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한 짝에 대한 명상

2003.01.29 05:12

김혜령 조회 수:937 추천:85

1. 불시착
아무리 보아도 볼품없는 야산 둔덕이었다. 발을 딛으면 주루룩 아파트 창 앞까지 미끄러져 내릴 것 같은 모래흙에 듬성듬성 기계충 먹은 머리카락처럼 솟아 있는 수풀더미들. 그래서 그런지 아파트 단지에 뒤뜰같이 달라붙은 그 산을 아무도 오르는 것 같지 않았고, 놀이터가 없는 동네 아이들도 그 밑 손바닥만한 풀밭에서 뒹구는 것으로 만족하는 듯했다. 마치 아파트와 산 사이 풀밭 어디쯤에 보이지 않는 금이 그어져 있어 산은 외계의 그림처럼 사람들의 일상에서 철저히 분리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거실 창이나 발코니에 앉아 그 볼품없는 모습을 뜯어보자면 저것도 경치라고 50불을 더 받나 싶어 기가 막히기도 했지만, 그나마 자동차들이 무시로 드나드는 주차장이나 커튼만 열면 앞집 창문을 코앞에 마주봐야 하는 다른 아파트보다는 조금 숨통이 트이는 듯 싶어 그녀가 선택한 자리였다.
게다가 이사올 때 아파트관리인에게 들은 바로는 그 산에 토끼, 다람쥐, 너구리는 물론 사슴도 있다고 했다. 물론 사슴보다는 낙타가 더 어울릴 모래산이었지만 토끼나 다람쥐, 도마뱀이 사는 건 사실이었다.
정말 도마뱀은 많기도 했다. 발코니나 아파트 현관으로 오르는 계단, 더러는 현관 문짝에도 작게는 벌레 만하고 길게는 한 뼘 길이쯤 되는 도마뱀이 따가운 햇볕 아래 마른 풀잎처럼 붙어 있다가 그녀가 다가서는 순간 재빨리 달아나곤 했다. 그 달아나는 동작이 하도 빨라서 마치 푸르거나 노란 물감이 한 줄기 그녀의 시야에서 빠져 보이지 않는 시간의 틈새로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도마뱀을 보고 난 다음이면 뭔가 잡으려던 걸 놓친 듯 허전했고, 살갗에 닿는 햇빛은 모든 걸 표백시켜 버릴 듯 더 강렬하게 느껴져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아, 이렇게 내가 지워지는 구나, 하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양초가 녹듯 조금은 슬프지만 나른하고 감미로운 느낌이었다.
그 외에도 가끔 무심코 고개를 들면 눈이 마주치는 다람쥐나, 잔디밭에 솜 덩어리들처럼 앉아 있는 산토끼들. 조용한 시간이면 들리는 풀벌레 울음소리와 함께 그런 소소한 것들이 그녀가 결혼 전까지 줄곧 살아온 계획도시와 달랐고, 마치 여름방학을 맞아 남편과 함께 시골 산장에 놀러온 듯한 기분이 들게 했다. 여름방학? 서른도 훌쩍 넘긴지 오래인 사람들이 방학이라니. 그녀는 자신의 정서가 아직도 유년과 학창시절에 매여 있음에 실소했다.
어쨌건 퇴근 후의 그들의 시간은 방학과 다름없었다. 서두를 이유가 없는 그들은 군것질로 허기를 달래다 늦으막이, 때로는 요리책을 펼쳐보며 서투른 저녁을 해먹었고, 음악을 틀어놓고 아직 침대도 들여놓지 못한 방바닥에 나란히 누워 달빛을 바라보거나, 설거지를 개수대에 하나 가득 쌓아 놓은 채 잠이 들기도 했다. 분지라 날씨가 유난히 더운 휴일에는 대낮부터 둘 다 발가벗고 지내다가 야산자락 밑으로 지나는 사람기척에 황급히 구석으로 숨거나 커튼을 닫기도 했다.
