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 카레라스 크리스마스 콘서트 (동영상)

2005.12.19 16:50

강학희 조회 수:1411 추천:137


Merry Cristmas & A Happy New Year!!!







 

 

 

호세 카레라스(1946~)


    6살 때 마리오 란자가 주연한 '위대한 카루소'라는 영화를 보고 성악가의 꿈을 키웠던
    카레라스는 11살 때 리세오 극장에서 공연된 파야의 '페드로 주인의 인형극'의 트루지
    만 역으로 처음 무대 경험을 하게 된다. 그는 그때 무대 연기, 가수들과 오케스트라와
    의 협조 등으로 하나의 작품을 완성해 가는 분위기에 매료되어 가수가 되기로 굳게 결
    심했다고 한다. 그의 오페라 가수로의 꿈은 그 10년을 넘기면서 서서히 현실로 나타나
    기 시작했다. 70년 2월 카탈루냐 음악학교에서 대학생들이 꾸민 베르디의 '나부코'가
    상연됐다. 이 작은 무대를 우연히 구경하게 된 세계적인 소프라노 몽세라 카바예는 이
    스마엘로 분한 카바예는 24살의 이 젊은 테너를 그 이듬해 리세오 극장에서 상연된 도
    니제티의 '루크레치아 보르지아'에서 자신의 상대역으로 데뷔시킨 것이다. 그 젊은 테
    너 가수가 바로 호세 카레라스이다.

    그 공연은 그동안 카바예가 출연했던 어떤 공연보다도 성공적이었으며, 카레라스는 하
    루아침에 스페인의 대표적인 오페라 가수로 떠올랐다. 카레라스에게 1971년은 희비가
    엇갈린 한 해였다. 메르세데스와 결혼을 하고 이탈리아의 부세토에서 열리는 베르디 콩
    쿠르를 준비하고 있던 그는 라 코루냐와의 계약 이행을 위해 '라보엠'에 출연하게된다.

    그러나 제 1막에 나오는 아리아 '그대의 찬손'의 최고음에서 그는 절망하고 만다.
    "바짝 조여든 목에서는 닭 우는 소리와 티클의 요들이 범벅된 소리가 나왔습니다. 살
    아있는 기분이 아니었지요. 모든 희망이 한 순간, 물거품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
    안감이 엄습해 왔습니다. "그날 공연은 완전한 실패로 돌아갔고, 의기소침해 있는 카레
    라스에게 힘이 되어준 것은 몇 달 전에 결혼한 아내 메르세데스였다. 베르디 콩쿠르를
    포기하려 한 그에게 아내는 이탈리아로 갈 수 있도록 모든 배려를 해주었고, 불안감을
    불식시켜주었다. 카레라스가 그 해 베르디 콩쿠르를 석권하고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모든 것은 아내 덕분이었다"고 한 것은 괜스레 한 말이 아니었다.

    카레라스의 베르디 콩쿠르 우승은 오페라계에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언론은 그다지
    경탄하지 않았지만, 오페라 전문가들은 이 스페인의 젊은 테너를 '새로운 스테파노의
    출연'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실 리릭 테너로 전형적인 벨칸토 창법을 구사하
    는 카레라스의 목소리는 스테파노와 매우 흡사했다. 에나멜 같은 윤택한 음색을 자유
    롭게 변화시키며 가슴을 때리는 강렬한 울림, 품위 있는 노래의 흐름, 명확한 딕션 등
    을 완벽하게 겸비한 카레라스는 스테파노를 능가하는 기량을 보여주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후 카레라스의 정상을 향한 질주는 계속되었다.

    뉴욕 시티 오페라에서 '나비부인'의 핑커톤 역으로 미국 데뷔를 했고, 런던에서도 몇개
    의 오페라를 연주회 형식으로 노래했다. 고향 바르셀로나 극장에도 계속 출연했다. 게
    다가 아내는 엄마가 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호세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내였다.
    그 무렵 바르셀로나에 카티아 리치아렐리가 온다. 그녀는 스칼라에서 날로 인기를 높이
    고 있는 젊은 소프라노 가수로 탁월한 연기력과 부드러운 미성으로 모든 사람들을 매료
    시키고 있었다. 더군다나 조각처럼 아름다운 미혼 여성이었다. 스칼라 극장을 포함한
    세계의 유명 극장과 각 레코드 회사에서는 그녀에게 법정 이상의 전속 계약금을 제시
    했고, 유명인사들의 구애가 끊이질 않았다. 그 중에는 정열적인 사랑의 편지를 보내 결
    혼을 신청한 스칼라 극장 감독인 파울로 그라시도 있었다.

