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밥 한 그릇의 눈물

2005.08.07 06:25

강학희 조회 수:733 추천:53



1075301629749_sab2.jpg

♤ 국밥 한 그릇의 눈물 / 강학희 ♤


이십여년 동안 만나뵈었던 전 할아버지, 일찍 유학생으로 오셨으니 미국에서 사 신 세월이 한국에서 사신 세월의 두 배가 넘으신다. 아주 일찍 사별하시고 혼자 지내셔도 늘 깔끔하게하고 다니시며 홀 아비의 태를 전혀 내시지 않으신다. 다행히 아들들이 다 훌륭히 석.박사가 되어 요즘 흔히 말하는 "사"짜 달린 일들 을 하여 오가며 뒤를 보아 줄 일도 크게 근심할 일도 없으신 분이시다.

워낙 조용하시고 성정이 유순하신 할아버님은 말씀도 높낮이가 없으시고 무례한 일을 보시면 눈살은 찌푸리셔도 쓰다 달다 별 말씀없이 새겨만 두시는 그야말로 젠틀맨이시다. 딸 하나 없이 아들들만 있으신 지라, 대부분 그러하 듯 할아버님 이 아프셔도 아들들 중 누구도 만나본 적이 없고, 또 왠일이신지 자제분들에 대 해 말씀을 깊이 하시지않으시는 걸로 봐서는 아마도 할아버님 처럼 조용한 성격 으로 별 잔정이 없는 것 같다. 며느리가 한국 사람도 외국 사람도 다 있다 하시 는데도 불구하고 도무지 오손 도손 사람사는 재미가 전혀 없으시단다. 생각보다 다들 제몫 이상으로 잘 살긴하지만 동서남북 바쁜 일 때문에 무슨 때가 되어도 오지는 못하고 돈들만 보낸다고 하시며, 수줍은 미소년의 어설픈 웃음을 지으시 지만 왠지 서늘한 가을 바람 끝의 시린 겨울 모습이 그려진다.

별 탈이 없으시고 지병도 없으시던 할아버님이 어느 날 갑자기 심장 질환으로, 양로병원으로 옮기시게 되었다. 할아버님 말로는 자기가 너무 내성적이라 스트 레스를 푸는 성격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아주 오랫동안 마음의 화병이 있었을 거라며 피식 웃으신다. 양로 병원에서도 그럭 다른 도움없이 혼자 몸을 잘 추스 르시고 점잖은 할아버지를 간호원들이 무척 좋아하는 것 같다고 방문을 다녀 올 때마다 전해 들으며 매번 내 안부까지 챙기실 만큼 정신도 밝으신데, 요즘 부쩍 쓸쓸해하시고 우울해지신다고 하니 내 마음이 찡해졌다. 오랫동안 뵌 바로는 아마도 가족이나 친지 누구도 찾아오지 않을 것으로 짐작되기에....

그렇게 한해가 가고 지난 추수감사절 바로 전 주일에 방문을 하게 되었는데, 마침 나는 차에 앉아 책을 보며 기다리고 있다가 어째 남편이 생각보다 너무나 빨리 나온 것 같기에 왠일이냐고 물으니 잠시 근처 한국 식당엘 가자고 한다. 실은 할아버님께 무엇이 제일 불편하시냐니까 식사라고 하시며 한국 음식이 많 이 먹고싶다고 하시기에, 그럼 무슨 음식이 제일 많이 생각나시냐니까 곰탕 한 그릇 먹었으면 참 좋겠다고 하시면서 조심스레 혹시 사다 줄 수 있겠냐고 물으 시는데 눈물이 핑 돌아 "그럼요, 좀 기다리세요." 하고 나왔다 하니, 보지않아 도 할아버님의 외로움의 허기가 훤히 보여 나까지 덩달아 눈물이 났다.