그들은 금요일 밤이면 거의 예외 없이 극장에 갔고, 영화가 끝나면 커피를 마시고 책방에 앉아서 이 책 저 책 뒤적이다 언제 읽을지 모를 책들을 각자 한 보따리씩 사들고 들어왔다. 웬 허기였을까, 그렇게 사들인 책들이 좁은 방 구석구석에 쌓여갔고, 뭔가 쓰리라 맘먹고 사들인 노트와 각양각색의 펜들도 화장실을 포함한 집안 곳곳에 꽂아 두었지만, 책도 노트도 펼쳐보지 못한 채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짧지 않은 세월 읽고 쓰는 일에 길들여진 그녀가 방학숙제 안 한 아이 같은 죄책감으로, '난 요즘 완전 골빈당이야' 하고 말하면 남편이 그녀를 위로하듯, '내가 전에 읽은 시인데 말야' 하며 얘기를 꺼냈다. '기억이 정확하진 않아도 어떤 뜻이냐면 말야, 세상이 다 무너져도 나 여기 벽돌 한 장 다시 놓으리라. 그런 거야. 멋있지? 어느 실업가가 자기 체험담에 인용한 시였어.' '사과나무가 아니라?' '아니, 벽돌 한 장. 그 시 때문에 산 시집이 어디 있을 텐데.' '그 사람 지금 실업가야, 실업자야?' 그들은 낄낄거리며 벽돌 대신 두꺼운 책을 하나씩 놓고는 목침 삼아 누워버리곤 했다. 아파트를 구할 때 읽고 쓸 방이 따로 있어야 한다고 방 둘 짜리를 구했지만, 두 방 다 두 사람이 누워 뒹구는 장소가 되고 말았다.
주말 밤이면 수영복 바람으로 빨래바구니를 들고 나가 동전 넣는 세탁기에 빨래를 넣고, 그 앞 자쿠지에 몸을 담근 채 어두워 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뭇잎 사이로 물방울처럼 흩어진 별들이 보이고 거뭇거뭇 얼룩진 달이 무심히 흘러가는 모습도 보였다. 그럴 때면 그녀는 그 동안 형편없이 가벼워진 자신이 어두운 우주를 표류하고 있는 듯한 아찔한 느낌 때문에 얼른 남편을 향해 손을 뻗어 확인해야 했다. 우리 지금 지구표면에 붙어 있는 거 맞지?
그들이 빨래바구니나 책보따리를 들고 아파트에 들어설 때면 야산자락에 모여 풀을 뜯고 있던 토끼들이 흩어져 달아났다. 주먹만한 꼬리 때문에 하얀 솜 덩어리들을 어둠 속에 뿌리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그 하루 동안 그녀 안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던 이런 저런 상념들도 흩어지고 그녀는 더욱 더 가벼운 사람이 되어서 남편의 손을 잡고 잠자리에 들곤 했다.

남편이 늦는 어느 날, 침실 앞 베란다에 멍하니 앉아있던 그녀가 밑도 끝도 없이 '불시착'이란 말을 생각해낸 것은 아마 그 볼품없는 야산 위를 지나가는 비행기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햇빛이 사위어 가는 초저녁이었어도 경비행기가 매단 전조등은 그녀 앞의 야산만큼이나 힘없고 초라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위치에서 보면 메마른 능선에 닿을 듯 닿을 듯 낮게 날아가는 모습이 곧 잡풀더미 어딘가에 내려앉고 말지 싶게 위태로워 보였다. 어느 한 순간쯤은 그런 아슬아슬한 마음 한편으로 그 경비행기에서 내릴 조종사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 야산이 무슨 대단한 사막이라고, 그 조종사를 찾아올 어린 왕자와 상자 속의 양과 여우며 꽃이며 그런 일련의 상념이 도마뱀 마냥 잠시 그녀의 시선 한 구석에 달라붙어 발름발름 숨을 쉬었던 것도 같다.
그러나 비행기는 곧 그녀의 시야를 벗어나 사라졌고, 그와 함께 잠시 그녀를 흥분시켰던 상념도 한 줄기 물감처럼 그녀 안의 어느 틈새론가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마치 지구 전체에 혼자 남은 듯 무연했다. '불시착'이란 엉뚱한 말만 상념이 사라진 틈새 위에서 딱지처럼 말라가고 있었다. 내가 왜 여기 있나. 내가 어쩌다 이런 낯설고 볼품없는 경치 속에 떨어졌나? 눈앞에 보이는 경치가 곧 생각 없이 지내는 자신의 내면풍경이라도 되는 듯 그녀는 황량한 기분이 되었다. 더구나 저 산은 넘어가기도 힘든 모래산이 아닌가.
