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모나라의 요술피리

2003.02.05 03:35

김혜령 조회 수:891 추천:71

멀고도 가까운 시절, 어느 깊고 외딴 곳에 네모나라가 있었고, 그 작은 나라에 요술피리를 부는 이상한 사람이 살았다. 처음부터 그 피리가 요술피리였던 것은 아니고, 그 사람 역시 날 때부터 이상한 사람이었던 것은 아니다. 적어도 그 일이 있었던 당시에 그의 얘기를 전해 들은 몇몇 사람들은 그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무언가 깊이 동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눈앞에서 멀어져 가는 정다운 무엇을 배웅하듯 먼 곳을 바라보는 슬픈 얼굴로 입을 다물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그들의 다물어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인 것이다. 보이지 않아도 땅 속에는 맑은 샘물이 흐르고 하늘에는 햇빛 눈부신 대낮에도 별들이 총총이 떠 있듯이, 입을 열지 않아도, 글로 쓰지 않아도 사람들 사이에는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네모나라는 참으로 조용하고 깨끗했다. 모든 것이 반듯반듯 정리되고 깨끗깨끗 닦여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도시들도 마을들도 마을 속의 모든 것들도 한결같이 네모 반듯했다. 학교, 상점, 집 같은 건물 뿐 아니라, 공원과 숲, 밭이며 연못까지도 착오 없이 네모났다. 집들은 손톱만큼의 어긋남도 없이 정확한 직선들로 이루어졌고, 수시로 닦아서 네모난 굴뚝 속까지 먼지 한 점 없이 깨끗했다. 네모나라에서 네모는 가장 정직하고 정확하며 아름다운 모양이었으므로, 사람들도 저마다 네모를 닮아 네모스럽게 살려고 힘썼다.
나라 안에 가득한 네모들 사이로 어디 한군데 구부러짐 없이 반듯반듯한 길들이 지나 다녔다. 어느 길을 가도 직선거리였으므로, 사람들은 또 다른 직선을 만나 휙 바람이 일도록 몸을 꺾을 때까지 그저 똑바로 앞만 보고 걸어가면 되는 것이었다. 그 길들을 걸어 다니는 동안 사람들은 빤히 눈앞에 보이는 목적지를 향해 저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졌고, 점점 더 많은 길을, 똑바른 길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무를 뽑고, 언덕과 산을 깎아, 자꾸만 길을 만들어 나갔다.
그런데 단 한 가지 예외가 있었다. 그 나라의 서쪽 끝 어느 마을 입구에 서 있는 고집 센 나무가 그 원인이었다. 그 나무는 아무리 잘라내어도 소용이 없었다. 다음 날이면 새로 가지가 돋아 푸른 잎을 피우며 전보다 한층 더 왕성하게 자라났다. 마을 사람들 전부가 달려들어서 뿌리째 뽑아 버려도 마찬가지였다. 뿌리를 뽑아낸 구덩이에 시멘트를 부어 넣고 아스팔트를 발라도 며칠 뒤면 검은 가지가 길바닥을 가르고 시멘트가루를 털며 구불구불 길 위로 춤을 추듯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나무를 길 한가운데 남긴 채로 폭을 넓혀 길을 냈지만, 나무는 금세 자라나 다시 길을 가로막는 것이었다. 나무 때문에 길이 막힐 때마다 길을 넓혔지만, 나무는 어느 새 자라나 사람들이 겨우 가장자리에 발뒤꿈치를 들고 지나갈 만큼만 남기고는 그 길을 다 막아 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길에서만은 사람들의 발길이 나무를 돌아가느라고 직선이 아닌 곡선을 그리며 이어졌다. 똑바로 걸을 줄만 아는 네모나라 사람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고역이었지만, 나라 안의 누구도 그 나무만은 어쩔 수가 없었기에 그 길은 좀체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길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사람들은 더러는 피리 부는 사람이 그 길을 걸어서 왔다고 하고, 더러는 천둥번개가 치고 땅이 흔들리던 날 네모나라의 어느 네모난 방에서 태어났다고도 했다. 그날 집들이 몸을 뒤트느라 그 방이 네모가 아니었던 순간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의 출생에 대한 짐작은 참 많기도 해서, 심지어는 길 아래 묻힌 그 고집 센 나무가 길을 뚫고 가지를 들어올릴 때 가지를 타고 솟아올랐다가 꽃이 질 때 마을에 떨어졌다고도 했다.
