엔 시작도 끝도 보이지 않는다. 하늘은 청아함으로 짙은 가을 색들과 조화를 이루고 엷어진 해발 6000의 공기 속에서 쉬는 것은 심호흡일까, 가쁘고 얕은 숨일까. 이어서 다가 올 순백의 세계는 두고 온 고향처럼 모든 것을 덮어주며 보듬어 줄 수 있을까. 늘 푸르기만 곳을 떠나는 것은 더 늦기 전, 또 다시 도전해 보는 개척정신이라고 치부하며 어린 철부지 시절, 바다 건너도 왔는데 세월도 한참 지나 사는 것에 조금은 지혜로워진 지금, 산하나 넘는 거야 뭐 그리 대수겠냐고 스스로 위로해 본다.
다섯 개의 이민 가방을 들고 도착했던 미항, 샌프란시스코. 머리에 꽃을 꼽고 반겨주는 이는 없었더라고 청운의 꿈을 안고 왔던 이곳. 20년 세월 속에선 강산이 두 번 바뀌어야 했을텐데도 여전한 푸르름으로 따스하게 이방인을 껴 앉는 풍요로움의 캘리포니아. 비슷한 얼굴과 사고들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새로운 땅에서 뿌리내리기 위한 노력도 만만치는 않았다. 그런 생활의 터전과 삶의 기반을 벗어 던지는 데는 한참의 용기가 필요했다.
남편의 비지네스를 판 4월 이후, 뉴멕시코, 애리조나, 오래건, 남가주 등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것을 찾는 여행은 계속되었다. 인디안 마을의 골짜기를 둘러보며, 숨막히게 뜨거운 사막의 한가운데서 칵튜스 선인장을 만나며, 어디서든 적응해 살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은 말도 관습도 꽤 익숙해진 때문일까.
가을 색 가득한 곳으로 이사를 결정한 것은 순전히 계절의 아름다움에 매료돼서인가, 스스로 반문해 본다. 이방인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살았던 이곳과 견주어 볼 때 참으로 소규모인 한인 공동체 속에서 잘 견딜 수 있을까 염려된다. 바다가 없는 곳에서 갯내음이 그립고, 멀어진 아이의 일상이 궁금할 땐 어쩔 것이며, 오랜 정을 나누던 가까운 문우들과 친구들은 책장의 한 페이지를 속에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고운 낙엽을 말리듯 넣어 둘 수 있을까. 생각은 생각의 꼬리를 물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들도 있었다. 그러나 더 늦기 전, 다시 도전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풍요로움의 오만에서 벗어나 처음 이곳에 발을 딛으며 마음 다짐을 했던 것처럼,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한다면 록키 산맥 밑의 작은 산동네에서 맞을 평화도 꽤 괜찮을 것 같다. 봄이면 푸른 잎들의 소리 없는 부산함 속에서 꼼틀거리는 시심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고, 산허리를 넘지 못하는 구름들은 여름 소나기를 시원하게 내려 줘 답답한 가슴을 씻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가을에 취해 넋 놓고 산언덕을 쳐다보다간 쓰고 싶었던 긴 이야기 풀어놓을 수도 있을 것이고, 살면서 알게 모르게 싸여왔던 내 삶의 흉허물을 흰눈 소복이 덮어 줄 겨울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직 완전히 떠나기도 전에 새로운 곳에 자신을 적응 시켜 보는 것은 내 제2의 고향인 이곳을 떠남이 너무도 아쉬워서이다. 고향이란, 고향이란 이름만으로도 돌아갈 충분조건이 형성된다. 언젠가 다시 돌아올지도 모를 미국에서의 내 고향인 실리콘밸리 끝자락, 산타크루즈, 아직 놓을 수가 없다. 어쩌면 십 년 후쯤, 아니 그 보다 더 훗날이더라도 돌아온 이곳엔 잔 파도들이 여전히 흰 포말을 뿌리고 풋풋한 바닷 내음이 늘 그랬던 것처럼 같은 모습으로 손내밀고 있을 것임으로.

(한국일보 목요칼럼, 11월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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