그녀는 '불시착'이란 말을 되씹으며 야산의 잡풀들을 서서히 금빛, 핏빛으로 물들이며 지는 해를 바라보다가 벌떡 일어났다. 자신이 신혼이란 사실을 기억했던 것이다. '불시착'이라니. 다른 누가 그런 말을 했다면, '심히 불경스럽도다' 하며 제법 근엄한 표정으로 꾸짖기라도 했을 테지만. '불시착'이란 말이 그녀의 현재를 단숨에 부인하고 지워버릴 수 있는 힘이라도 있는 것처럼 질색을 하며 방으로 달려가 카메라를 꺼내왔다.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언젠가는 이 '산장'에서의 날들을 무섭게 그리워하리라. 마치 이제 곧 어스름이 닿으면 그 모든 것들이 그녀에게서 사라질 듯이, 바로 그 어스름이 그녀를 그 순간의 밖으로 밀어내기라도 할 듯이, 그래서 어스름이 지난 뒤 다시 눈을 뜨면 견딜 수 없는 그리움에 사로잡히게 될 듯이, 그녀는 황급한 마음으로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사각의 카메라 속으로 그 시간, 그 느낌들을 모두 쑤셔 넣으려고,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밀려오는 어둠과 싸움하듯 셔터를 눌렀다. 잡풀 더미를 찍고, 남편의 빈 의자를 찍고, 다시 잡풀 더미를 찍고, 야산의 둔탁한 능선을 찍고, 도마뱀이 지나는 나무 계단을 찍고, 며칠 전 너구리와 눈이 마주친 나뭇가지를 찍고, 토끼들이 수시로 뜯어먹어 헐벗은 잔디밭을 찍고, 또 다시 잡풀 더미를 찍고, 자신의 빈 의자를 찍고.... 시선이 닿는 모든 것을 찍고, 찍고, 또 찍었다. 곧 형체 없는 기억으로 변할 그것들을 그 자리에 꼭꼭 박아 놓으려는 듯이. 어떻게든 이 잡혀주지 않는 시간을 의미의 틀 속에 넣어버리고야 말겠다는 듯이.
그래도 해는 곧 산너머로 사라졌고, 야산은 곧 그녀를 가로막는 울퉁불퉁한 어둠덩이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2. 신발 한 짝
가을이 가고 겨울이 시작될 무렵 그들은 작은 집을 장만해 이사를 갔다. 침대와 가구들을 이것저것 들여놓고 그 동안 사 모은 책들도 정리했지만 여름과 가을을 지낸 아파트에 비하면 집은 턱없이 커 보였다. 거실 창문 앞에 서면 앞을 가로막던 야산 대신 멀리 자동차들이 떼를 지어 지나는 고속도로가 보이고 그 뒤로는 너무 멀어 표정을 알 수 없는 산들이 울퉁불퉁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방학처럼 '산장'에서 지낸 여름은 저만치 멀어지고 그녀는 준비 없이 겨울을 맞는 베짱이처럼 조금은 허전하고 어설픈 기분이었다.
그녀는 거실 창에서 석양을 보려고 퇴근 후에 급히 달려오곤 했지만 이미 해가 짧아져서 그녀가 자리를 잡고 앉을 때쯤이면 흑자줏빛 띠를 두른 능선 위로 비행기가 한 대쯤 불빛을 반짝이며 지나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눈앞에 그녀가 미처 살아보지 못한 시간의 막이 내리고, 알 수 없는 그 무엇의 종말을 알리듯 별 하나가 스러져 가는 것만 같았다.
이사를 하고도 두 달이 더 지나서야 그녀는 아파트에서의 사진들을 현상했고, 그 사진 속에서 신발 한 짝을 발견했다. 새하얀 신발은 색색의 메마른 잡풀더미 사이에서 삐죽이 코를 내밀고 있었다. 거리 때문에 정확하지는 않아도 흔히 볼 수 있는 운동화 같았다. 왜 사람도 다니지 않는 그 곳에 신발 한 짝이, 더구나 새것으로 보이는 신발이 놓여 있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주위를 둘러보아야 헐벗은 야산과 무료한 하늘밖에는 없는데, 누가 신발 한 짝을 벗어놓고 어디로 갔을까, 그녀는 사진 속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군가 껑충 하늘로 뛰어오르다 떨어뜨리기라도 한 것인지, 아니면 마술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황급히 산을 넘다 떨어뜨렸는지. 그것도 아니면 누군가 홧김에 내던진 것일까. 하지만 한 짝이라니. 화가 나서 던졌다면, 야산 중턱에 닿도록 그렇게 멀리 던질 수가 있었을까. 그녀 생각에 결코 낮지 않은 그곳까지 신발이 닿으려면 분노와는 어울리지 않는 아주 우아한, 차라리 희망이나 포부, 그런 말에 더 어울리는 포물선을 그려야만 할 것 같았다. 신발의 주인이 바로 자신이기라도 한 듯이, 그 신발이 야산 둔덕에 두고 온 자신의 일부이기라도 한 듯이, 그녀는 그녀의 사진 속에 불시착한 듯한 그 신발에 마음이 쓰였다.