짐작이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이 그 나라에는 피리를 만들 만한 재료도, 그 사람에게 피리 부는 법을 가르쳐 줄 만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나무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모두 완벽한 네모로 깎여 있었고, 가지가 손톱만큼도 자라기 전에 다시 네모로 깎아 버리곤 했으므로 피리를 만들 수가 없었고, 서둘러 앞만 보고 직선으로 걸어다닐 줄밖에 모르는 사람들은 아무도 피리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가 언제부터 어떤 연유로 피리를 불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사람은 늘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홀로 피리를 불었으므로 오랫동안 그 사람이나 그의 피리를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어쩌다 그의 피리 소리가 고집 센 나무의 구부러진 길을 지나는 사람들 귀에 바람처럼 스쳐갈 뿐이었다. 사람들은 발뒤꿈치를 들고 길을 가로막고 선 나무를 한 팔로 또는 양팔로 껴안듯이 끼고 돌다가 나뭇잎 사이를 지나는 가느다란 피리소리를 듣곤 했다. 그때마다 피리를 모르는 네모나라 사람들은 그것이 석양에 금관을 쓴 나무가 간지럼을 타는 소리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그의 피리소리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금가루를 뿌리듯 나뭇잎 사이로 찬란하게 부서져 내리곤 했기 때문이었다.

네모나라 사람들은 이제까지 '고집 센 길'이라고 부르던 그 길을 '금모래 길'이라고 고쳐 부르게 된 뒤로도 다시 짧지 않은 세월이 지나서야 피리를 부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제는 줄기에 매미처럼 찰싹 달라붙지 않고는 길을 지날 수 없을 만큼 커져 버린 고집 센 나무를 지나다가, 울퉁불퉁한 뿌리 위에 앉아 피리를 불고 있는 그를 보았을 때, 사람들이 눈을 반짝이며 신기해 마지 않았던 것은 물론 자신들과 별로 다를 것 없이 생긴 그 사람이 아니라 그의 손에 들려 있는 피리라는 길쭉한 막대기였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피리에 뚫린 둥근 구멍들이었다.
네모가 아니라 둥글다니. 그들은 처음 보는 그 모양이 신기해서 살금살금 다가가 주저하며 손가락을 대 보았다. 아, 그 손가락 끝에 닿는 간지러운 떨림이라니. 그 떨림을 타고 흘러나오는 바람소리라니. 그것은 마치 요술항아리에서 흘러나오는 금물결에 몸을 휘감기는 것같이 황홀한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차례로 손가락을 구멍에 대 보고, 따뜻한 떨림이 남은 제 손가락과 피리의 둥근 구멍을 몇 번씩이나 번갈아 살펴보곤 했다. 어찌 시작도 끝도, 모서리조차도 없는 이런 모양이 있을 수 있으며, 어찌 온 천지를 쏘다니는 바람을 잠시나마 이 작은 대롱 속에 넣을 수 있으며, 또 어떻게 이렇게 고운 목소리로 노래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야말로 네모나라 사람들의 눈이 모두 동그래질 일이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금모래 길'을 '둥근 바람 길'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저마다 알게 모르게 피리 부는 사람을 찾게 되었다. 일부러 곧은길을 버리고 '둥근 바람 길'로 돌아가기도 했고, 더러는 별 이유도 없이 멀리서부터 그 길을 찾아와 서성거리며 피리소리를 듣고 가기도 했다.
