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테이프 속에 감겨 진 세월

2009.01.21 17:25

김희주 조회 수:825 추천:57

낡은 테이프 속에 감겨 진 세월
                      김 희 주

삐익, 삐익
알람 소리에도 느긋한 아침, 5일 동안 열심히 일 하면서도 손가락으로 세며 기다렸던 Day Off. 나에게 열린 나만의 시간 이것저것 너무 할 일이 많다.
우선 몇 년 동안 묵혀 두었던 서랍을 열어 잡동사니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다 오래 된 낡은 녹음테이프를 집어 들고 한참이나 망설였다.
버릴까? 말까? 분명히 요즈음은 이런 낡은 테이프를 사용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버리긴 해야겠으나 무엇인지 궁금하였다.
우선 오래된 카세트 녹음기를 찾아 테이프를 넣고 On을 눌렀다.
그 녹음기에선 마음을 끄는 잔잔한 음악과 함께 귀에 익은 멋진 아나운서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싱그러운 풀내음이 물씬 풍기는 뒤뜰
어느 시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향기와 기품이 있는 우아한 국화 송이를
마주하며 하이얀 둥근 테이블을 준비하고 그 위에 내 마음보다 붉은 천을 드리우겠습니다.
그 붉은 천위로 수정보다 맑은 수반에 아스파라가스를 길게 내리고 작은 위스키 잔엔 붉은 장미꽃 한 송이를 띄우겠습니다.
라벤다 향의 촛불을 밝힌 테이블 한 쪽엔 당신의 어머니가 정성껏 키워 오신 푸성귀로 갖은 양념으로 버무린 초록 사랑, 한 쪽엔 당신의 아내가 만든 작은 꽃 마음 한데 어울려 작은 하아모니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식탁을 중심으로 믿음직하고 성실한 당신의 장남, 유머 감각이 풍부한 차남,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하나뿐인 막내딸 이렇게 모여 앉아 당신이 올 때까지 제비처럼 조잘대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남들처럼 대궐 같은 집은 아니지만 비싼 고급차를 굴리진 않지만 철따라 피는 아름다운 꽃이 있고 뒤뜰 가득 매달린 과일들 그리고  레몬 꽃향기, 아침마다 찾아오는 새들의 지저귐에 건강하게 살아가는 우리들.
이렇게 우리 가족 모두 웃음이 있고 건강하며 내일을 위한 노래가 있어 손에 손 잡고  당신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크고 듬직한 두 아들의 사랑을 어머니의 커다란 사랑으로 사방을 둘러 저의 질기고 긴 사랑의 끈으로 묶어 막내딸의 사랑으로 예쁜 꽃봉오리를 만들어 당신의 가슴에 한 아름 안겨 드릴 겁니다.
오늘 이렇게 당신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당신을 기다리는 우리들, 마음  속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오늘이 있음을 감사드리면서 황금빛 일곱 송이 수선화 노래를 함께 드립니다.
1991년. 10월 5일. 당신의 아내 희주 드림”

아, 어쩌면 영원히 잊혀져 버렸을 아름다운 17년 전의 추억을 되 돌려준 낡은 테이프 하나. 고맙게도 방송에 나갔던 사연을 방송국에서 녹음하여 집으로 우송해 준 것을 보관해 둔 채 까마득히 잊고 살았던 세월.
‘황금빛 수선화 일곱 송이를’ 이라는 마지막 노래 가사를 흥얼거리며 지난   날을 다시 거슬러 올라 가 보았다.

그 동안 시어머니께서는 마지막 입고 떠나신 수의 속에 “에미야, 내 장례식에 돈 많이 쓰지 마라. 마련해 둔 이 분홍색 치마, 저고리만 입히면 되고 따로 두루마기는 준비하지 마라. 네 시할머니께서 두루마기 안 입고 떠나셨으니 나도 못 입는다. 그리고 손녀 앞으로 쪽지 하나 ‘수자(수잔)야 할머니가 가지고 있던 돈 전부다. 할머니가 돈이 많지 않아서 미안하다. 이것 너 가져라.’ 이런 쪽지 두 장과 꼬깃꼬깃 지폐 남기시고 86세에 떠나셨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이민 와서 영어 따라 가랴, 어른들 없는 빈 아파트에서
두 동생 챙기랴, 일터에서 돌아오는 부모님 저녁을 위해 된장국 끓이느라 사춘기가 뭔지 모르게 지냈다는 큰 아들, 이제는 착한 며느리와 예쁜 손자, 손녀까지 안겨 주고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일념으로 살아가는 훌륭한 의료인이 되었다.
“엄마, 물고기는 눈을 열고 자요? 눈을 닫고 자요? 라며 영어도 아니고 한국말도 아닌 질문을 하던 둘째도 의젓한 청년이 되어 열심히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우리 고명딸 막내, 하루 빨리 영어를 배우고 싶어 미국 사람 흉내 내면서 “Honey, I love you."하며 안아 주었더니 “ 엄마, 난 엄마의 꿀이 아니야.” 라고 똑똑한 한국말로 나를 당항하게 만들던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백마 타고 올 멋진 기사를 기다리고 있는 어여쁜 처녀가 다 되었다.

누가 “ 이민생활 어때요?” 하고 물어 오면
의례히 습관이 되어버린 대답 “힘들지요.”
아니다. 잘 못된 대답이다.
17년 전과 비교하면 지금은 너무나 편안한 생활이다.
첫째 아이들 걱정에서 해방되었다.
아이들, 충분히 자립하고 있고 오히려 우리가 도움을 받고 있다.
우리 부부 아직까지 건강하게 직장생활 잘 하고 있다.
정말 힘들었던 이민 초기에도 여유롭게 이런 마음으로 지낼 수 있었는데...
버릇처럼 이민생활 힘들다고 하는 잘 못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겠다는 깨우침을 준 낡은 테이프를 소중하게 간직하면서 세월은 우리를 가르치는 스승이라는 걸 깨닫게 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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