어쨌건 그렇게 뒤늦게 발견된 신발은 그날 밤 그녀의 사진에서 일어나 꿈속으로 걸어 들어왔고, 마침내 그녀의 혼 속을 걸어다니기 시작했다. 아니, 짝을 갖춘 신발이 아니라 한 짝이었던 만큼 걸어 다녔다기보다는 깨금발로 뛰어다녔다거나 신발을 신지 못한 맨발과 보조를 맞추느라 절름절름 다녔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겨울이 다 가도록 그녀는 지치도록 신발을 신고 꿈속을 헤매고 다녔다. 때로는 그녀도 제어할 수 없을 만큼 너무 빨리 다녀서 그녀의 다리에 발이 아니라 바퀴가 달린 것이 아닐까, 그녀 전체가 폭포가 되어 쏟아지고 있는 건 아닐까, 덜컥 겁이 나서 깨어날 때도 종종 있었다. 어디로 무엇을 찾아 그리도 빨리 쏘다니고 있는지는 몰라도,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이면 끝을 알 수 없는 깜깜한 심연이 그녀의 망막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 메마른 야산 꼭대기에서, 아니 불시착하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보이는 광경이 이럴까? 그녀가 경험한 속도감은 폭포처럼 맹렬한 것이었다. 폭포의 흰 포말 속에는 터질 것 같은 그리움이 거센 울음 속에 담겨 있었다.
그렇게 깨어난 밤이면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옆자리를 슬그머니 바라보았다. 혹시 그도 같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그 역시 신발 한 짝으로 때로는 절름거리며, 때로는 쏟아지며 꿈속, 심연의 주위를 헤매고 있는 건 아닐까. 그녀는 잠든 남편의 발에 제 발을 가만히 대어보았다. 우리가 한 짝씩 신발을 신고 있는 거라면, 함께 헐벗은 야산을 넘어 우리의 심연에 도달할 수 있을까. 그곳에 닿으면 꿈 없이 편안할까?
그녀는 곤히 잠든 남편을 바라보다가 책장을 뒤져 전에 사 둔 빈 노트를 꺼냈다. 꿈속을 헤집고 다니는 신발 한 짝에 대해 써보려고 컵에 꽂아놓은 각양각색의 펜들을 하나씩 꺼내보았지만 첫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번번이 노트를 덮어버리고 말았다. 마술, 벗겨진 유리구두, 밤새워 춤추는 분홍 신, 외계인이 떨어뜨린 신발, 그리고 불시착.... 그런 엉뚱한 단어들 사이를 껑충껑충 뛰어 다니는 그녀의 신발은 이제 하늘로부터 그녀에게 던져진 화두(話頭)가 되어가고 있었다.

신발의 고단한 꿈은 그녀의 몸 속에 아이가 찾아들기까지 계속되었다.
초음파 화면 속에서 만난 아이는 처음에는 콩콩 뛰는 심장이었다가, 다음 달엔 머리와 심장이었다가, 다음 달엔 팔과 다리와 귀의 윤곽까지 제법 또렷이 갖춘 모습이 되었다. 한 달에 한 번 진찰대 위에 누워서 듣는 아이의 심장 소리는 조금씩 더 힘센 기관차 소리로 변해갔다. 그녀는 이제 먼 산 위의 석양을 보기 위해 집으로 달려오지 않았고, 행선지를 모르는 비행기의 불빛을 바라보며 아쉬워하지도 않았다.
노트를 펼쳐놓고 날마다 아이에게 소곤소곤 편지를 쓰는 동안 신발 한 짝을 신고 쏟아지던 폭포의 물줄기도 멈추어 버린 듯 했다. 대신 자신이 채우지 못하고 비워놓은 행간을 뚫고 씩씩하게 달려가는 작은 기차소리를 들으며 미소지었다. 기차는 리듬을 잃지 않고, 폭포처럼 울거나 자신을 부수지도 않으며, 쉬지 않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그 작고 튼튼한 기차와 함께라면 그녀는 어떤 두려움도 허전함도 없이 살수 있을 것 같았다. 리듬을 잃지 않고, 천리를 가도 흐트러짐 없이 형체도 단정하게.
그녀는 다른 아무도 보지 못하는 상자 속에 착하고 귀한 양 한 마리를 그려 가진 듯 자랑스럽고 뿌듯했다.

3. 문
진통을 시작한지는 벌써 만 하루가 가까워오지만 그녀의 자궁문은 시원스럽게 열려지지 않았다. 척추에 마취약이 흘러드는 주사바늘을 꽂은 채 새벽을 맞으면서 그녀는 신음했다. 신음소리를 듣고 달려온 간호사와 남편이 어디가 아픈가 번갈아 물었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의 어디가 아픈지를 알 수 없었으므로. 고통은 그녀의 몸 안이 아닌 어딘가 잡혀지지 않는 먼 곳, 또는 너무 깊은 곳, 바라보면 아찔한 심연에 있는 것만 같았다. 자신의 신음소리마저 깊은 산의 메아리처럼 멀었다.