    그러나 카티아의 관심은 카레라스에게 쏠려 있었다. 그 무렵 파르마의 리세오 극장으로
    부터 '라 보엠 '을 의뢰받은 그녀는 로돌포역을 카레라스가 맡지 않으면 출연을 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극장 측에서는 기꺼이 계약에 응했다. 이 '라 보엠 '은
    72년 가을에 공연되었다. 젊고 잘생긴 호세와 카티아는 로돌포와 미미의 감동적인 사랑
    이야기에 감화되어 버렸고, 청중들은 이들의 연기와 뛰어난 음악성에 찬사를 보냈다. 이
    들의 사랑의 감정은 청중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공연 중에 자연스럽게 싹트기 시작했다.

    그 짧은 공연중의 깊은 포옹은 둘 사이를 정열적인 사랑으로 묶어버렸다. 그해 가을 리
    세오 극장에서 멋진 가수 커플이 탄생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페라사에 가장 고뇌
    에 찬 러브스토리로 남고 말았다. 호세와 카티아는 서로 사랑에 빠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미래가 밝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호세는 카티아에 대한
    사랑이 진실되고 중요한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결합을 꿈꾸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호세
    를 향한 카티아의 사랑은 그칠 줄을 몰랐다. 이러한 상태는 그들의 활동에도 영항을 미
    쳤다. 평론가들은 이들의 공연을 연일 혹평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호세의 아내인 메르
    세데스는 신중하고 현명한 여자였다. 그녀는 카티아를 깊은 애정으로 비호했고, 급
    기야는 호세로 하여금 가정으로 돌아오게 했던 것이다. 호세와 카티아의 불꽃 같은 사
    랑의 열병은 2년 만에 끝이 나고 말았다.

    72년에 파르마에서 '라 보엠 ' 공연을 마친 후 호세는 이 극장에서 베르의 '십자군의
    롬바르디아 인'을 공연함으로써 다시 절대적인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74년에 '라
    트라비아타'로 런던의 코벤트 가든에 데뷔했고, 빈의 슈타츠오퍼에서는 '리골레토'로
    데뷔했다. 그가 밀라노의 라 스칼라 무대에 선 것은 75년 '가면무도회'로 였다.
    그 공연은 한껏 성숙해진 호세의 열연으로 선풍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돌풍을 일으키
    며 등장한 호세로 인해 그동안 세계 오페라계를 주름잡던 파바로티와 도밍고라는 쌍두
    마차는 서서히 위협받기 시작했다.

    카레라스는 그 다음해 카라얀에게 발탁되어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돈 카를로'의
    주연을 맡아 세계 정상에 섰음을 확인해 주었다. 카레라스는 30대에 접어들면서 파
    바로티, 도밍고와 함께 세계 성악계의 '트로이카 시대'의 막을 연 것이다. 카레라스의
    명성은 1982년 스칼라 극장에서 공연된 '안드레아 셰니에'에서 더욱 확고해졌다.
    그 공연은 스칼라 극장 오페라 사상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될 만하다. 무려 22년 동안
    이 오페라는 밀라노의 극장에서 상연된 일이 없었는데, 그것은 이 난역에 적합한 테너
    를 찾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호세는 그 공연을 멋지게 성공으로 이끈 것이다. 이렇듯 승승장구하던 카레라스는 87년
    7월 오페라 영화 '라 보엠' 촬영 도중 갑자기 쓰러져 바르셀로나 병원으로 옮겨졌다.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도 '로돌포 역을 제대로 소화해내야 할 텐데' 라고 입버룻처럼
    되뇌이던 그에게 열 사람 중 한 사람밖에 살 수 없다는 백혈병이란 진단이 내려졌다.

