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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친일 청산과 거대 언론

2004.01.31 10:53

박정순 조회 수:114 추천:5

친일(親日)청산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혹자는 '해방 된 지 반 세기가 지난 이 지점에 왜 이 문제가 다시 논란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기도 한다.

이런 입장의 사람들이 한결같이 친일 청산을 반대하면서 주장하는 근거는 '그 당시를 살았던 사람 치고 친일을 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느냐'는 것이다. 36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우리 민족은 일제의 가혹한 수탈에 시달려야 했고, 어느 식민지에서도 보기 힘든 혹독한 억압을 당해야 했다. 그 긴 세월의 와중에 어느 누구도 친일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 지나간 세월을 다시 논의의 복판으로 끌어오는 것은 위험한 일일 수 있다. 그것은 망각의 피딱지를 쥐어뜯어, 석화(石化)되어 버린 시간을 다시 현재의 시간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피는 다시 흐른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환멸이라는 고통을 수반한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생(生)이라는 거친 들판 위에 맨몸으로 나서야 하는 두려움을 느낀다. 그럴듯한 옷이라고 생각하고 입고 있었던 옷이 거짓투성이었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그 옷을 다시 껴입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우리는 흔히 한국의 근대사에 대해 '첫단추를 잘못 끼웠다'는 비유를 종종 들어왔다. 그러나 김구 선생 암살 사건의 의문점을 일생동안 추적했던 권중희 선생은, 그 비유는 잘못된 것이었다고 말한다. 아예 그 옷은 입어서는 안되는 '친일의 옷'이었다는 것이다.

친일의 문제를 통해 들여다보면, 우리는 우리의 근대사라는 옷의 결이 얼마나 뒤틀어진 것이었던가를 속속들이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충격을 넘어서 모멸감으로 다가온다. 지금까지 민족의 등불이라고 알고 있었던 사람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적극적 친일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경험은 쓰라리다.

게다가 분단이라는 왜곡된 민족적 삶의 비틀린 형태에 이데올로기가 접합되어 있는 이중의 뒤틀림 상태는 더더욱 이 문제를 미묘하게 만들어 왔었다. 친일파의 자손들이 각계 각층의 상층부를 장악하고 역사 해석을 독점해 왔던 상황이 친일 문제를 거론하는 것을 마치 불순한 세력의 준동으로 여기게 만들어왔던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는 참으로 엄연한 것이다. 힘으로 억눌려진 진실은 반드시 귀환을 시도한다. 그것은 아벨의 피처럼, 역사(歷史)의 역사(逆史)로서, 시간을 거슬러, 땅 밑으로부터 울부짖으며 솟아오른다. 시간은 용암처럼, 상처의 피처럼, 딱딱해진 것으로 보이는 현실의 안전한 맥락을 뒤엎으면서 솟아오른다. 그 생생한 목소리는 귀를 틀어막는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단지 진실이 제 자리에 위치될 때라야 가라앉는 것이다.

지금까지 냉전 이데올로기를 활용하면서, 친일-반공-친미를 숭앙하는 우리 사회 수구 기득권 세력의 필요에 의하여 시시때때로 활용되었던, 그리고 지금도 활용되고 있는 '빨갱이' 타령은, 진실을 진실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최근에 의미있는 변화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그것은 가히 '말의 혁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대선을 기점으로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매체의 힘을 입어, 역사와 사회의 해석을 독점해 왔던 '말의 독점자'들의 철벽에 조금씩 실질적 구멍이 뚫리기 시작한 것이다. 친일 청산 문제는 인터넷 매체를 중심으로 해서 실질적인 해결 가능성을 확인시켜주는 국면으로 들어서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는 최근에 이 문제에 관해서 두 가지의 의미있는 성과를 얻어냈다. 안두희의 김구 선생 암살 배후를 일생동안 추적해왔던 권중희 선생이 미국 비밀문서 기록청에서 관련 문서를 열람할 수 있도록, 여비와 연구비 지원금을 모금했다. 또 국회에서 삭감한 친일 인명사전 편찬을 위한 시민 모금을 며칠만에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다. 전(前)시대였으면 '빨갱이짓'으로 몰려 감옥으로 가야했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이 속속 국민의 광범위한 호응을 받으며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공중파에까지 서서히 확산되고 있다. 1월 27일에 MBC의 PD수첩에서 방영한 친일파 문제는 친일의 문제가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문제라는 것을 웅변적으로 확인시켜주었다. 프로그램 방영 후, 게시판은 지금까지도 시청자들의 분노의 목소리로 들끓고 있다.