마취사가 다시 불려오고, 마취약이 추가 투입되고서야 그녀는 다시 흥건한 반 수면의 물결에 자신을 맡길 수가 있었다. 간호사가 그녀의 물먹은 솜덩어리처럼 무거운 다리를 헤집으며 자궁문의 지름을 재고 고개를 가로 저은 뒤 그녀의 몸을 그때까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돌려 눕혀 주었다. 마취약이 그녀의 하체에 골고루 퍼지라고 간호사는 두 시간에 한 번씩 찾아와 그녀를 돌려 눕히고 갔다. 그녀는 느낌도 움직임도 없는 짐짝 같은 자신이 해안에 버려진 고래 같았다. 메마른 그녀의 살갗 위로 따가운 아침 햇살이 들기 시작하는데, 수면(睡眠)의 물결은 그녀를 적실 듯 적실 듯 사라져 가버리곤 했다. 바로 저기가 영원일 텐데. 저 물결에만 닿으면 편안할 텐데.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문 열어라....
언제부턴가 그녀는 꿈결인 듯 그런 중얼거림을 되풀이했다. 속 시원히 적셔주지 못하는 물결과 함께 그녀의 삶이, 그 속에 담긴 소중한 무엇과 함께 저만치 물러가는 것만 같아 그녀는 메마른 살갗으로 허덕였다. 문을 열어, 제 안의 물길을 열려고 그녀는 안간힘을 썼다.
문 열어라, 문 열어라....
그녀는 온몸, 온 의식과 무의식이 모두 함께 열리지 않는 문이 되어 신음했다. 열리지 않는 문 안 쪽에 갇힌 아이가 작은 머리를 들이박으며 함께 외쳤다.
문 열어라, 문 열어라....
우리 이 세상에서 만나 함께 무엇이 되려 하는가. 무엇을 이루려 하는가. 열린 문 밖, 이 세상에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그녀는 아이와의 만남을 고대하면서도, 이 고통의 시간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냥 이대로 잠들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냥 이대로, 아이와 하나인 채로, 아이를 그녀의 내장처럼, 상자 속의 보이지 않는 착한 양처럼 안전하게 담은 채로, 한 겹 한 겹 시간의 물결을 지나 영원 속으로 스며들고 싶었다.

미끈덩, 열리지 않던 그녀의 문이 훌렁 열린 듯 몸 속에서 무언가 빠져나가는 듯 하더니 곧 거센 울음이 들렸다. 아이는 그녀의 배 위에 얹혀져서도 두 눈을 질끈 감고 온몸으로 기를 쓰고 울어댔다. 물에 불어 퉁퉁 부은 눈과 몸뚱이를 보는 순간 그녀의 입에서도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안에서 많은 것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고통이 빠져나가고, 시간의 물결이 빠져나가고, 그녀의 혼과 몸의 정수가 빠져나갔다.
그녀는 우는 아이에게 손가락 하나를 내밀었다. 나를 잡아 줘. 이대로 내게서 빠져나간 물결을 따라 멀고 깊은 바다로, 영원 속으로 도망치고 싶은 나를 꼭 잡아 줘. 껍질만 남은 듯 헐거워진 몸으로 그녀는 쿨럭쿨럭 울었다. 내게 너라는 실체를 느낄 수 있게 해줘.
아이의 작은 손이 그녀의 손가락을 잡는 순간 잠시 녹음테이프가 끊기듯, 시간이 멈춘 듯, 아이의 울음이 멈췄다. 아이의 붙잡는 힘이 그녀의 손가락을 통해 가슴으로 전해지고, 그녀는 숨을 죽였다. 곧 간호사가 아이를 씻기겠다고 채갔지만, 그리고 아이의 울음은 다시 계속됐지만, 그녀의 혼 속에 그 순간은 아름다운 진공으로 새겨졌다. 소리도, 색깔도, 움직임도, 무게도 없는 진공의 순간. 그 첫 만남의 순간은 그냥 그렇게 사정없이 환하기만 했다.
물 빠진 갯벌에 혼자 누운 고래처럼 그녀는 멍하니 누워 눈을 감았다. 따뜻한 햇살이 감은 눈 위에 어른거렸다. 햇살에 마른 갯벌은 어느새 모래산이 되었고, 그 위에 제멋대로 자란 수풀더미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신발 한 짝이 웅크리고 있었다. 가겠다는 건지, 오겠다는 건지, 갈 방향을 알지 못해 주춤거리듯이.
아, 네가 여기까지 따라왔구나. 그녀는 끙, 소리를 내며 돌아누워 버렸다.