그러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네모나라 사람들이 피리 부는 사람을 자신들의 집으로 초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가족들의 생일이며 결혼식, 또 장례식을 위해서도 그를 불러 피리를 불어달라고 청했다. 그 외에도 기쁠 때, 슬플 때나 이유 없이 마음이 울적하거나 고적하여질 때, 사람들은 피리소리를 듣고 싶어했다. 그것은 마치 멀고 먼 곳, 아득한 시간으로부터 흘러와 가슴을 어루만져 주고 사라지는 부드러운 바람의 손길과도 같았다.
그래서 피리 부는 사람은 오랫동안 떠나지 않던 고집 센 나무를 떠나 네모난 집들을 찾아다니게 되었다. 네모난 집 속 네모난 방에 들어가 그를 초대한 집주인이 기쁠 때는 기쁜 곡조를, 집주인이 슬플 때는 슬픈 곡조를 불어 주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춤추고 노래하거나, 눈물을 흘렸고, 그때마다 불려온 사진사가 네모난 렌즈가 달린 사진기로 찰칵찰칵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이제 그를 불러 피리소리를 듣는 것이 네모나라의 네모만큼이나 당연한 일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사진에서 이상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분명히 자신들과 함께 웃으며 사진을 찍었던 피리 부는 사람의 얼굴이 사진 속에서는 한없이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고개만 갸우뚱거리던 사람들이 그런 일이 자꾸만 되풀이되자 마침내 참지를 못하고 사진사에게 몰려갔는데, 그때 사진사가 그들에게 보여준 사진은 더욱 기가 막힌 것이었다. 일주일 전 어느 결혼식에서 찍은 사진에는 피리 부는 사람의 얼굴이 반쪽만 찍혀 있었고, 바로 며칠 전 네모나라 늙은 지도자의 네모기념식에서 찍은 사진에는 얼굴이 전혀 찍혀 있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놀라서 사진을 보고 또 보고 사진 귀퉁이가 너덜너덜해지도록 돌려가며 다시 살펴보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사진 속에는 얼굴도 없는 몸이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피리를 불고 있을 뿐이었다.
그 얘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얼굴 없는 사진이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면서, 네모마을 사람들은 피리 부는 사람을 무서워하고 피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그가 귀신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또 그가 자신들을 싫어하고 저주한다고 까지 생각하였다. 기쁜 날에 웃지 않다니, 슬픈 자리에서 울지 않다니, 얼굴조차도 보이지 않다니...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사실 그의 피리소리가 그리 신통한 것도 아니었다고 수군거리게 되었다. 언제부턴가 그의 피리소리는 멀리서부터 흘러와 가슴을 어루만져 주는 바람소리가 아니라 땀을 뻘뻘 흘리며 할딱거리는 그 사람의 숨소리일 뿐이었다고 했다. 가까스로 구멍을 비집고 나온 피리소리는 뾰죽뾰죽 모가 나서 찌를 듯 서로의 몸에 덤벼들어 부딪치고 더러는 네모난 집의 벽에 함부로 부딪쳤다가는 떨어져서 굴러다니더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사람들은 생각했다. 네모가 아니라 둥글다니. 그들은 시작도 끝도 없이 멍청하고 우스꽝스러운 그 모양에 넋을 잃었던 자신들의 어리석음에 기가 막혀 다시 넋이 빠질 지경이었다. 사람들은 한때 피리소리를 듣고 싶어 안달했던 자신들의 행동이 부끄러워서 더 이상 피리 부는 사람의 얘기는 꺼내지도 않게 되었다.

아무도 그를 찾지 않았으므로 피리 부는 사람의 얘기는 차츰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갔다. 네모나라 사람들은 여전히 네모난 집에서 살며 똑바른 길을 걸어 다녔다. 이제는 피리나 '둥근 바람 길'을 기억하는 사람조차도 없는 것 같았다. 어쩌다 바람이 어긋난 문틈을 지날 때나 달빛에 젖은 나무들이 몸을 흔들 때, 사람들은 무언가 먼 곳에서 달려온 그리운 소리를 들은 듯도 했지만 곧 고개를 저어 생각을 떨쳐 버리거나 그런 어리석은 생각이 집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네모난 덧문을 꽁꽁 닫아 버리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시작을 알 수 없는 생각은 쇠로 만든 두꺼운 덧문으로도 막을 수 없는 것이어서 사람들은 곧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들은 어느 새 자신들의 가슴속을 흘러 다니는 소리를 서로에게 감추느라고 곳곳에 직선으로 뻗은 길들을 정신없이 걸어 다녔다. 걷다가 눈이 마주치면 더욱 바쁜 듯이 서둘러서 뛰듯이 걸어가는 것이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걸어다니게 되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더 많은 길을 만들게 되었다.
