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골무

2006.10.30 15:30

강학희 조회 수:1355 추천:96

엄마의 골무 / 강학희

반짇고리에서 또록 굴러 떨어진
가죽골무
바짝 마르고 뻣뻣해도
여전히 엄마의 검지

엄마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가면
고즈넉한 풍경 속 슬픔은
먼지처럼 흩어져 사라지고
검지 뒤쪽으로 난 엄마의 길
비밀 부호처럼 희미하게 떠오른다

아이처럼 뒤뚱뒤뚱  
한 걸음씩 걸음을 떼다 멈추어서면
실핏줄처럼 퍼져 가는 섬세한 손놀림,
아직도 늙지 않은 엄마는
새파란 시간의 그물을 곱게 짜
물려 입을 배냇저고리 하나 깁고 있다

엄마의 가죽골무
나의 태궁은 오늘도 따뜻하다.

- 12월 3일 2008년 경희사이버대학 제2회 미주동포문학상 입상작



해외문학 12호 (2007 겨울)에서

자연과 인간의 원형적 모습에 대한 향수
- 지난 해의 미주 시작품 중에서 -


골무라고 하는 상징적 표현을 통해서, 그곳에 고여 있는 모성의 행적과 사랑을 서정적으로 표현한 아름다운 작품이다. 손끝에 끼우는 그 작은 상징물 속에 그 긴 세월과 그 기쁨과 그 고통을, 그리고 그 많은 사랑을 담을 수 있는 시인의 솜씨가 놀랍다.  
이미 바짝 마른 옛 골무를 들고 엄마가 가르키는 곳을 따라, 비밀 부호처럼 희미한 옛 행로를 따라 어린 시절과 배냇저고리를 지나. 끝내 찾아간 곳이 바로 어머니의 따뜻한 태궁 속이라는 것이다. 결국 자신의 근원적인 원천 세계인 자연에 대한 귀소본능의 세계가 표현된 것이다.

'엄마의 가죽골무, 나의 태궁이 따뜻하다.'

따뜻하다는 골무와 태궁은 바로 모성의 상징이고, 그래서 모성의 본질은 사랑이고, 자신의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모성에 대한 탐색은 자신의 근원적인 원천 세계에 대한 회귀를 열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상의 모든 생명의 근원은 모성이다. 따라서 이러한 모성에 대한 사색은 결국 우리 인간 자신의 근원적인 원천 세계에 대한 하나의 회귀본능으로,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하나의 자연의 순리다. 그럼으로 이러한 모성에 대한 표현이나 이에 대한 탐색 역시 우리 자신의 자연물적이고 근원적인 모습에 대한 그리움인 동시에, 자연과 원천세계에 대한 향수를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엄마의 골무 詩作 이야기 / 강학희

서랍장을 정리하다 또르르 굴러떨어진 가죽 골무 하나
이젠 비록 말라 검게 변했어도,
이 것이 없으면 무엇 하나 제대로 찝을 수 없는 검지, 분명 엄마의 검지다.
뒤집어 보니 나달한 바닥, 날카로운 삶에 찔리고 찔린
엄마의 세월, 한 여자 일생의 길이 혈땀으로
마치 난해한 해적도처럼 그려져 있다.

여자가 혼인하면 더는 공부 할 수 없던 시절, 책 대신 십자수로
베갯모에서 옷걸이 덮개까지 땀땀이 여자라는 한을 새겨 넣으시고
그 딸의 배냇 저고리에서 신행 치마저고리까지 또 똑같을 딸의 일생을
손끝으로 지으시며 엄만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유복한 외동딸로 명문 고녀를 나오시고, 이화여전에 들어갔어도
기혼자는 강퇴(?) 할 수밖에 없던
엄마가 만났던 세월, 살아내야만했던 시절.

결핵을 앓고난 166센치의 가늘고 긴 몸처럼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할 수 있었던 건
시름을 지울 수 있는 바느질, 다행인지 불행인지
바느질로 생계를 유지 할 이유는 없었으나,
어쩌면 그래서 더 한이었을는지도 모른다.
늘 집안 일들은 할머님, 고모님이 도맡아 하시고, 막일 한번
해본 적 없는 여린 손가락 찔리고 찔리며 신여성의 꿈을 땀땀히 묻었을
엄마의 검지, 엄마의 까만 골무살에 묻힌
수많은 혈땀의 한을 쓰다듬어 본다.

여자도 공부해야한다, 공부만큼 재미있는 것도 없더라.
끝내 마칠 수 없었던 공부의 한을, 그 세월을 살아보지 않은
그 딸인 내가 어찌 다 이해할까마는
사람의 재능에도 다 다른 몫이 있듯 엄마는 몸으로 해야하는 일은
늘 남의 옷 같이 어눌해도 작고 섬세한 종류의 일들,
요리, 꽃꽃이, 뜨개질, 수놓기나 붓글씨 쓰기, 묵화치기,
틈틈히 영문서를 번역하실 만큼 외국어에도 유독 재주가 많으셨다.
(놀라운 건 지인의 권유로 훗날 배우신 사격에도 비상한 재능을 보이셨다.)

꿈을 이룰 순 없었지만, 그 엄마의 허물 같은 손떼묻은 반짓고리,
"에그, 구중중해요. 이런 옛날 것, 궁상(?)스런 것들 좀 치우고 살면
안되나.." 퉁박놓던 그 딸의 집으로 자리만 옮겨 앉은 엄마의 색경,
바늘쌈, 실패, 붓통이 할머니의 백동 비녀, 은장도, 자만옥 노리개,
호박 단추들에 기대어 또 똑같은 엄마들의 엄마가,
엄마들의 딸들의 세월을 바라보신다.
비록 같은 하늘 아래서의 숨결은 아니더라도 서랍장 한 곳,
답답한 반짓고리이긴 해도 늘 들여다 보시곤 하던 그 자리이므로
편하실 것도 같은 엄마의 흔적들.

오래 조몰락거려 말랑해진 엄마의 손가락, 골무에 나의 검지를 넣고
손끝을 맞대니 꼭 제 집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ET*처럼
"ET go home!!" 소리가 절로 난다. 엄마를 보듬고싶어진다.
따지고 보면 엄마가 사셨던 세월이나 한 세기가 닫히고 열린 지금
이 머나먼 미국 땅까지 와서 현대를 살아도 몸 편한 것 말고는
별로 달라진 것도 없을 우리 여자들의 일생. 그나마 시부모 공양도,
남편의 수발도, 하나나 둘 뿐인 아이들 치닥거리도 몸이나 손끝 닳도록
보시한 공덕도 없으니 이제 엄마의 딸도
이 검지가 가리키는 곳으로 갈 수나 있으려는지...미안하고 황망해진다.

검지를 세우고 바라 본 여자들의 삶이 예나 지금이나
눅눅한 골무 속 같이 짠하기만하다. 그 많은 기회 다 차버린 나를
바라보실 엄마의 눈길에 "엄마, 나 지금 뭘 하는 거지?
맞아요, 기회를 잡는 용기가 없는 건 유전인가 봐요...
엄마처럼 나도 그저 글 속에서 사는 게 제일 행복하다우." 엄마만 하지도
못한 엄마딸의 변명이라니... 허나 늦었다 생각하는
그 때가 바로 시작 할 때인 것을. "엄마 이제라도 나 좀 밀어주우!"
엄마가 매일 보내는 내 문자 메세지를 받으시기나 할라나 몰라.

아, 늘 난해한 엄마의 길, 멀기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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