4. 환기통 속의 비둘기
아이는 젖을 빨고, 울고, 자는 일만을 이십 사 시간 끊임없이 반복했다. 그녀의 삶도 젖과 기저귀와 잠으로만 이루어진 것 같았다. 배고프다고, 기저귀가 젖었다고, 졸립다고, 또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아이는 종종 온몸이 빨갛게 달아올라 울어댔다. 마치 이 작은 몸 속에 갇힌 것이 억울해 죽겠다는 듯이. 그런 아이 앞에서 그녀는 죄인처럼 쩔쩔맸다. 내가 괜히 너를 불러 이 조그만 감옥 속에 가두었구나. 성가 싫게 먹고 배설하고 외로움과 두려움에 울어야 하는 세상으로 끌어들였구나. 아이가 기를 쓰고 울 때마다 그녀는 자신이 세상에 다시없이 생각 없고 이기적인 사람 같이 느껴져서 안절부절하며 눈물을 흘렸다. 어쩌니, 어쩌니, 아가야. 영원의 물결은 이미 저만치 밀려가 버렸는데. 이젠 우리 꼼짝없이 이 곳에서 하루하루를 살아야 하는데. 아침에 남편이 나가고 아이와 단둘이 남을 때마다, 그녀는 밖에서는 들리지 않는 울음의 벽 속에 아이와 함께 갇히는 것 같아 외롭고 두려웠다.
아이를 가슴에 얹고 잠이 들면 꿈속에는 다시 메마른 야산둔덕이 보이고, 수풀더미 사이로 하얀 신발 한 짝이 보였지만, 저 신을 신어야 할텐데, 신고 산을 넘어야 할텐데, 하는 것도 생각 뿐, 이젠 그마저도 닿을 수 없이 멀어 보였고, 그녀는 신발을 향해 움직여보기도 전에 모래산에 묻히듯 잠 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겨우 잠든 아이를 살금살금 가슴에서 떼어 눕혀 놓고 도둑질하듯 늦은 점심인지 이른 저녁인지 모를 끼니를 챙겨 먹던 어느 날, 그녀는 가스레인지 앞에서 부우, 부우, 하는 울음소리에 동작을 멈추었다. 가까운 듯 멀고, 먼 듯 가까운 소리. 아주 오래된 울음인 듯 귀에 익었다. 한동안 부엌과 다용도실을 맴돌고 난 뒤에야, 그녀는 그 소리가 가스레인지 위 환기통을 통해 들리는 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종종 환기통이 달린 가스레인지 앞에 서보곤 하는 일이 많아졌다. 부, 부우, 부우, 부우. 안개를 뿜어내는 듯한 소리. 가슴 밑바닥, 그녀의 의식이 쉬이 미칠 수 없을 듯 깊고 깊은 바닥을 두드리는 듯한 둔탁한 울음을 되풀이 듣고 있노라면 졸음과 아이의 울음소리만으로 꽉 차 있던 자기 안에 그곳을 향한 어렴풋한 길이 생기는 것만 같았다. 내 안에 그렇게 아득히 멀고 깊은 곳이 있었다는 새삼스런 깨달음, 그리고 어쩌면 그곳에 도달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로 그녀는 어느 새 부, 부우, 부우, 부우, 하는 새 울음을 귀에 매달고 살게 되었다.
새가 그녀의 환기통을 찾지 않아도, 환기통 아래에만 서면, 아니 때로는 거기까지 가지 않아도, 울음의 메아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그녀 깊숙이 새 울음이 새겨졌을 즈음에야 그녀는 그런 울음을 우는 새에 대해 알아볼 생각을 했다.
애도하는 비둘기 (Mourning Dove). 신혼시절 그녀가 함부로 사들였던 책더미 중에 CD를 곁들인 조류사전이 있었다. 부우, 부우 하는 울음만으로 부엉이나 그 친척쯤으로 짐작했던 그녀에게는 의외의 이름이었다. 더불어 울음이 들릴 때면 커다란 눈으로 마치 그 눈 크기만큼의 의문인 양 그녀를 응시하던 새의 다부진 영상도 머릿속에서 지워야 했다. 그녀가 조류사전에서 찾아낸 '애도하는 비둘기'는 잿빛 깃털로 덮인, 때묻은 신발 짝 마냥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새였다. 이름 때문이었을까, 색깔 때문이었을까. 평화의 상징으로 무슨 식 때마다 푸른 하늘을 채우며 날아가는 흰 비둘기와는 거리가 먼 우울한 모습의 새였다. 무엇을 응시하기보다는 그냥 흐린 하늘 어디쯤인가 시선을 잃어버린 듯 깃을 접고 멀거니 서 있는 새. 그녀의 가슴을 울리는 울음의 횟수대로라면, 그렇게 쉬지 않고 부연 울음을 뿜어낸다면, 곧 제 울음처럼 흐린 하늘 속으로 형체를 잃고 흩어져 버릴 듯 속절없이 보이는 새였다. 달리 애도할 이유가 없다면 바로 그 새를 위해서라도 애도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녀가 환기통 속의 비둘기와 함께 부우, 부우, 울음을 뿜어내며, 모래산 같이 쌓이는 피곤과 잠에 묻혀 지내는 동안에도 아이는 신나게 자라났다. 잠자는 아이의 가슴에 귀를 대보면 아이의 심장은 이제 산을 만나면 산을 뚫어 굴을 만들며 달려갈 듯 힘센 기관차가 되어 있었다. '우리 아기 첫 이유식'이나 정월 한 달 쓰고 잊어버린 가계부 틈새, 더러는 아이의 장난감 밑에 깔린 그녀의 노트들 속에는 제멋대로 날뛰다 지친 신발 한 짝이 부우, 부우, 하는 울음을 담고 숨어 있었다.