    "혼란과 불협화음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골수 속의 적혈구가 급속히 증식해 백혈구
    를 마구 잡아먹는 것만 같았습니다" 라고 카레라스는 당시의 심정을 회고한다. 스페인
    에서는 하루 세 번씩 그의 건강에 대한 속보가 텔레비전으로 방영되었다. 며칠 후 그
    는 미국 시애틀의 암연구 센터로 옮겨져 화학 요법으로 치료를 받았다. 머리와 손톱이
    빠지고 체중도 점차 줄어들었다. 방사능 치료를 받을 때는 이 모든 고통을 잊기 위해
    머릿속으로 아리아를 불렀다고 한다. 고관절부에서 골수를 빼낼 때는 호흡관이 목청을
    다치게 할까봐 부분 마취법을 썼다. 그의 면역 체계는 골수가 이식될 때까지 일시적으
    로 파괴되어 있었다. 그러나 성대관의 감염으로 1주일간 목소리를 잃기도 했던 그는 몇
    주일 동안 플라스틱 멸균관 속에서 격리 치료를 받아야 했다. 카레라스가 무균실에서
    마지막 투병을 하고 있을 당시파바로티는 "빨리 나아요. 당신이 없으면 나는 누구와 경
    쟁한단 말이오"라는 전보를 보내 쾌유를 빌었다고 한다.

    88년 페레라다 성에서는 잃어버렸던 아들이 되돌아온 듯한 기쁨과 감격의 밤이 있었다.
    불치의 병인 백혈병을 이긴 카레라스가 1년 반 만에 다시 페레라다 축제무대에 나타난
    것이다. 창백하지만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나타난 그에게 감격한 청중들은 꽃다발을 던
    지며 환호를 보냈다. 스페인의 소피아 왕비와 영국의 다이애너 왕세자비, 그리스의 이
    레네 왕자가 직접 참가해 그의 재기무대를 기립박수로 환영해줬다. 청중 가운데에는 카
    레라스의 음악성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그를 자신의 상대역으로 세웠던 몽세라 카바예
    의 모습도 보였다. 한때 그를 그토록 사랑했던 카티아 리치아렐리도 있었다. 객석 맨 앞
    줄에는 하마터면 아버지를 잃을 뻔 했던 두 남매가 엄마 메르세데스와 함께 앉아 죽음에
    직면했던 아버지가 늠름하고 귀족 같은 풍모로 다시 무대에 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40여개국의 비디오 카메라가 설치된 가운데 가곡과 오페라 아리아, 이탈리아 칸초
    네를 노래했다. 그는 현재 오페라 하우스와 콘서트홀 건립을 시도하고 있으며, 호세 카
    레라스 백혈병 재단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많은 사랑을 받은 후 나는 사회에 큰
    빛을 졌다고 느꼈습니다. 그 빛을 갚는 길은 백혈병 재단을 설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했
    지요. 그것은 나의 두번째 삶입니다. 노래를 그만두는 날 나는 이 재단에 몰두할 생각
    입니다. " 89년 런던에서 독창회를 열어 재기에 성공한 카레라스는90년 3월 코벤트가
    든에서 '삼손과 데릴라'의 삼손 역을 열연함으로써 오페라 무대로 돌아왔다.

    실로 4년만의 복귀인 셈이다. 사실 카레라스의 그 공연은 큰 모험이었다. 몇몇 비평가
    들은 "그렇게 오래 병석에 있었던 그가 무대에 선다는 것은 무리"라며 극구 만류하기
    도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공연은 코벤트가든이 생긴 이래 가장 큰 감흥을 불러일으켰
    다. 당시 그의 삼손 역은 용감하고도 장대한 것이었다. '오페라 나우'지의 평론가 피터
    콘라드는 그 잊을 수 없는 첫날밤을 거대한 가발 아래의 그의 얼굴은 전율에 휩싸여 하
    얗게 보였다. 그는 삼손처럼 하늘로부터 받은 은총을 아직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고 썼다. 제2의 삶을 시작한 이후 그의 음악적 삶은 이전보다 더욱 활발해졌다.

    90년 로마월드컵 기념 3대 테너 음악회를 구상한 것도 바로 카레라스였다. 그것은 전세
    계 1억여 인구가 텔레비전을 지켜보는 가운데 거행된 빅 이벤트였다. 94년에 LA에서 다
    시 세 사람이 콘서트를 열었고 이는 98년 파리까지 이어졌다.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함
    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출연하기도 했던 카레라스는 바르셀로나 올림픽 개·폐회식
    음악감독을 맡아 또 한번 그의 건재함을 전세계에 과시하기도 했다.

    소스: 월간 객석


     


     




회원:
2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3
어제:
8
전체:
610,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