친일파의 자손들이 겨레를 배반한 댓가로 얻은 조상들의 재산을 찾겠다고 뻔뻔스럽게 소송을 벌이고, 적정한 법이 없어서 재판에서 승소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에 시청자들은 무력함과 분노의 탄식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중앙·동아 거대 언론 삼사의 태도는 이와 관련하여 매우 인상적이다. 대표적인 친일 의혹을 받고 있는 조선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고, 역시 친일 의혹을 받고 있는 동아는 친일 인명사전 출판을 위한 네티즌들의 모금을 '불법 모금'이라며 딴지를 걸고 나섰다. 중앙일보는 친일 청산법 등의 제정 움직임이 총선용인 것처럼 물타기를 시도하고 있다.

중앙일보는 조선·동아와 달리 일제시대와 무관하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친일을 했다고 평가되는 문인을 기리는 문학상을 제정한 데서 알 수 있듯 이 문제에 관한 한, 조선·동아와 비슷하다는게 필자의 생각이다.

친일 청산 문제는 이제 와서 죽은 사람들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이미 사망한 사람들이어서 실질적인 처벌이 불가능하기도 하거니와, 너무나 오랜 세월이 흘러서, 그들이 형성해 놓은 권력과 재산에 어떤 구체적인 위해도 가할 수 없다. 다만, 그들이 무슨 일을 어떻게 했는가를 객관적인 사실로서 밝히자는 것 뿐이다. 지금까지 거짓으로 포장되어 있었던 것에게 진실의 빛을 가져오자는 것 뿐이다. 공과 과를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밝히자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과거의 잘잘못을 분명하게 한 뒤에,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칭송할 것은 칭송하고 앞으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친일행위 규명 특별법은 또 다시 국회를 통과하지 못할 것처럼 보인다. 야당의원 대다수가 이 법안에 서명하지 않은 것은 물론, 법사위에서 다수당은 이런저런 핑계로 훼방을 놓아 법안 자체가 너덜너덜해졌다. 그 나마도 상정(上程)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법안이 상정조차 되지 못하는 이유는 국회위원들의 상당 숫자가 친일파의 후예이거나 친일파들을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는 기득권층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거대 언론의 의도적인 무시와 물타기가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국민이 알 수 없도록 차단막을 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그 사이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인식의 성숙을 이루었다. 이번 총선에서 친일 규명을 위한 특별법에 반대하는 국회의원이 누구인지 우리는 분명하게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논리로 이 법안의 제정에 반대하는지도 꼼꼼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그리고 유권자 자신의 세계관과 비교하여 판단을 내리는 자료로 삼을 수 있다.

친일 문제는 공동체의 복리를 해치는 개인의 기회주의적 처신이라는 문제에 관하여 한 명의 정치인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가를 판별할 수 있게 해주는 리트머스 시험지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프랑스문학을 공부하면서 그들에게서 가장 부럽게 생각했던 것은 그들의 철저한 역사의식이었다. 그들은 잘한 일과 아울러 못한 일도 철저하게 기록으로 남긴다. 그 모든 것이 미래를 위한 공동체의 학습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잘한 것은 잘한 것으로서 기리고 더욱 권장하고 심화시키기 위해서, 못한 것은 못한 것대로 다시 되풀이되지 않을 수 있도록, 그들은 꼼꼼한 기록을 남긴다.

2차대전이 끝난 뒤 그들은 나치 부역자를 철저하게 밝혀내어 역사의 심판대 위에 올렸다. 그들은 특히 언론인과 작가들에게 엄격한 책임을 물었다. 나치 하에서 하루라도 발행되었던 신문들은 전부 폐간되었다. 나치에의 협력을 선동했던 언론인들과 작가들은 처형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말의 생산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말은 한 사회의 모든 가치 기준을 세우는 대들보와 같은 것이다. 말이 바로서지 않으면, 어떤 가치도 제대로 설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언론인들과 작가들을 위시한 지식인들의 과오는 일반인들의 과오와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

거대 언론이 이 문제를 정면에서 다루어야 한다. 그것이 자신의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해야만 역사의 흐름을 주도해 나갈 수 있다. 잠깐은 사람들을 속일 수 있지만,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빨갱이 타령도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 역사는 잔혹하다. 그것은 양날의 검과 같은 것이다.

지금까지 타인들의 목을 쳐왔던 날이 자신의 목을 치게 될 수도 있다. 영화 <툼 레이더>에서 시간의 틈새를 날아다니는 안젤리나 졸리는 최후의 결정적 순간에, 칼날을 맨손으로 잡고 방향을 돌린다.

지금 거대 언론사들의 기자들에게는 그런 결단이 필요하다. 당장은 손이 베어져나가는 아픔이 있더라도, 그렇게 하면 역사 안에 거대 언론사들의 자리는 다시 마련될 것이다. 그리고 공동체의 가치는 다시 올바른 맥락을 따라 구성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거대 언론은 말의 배반자, 역사의 지진아(遲進兒)라는 오명을 피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