5. 어린 신발광
종횡무진 뛰어 다니는 아이를 좇아 다니느라 그녀는 늘 숨이 차고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백화점이나 책방, 미술관이나 병원 같은 공공장소에서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요리조리 빠지며 뛰어 다니는 아이를 정신없이 따라다니다 보면, 내가 이곳에 왜 왔던가 싶어지고, 그 아이가 상자 속의 보이지 않는 착한 양이며 작은 기차였던 시절이 문득 그리워지곤 했다. 그러나 일단 출생의 문을 열고 나온 아이에겐 모든 것이 신기했고, 달려가는 발걸음이 곧 길이었다.
그녀가 직장에 나가는 낮 시간 동안 아이를 보아주는 어린이집의 보모들이 아이를 가리켜 어린 신발광이라고 불렀을 때 그녀는 자신의 오랜 꿈을 들킨 것 같아 잠시 숨을 죽였다. 꿈도 유전되는 것일까? 다른 아이가 벗겨진 제 신발을 건드리면 세상이 무너진다고 했다. 거침없이 내달리다가도 신발이 벗겨지면 아이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서 신발을 가리키며 울었다.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고 발버둥치며 울다가도 신발이 벗겨지면 신발을 가리키며 바늘에 찔렸을 때보다도 더 날카롭고 크게 울었다. 벗겨지지 않더라도 끈이 풀어지면 마찬가지였다. 아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제 발에 신겨진 한 켤레의 신발을 사수해야 한다는 사명감과 결의로 단단히 무장하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 같았다.
그날도 공원에서 털북숭이 개를 본 아이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도기, 도기 (Doggy, doggy), 외치며 달려갔고 신발 한 짝이 벗겨지자 그 자리에 멈춰 서 버리고 말았다. 슈우, 슈우 (Shoe, shoe), 도기, 도기...... 아이는 벗겨진 신발과 멀어지는 개 사이에서 갈 바를 모르고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했다. 뒤늦게 달려간 그녀가 신발을 다시 신겨주었지만, 이미 약이 바싹 오른 아이는 온 세상을 눈물바다로 만들 듯, 세상이 다 끝난 듯 악을 쓰며 발버둥치며 대성통곡했다.
자동차를 타고 집에 돌아오면서도 잠이 들 듯 들 듯 들지 않고 울던 아이는 차에서 내리는 순간 선잠이 깨어서 다시 울기 시작했다. 안아줘도, 우윳병을 물려도 멈추지 않고 목청이 터져라 떼를 쓰며 울었다. 이 바보야, 개가 그렇게 좋았으면 맨발로라도 가지. 마침내 아이보다 더 얼굴이 시뻘개진 그녀가 홧김에 신발을 내동댕이치는 통에 아이는 바늘에 찔린 듯 더욱 거세게 울었다. 그녀가 한숨을 몰아쉬며 거실에 가득 쌓인 아이의 장난감을 이것저것 꺼내 아이 눈 앞에 흔들어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아이는 신발을 원망하고 그녀를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듯 조그만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신발귀신이라도 씐 것 같이 쉬지 않고 울어댔다.
눈물바다에 잠긴 듯 귀가 멍멍해진 그녀는 무거운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오디오를 켰다. 달랠 기운도, 악을 쓸 기운도 없어진 그녀가 지푸라기 잡듯 아이의 울음과 싸워줄 원병을 찾은 것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이는 그 순간 마치 그녀가 아이의 목청 어딘가에 숨어있는 '침묵' 단추를 누른 듯 갑자기 울음을 멈추었다.
부, 부우, 부우, 부우.