대개 다른 환자들을 보면 소화 기능에 문제가 있거나 의사의 특별 지시가 없는 한 대부분 가족이나 친지들의 먹거리를 허락하는데 워낙 내성적인 할아버지는 아들도 며느리도 다 다른 주에 있어 오지는 않고, 딱히 누구에게 부탁 할 숙기 도 없으신지 담당 의사에게 이야기하신 모양이다. 너무나 마음이 안되어서 곰탕 과 냄새나지 않는 종류의 반찬들만 사 가지고 아무래도 곰탕에는 깍두기가 있어 야 제 맛이기에 따로 조금만 덜어서 냄새나지 않게 용기에 잘 싸서 병실로 둘이 함께 들어갔다.

워낙 살이 없으신 분이 예전보다 더 많이 수척해지신 모습, 늘 말끔하시던 수염 이 더부룩하신 걸 보니, 산다는 게 참 서럽다는 생각이 울컥 솟는다. 그리 조용 하시던 분이 평상시처럼 눈 웃음도 아니고 반가워 손을 덥석 잡으시는 걸 보니 정말 많이외로우셨나보다. 이미 갖다놓은 병원 저녁식사 쟁반 위에 곰탕을 반정 도 덜어 담아드리고 가져 온 반찬과 깍두기를 옆에 놓아드리니 감회가 새로우신 지 훅 크게 숨을 한번 쉬시고 수저를 드신다. 한 수갈 떠서 잡수시더니 고개가 점점 더 많이 수그러지신다. 후둑 눈물 방울들이 수저로 국으로 떨어진다.

남편은 모른 척 간호실로 가고 나도 모른 척 돌아서서 방 구경하는 척 하며 괜 히 칸막이를 스르르 끌었다 제 자리에 놓고는 슬그머니 돌아서니 할아버지도 모른 척 천천히 국을 떠 잡수신다. 목이 메이시는지 많이도 못 잡수시고 나는 남은 국물은 간호 실에 맡길 테니 달라고해서 잡수시라고 말씀드리고 할아버님 의 앙상한 손을 한참 꽉 잡아드리곤 돌아섰다. 고맙다 하시는 벌건 눈자위, 목 쉰 인사가 가슴을 콱 메워 나도 모르 게 내 눈에서도 눈물이 툭 떨어졌다.

고개를 푹 숙인 할아버지의 국밥 한 그릇의 눈물, 그 건 무엇이었나? 우리 인 생의, 전 인생의 참고 참으며 말 할 수 없던... 외로움, 갈망, 인내, 회한, 분 노, 허망...이 모든 것들이 거꾸로 떨어져 쏟아지는 저 목덜미, 우리 누구의 모습일 수도 있는 그 국밥 한 그릇의 눈물에 만감이 교차한다. 때때로 내가 할아버지의 자리에 누워 국밥 한 그릇의 눈물 일 우리 인생을 다시 들여다 보 면 삶이 달리 보인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시집 : 오늘도 나는 알맞게 떠있다 강학희 2012.11.27 1317
123 나를 눌러주는 힘 강학희 2006.04.01 1199
» 국밥 한 그릇의 눈물 강학희 2005.08.07 733
121 말. 말, 말 세상 강학희 2005.08.07 413
120 겨울, 고픈 사랑에 대하여 강학희 2005.08.31 653
119 진주 목걸이 강학희 2005.12.11 627
118 밤비 강학희 2005.06.12 575
117 동그란 말 또는 생각들 강학희 2005.06.12 674
116 말하기 강학희 2005.10.02 583
115 앞과 뒤 강학희 2005.03.10 484
114 유성 강학희 2005.03.06 695
113 비누방울 이야기 강학희 2005.03.04 431
112 구석기로 날기 위한 프로그레스 강학희 2005.03.04 451
111 문門.2 강학희 2005.02.25 451
110 문門.1 강학희 2005.02.25 345
109 번개와 적막 강학희 2005.02.25 417
108 어머니의 설날 강학희 2004.12.27 463
107 굴러가는 것은 강학희 2004.12.27 485
106 사슴 강학희 2004.11.23 501
105 그대에게 강학희 2004.12.27 396
104 전선주, 너를 보면... 강학희 2004.11.23 529

회원:
2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7
어제:
2
전체:
610,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