조용해진 집안에 새 울음소리가 퍼져 나갔다. 언제 저 CD를 걸어놓았던가. 땀이 질척하게 밴 그녀의 가슴에 개구리처럼 찰싹 달라붙은 채 아이는 이제 새에게 울음을 맡겼는지 새근새근 잠이 들어가고 있었다. 우느라 땀에 푹 젖은 아이의 가는 머리카락이 그녀의 가슴에 엉겨붙었다. 열려진 거실 창으로 한 줄기 바람이 흘러들고 그녀의 가슴에도 작은 환기통이 뚫리는 것만 같았다.
'애도하는 비둘기'. 북미지역에 흔한 야생비둘기. 철새.
철새? 내가 그 울음을 품고 지냈던 계절이 언제였던가. 마치 전생의 일 같이 까마득했다.
길고 뾰족한 꼬리를 가졌으며, 목 양쪽은 보라색과 분홍색......
그녀는 잠든 아이를 가만가만 가슴에서 떼어 거실 바닥에 눕히고 창문에 다가섰다.
부, 부우, 부우, 부우...... 울음은 붉고 노란 석양을 따라 하늘 가득 번져가고 있었다. 그 아래로 지친 고래처럼 드러누운 산들의 윤곽이 보이고, 고속도로를 지나는 자동차들의 불빛이 살갗에 박힌 모래알 마냥 작게 반짝였다.
어둠이 쌓여 가는 저 산들 중엔 그 볼품없는 야산도 있을 것이었다. 그녀의 하얀 신발 한 짝을 품고 있는, 발 딛으면 미끄러질 듯 메마른 모래산. 밤마다 풀을 뜯던 토끼들이 흩어지고, 도마뱀이 한 줄기 물감처럼 보이지 않는 틈새로 사라지는 곳. 그렇게 하루하루의 상념이 사라지고 시간이 빠져 달아나는 곳. 그런 산들을 몇이나 넘어 여기 온 걸까.
비행기 한 대가 불빛을 깜빡이며 닿을 듯 닿을 듯 아슬아슬 산을 넘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 누가 이 세상에 불시착했다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누가 이 곳에 오기를 계획했을까. 툭, 어느 가지에서 떨어진 열매의 씨앗처럼, 어쩌면 누군가의 희망으로, 어쩌면 누군가의 분노로 함부로 던져진 신발 짝처럼, 어느 순간 이 세상 한 모퉁이에 떨어져, 어느 날 죽음이란 뱀에 물려 쓰러지기까지, 그래서 다시 흙으로 부서지기까지, 신을 챙겨 신고, 더러는 신발 한 짝, 또는 두 짝 모두를 잃어버린 채 능선을 넘고, 미끄러져도 다시 일어서 넘으며, 가고 또 가는 곳. 때로는 석양을 따라, 별을 따라 의자를 수 없이 옮겨 앉으며, 때로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 구렁이를 모자로 착각하며, 때로는 괜한 모자를 두려워하며......
응, 으응, 하는 소리에 돌아보니 아이의 작은 발 하나가 공중으로 올라온다.
슈우(Shoe).
아이는 잠을 자면서도 어디를 가려는 건지 신발을 신겨달라고 잠꼬대를 한다. 그녀가 아이의 발을 손으로 감싸자, 다른 발이 또 올라온다.
슈우.
그녀는 아이의 작은 두 발에 차례로 입을 맞추고 가만히 제 가슴에 대어 보았다.
그래, 수많은 털북숭이 개를 놓치고 도마뱀을 놓치고 시간과 생각도 모두 놓쳐버리고 금방이라도 지워질 듯 허전한 마음으로도 다시 상자 속에 양 한 마리를 키우며, 꽃에 물을 주고, 여우를 길들이고 그에게 길들여지며, 더러는 삶의 물살에 자신마저도 놓쳐 버리고 잡아줄 누군가의 손길을 향해 허우적거리며 견뎌보는 곳. 그래, 그래야 우리가 만날 수 있었을 테니까.
새 울음도 멎고 석양도 한풀 꺾인 집안은 잠시 색깔도 소리도 움직임도 무게도 없는 진공 속에 놓인 것 같았다. 잠자는 아이의 얼굴에 슬며시 만족한 듯한 웃음이 번지는 걸 보고, 습관대로 카메라를 향해 손을 뻗으려다 말고 그녀는 아이의 두 발을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아이의 작은 발자국을 가슴에 새길 듯. 그래, 내 가슴을 밟고 가거라. 무너지는 모래산에서도, 쏟아지는 폭포 속에서도 내가 너의 디딤돌이 되리라. 너의 신발이 되리라.
문득 그 볼품없는 모래산도 그 속에 참 많은 것을 키우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아는가. 보지는 못했어도 그 속에 정말 두 눈이 머루 같은 사슴도 자라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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