마침내 나라 전체가 총알같이 빠르게 쏘다니는 사람들과 똑바른 길들로 가득 차게 되자 사람들은 고집 센 나무가 있는 서쪽만 빼고 남으로 북으로 동으로 나라를 넓혀가기 시작했다. 나무를 자르고, 돌을 옮기고, 산이 있으면 온 나라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매달려서 산을 깎고, 물이 있으면 깎은 산으로 메워서 한치의 휘어짐도 없는 곧은길을 만들어 냈다. 사람들은 숲에서 산에서 또는 물에서 살던 짐승들을 위해서도 네모난 우리를 지어주었다. 계획에도 없었던 그 일은 다른 무엇보다도 빠르게 이루어졌는데, 길 때문에 잠자리를 잃어버린 짐승들이 함부로 쏘다니며 우는 소리를 네모나라 사람들이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속에서 살게 된 짐승들은 신기하게도 더 이상 울음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저 네모난 먹이통에 얼굴을 박고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었다.

그 일은 온종일 길을 만드느라 지쳐 떨어진 네모나라 사람들이 깊이 잠든 어느 날 밤에 일어났다. 그날 밤 사람들은 네모 위에 네모들을 층층이 쌓아 올리는 꿈을 꾸다가 네모의 한 귀퉁이가 들썩거리는 바람에 깜짝 놀라 깨어났다. 네모를 들치고 솟아 오른 어떤 기운이 그들의 가슴에서 구불구불 몸을 뒤틀고 있었다.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잽싸게 두 손으로 가슴을 눌렀지만, 그만 멀리서 깜깜한 밤을 울리는 짐승 소리를 듣고야 말았다.
더 이상 울음소리를 들을 수가 없어서 이름조차도 잊어 버렸던 새들이며, 먹이통에 가려져 얼굴도 볼 수 없던 짐승들이 잠든 세상을 덮고 있던 깜깜한 하늘을 흔들며 울음소리를 뽑아 올리고 있었다. 잠이 깬 네모나라 사람들은 잠시 후, 그 울음소리에 섞인 이상한 소리 때문에 그나마 베갯머리에서 뭉그적거리던 남은 잠까지 마저 놓쳐 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소리였다. 바람소리 같기도 하고 빗소리 같기도 하고, 아득히 먼 곳에서 나는 소리 같은가 하면 바로 귓가에서, 아니, 듣고 있는 사람들 각자의 귓속에서 들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짐승의 소린가 하면 사람의 소리였고, 울음소린가 하면 노랫소리 같기도 했다. 더욱이 이상한 것은 귀를 기울이면 기울일 수록 자라나는 그 소리의 다발 속에는 듣는 사람들 자신의 숨소리만큼이나 익숙한 소리가 섞여 있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옆에서 자고 있던 가족들의 뒤척임을 들었고, 네모난 요람 속에 잠들었던 갓난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들었으며, 네모난 창틀 속에서 서성이는 이웃의 그림자를 보았다.
마침내 소리를 찾아 하나 둘 집을 나선 그들이 어둠 속을 걷게 되었을 때 그들은 서로의 가슴에서까지도 메아리 마냥 솟아오르는 그 소리의 한 갈래를 들었다. 한편으론 저마다 제 가슴속의 소리를 감추려고, 다른 한편으론 그들을 잠에서 깨운 그 소리에 한 발짝이라도 빨리 닿고 싶은 설레임을 견디지 못해서, 사람들은 소리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그 소리는 또 검푸른 하늘을 훑으며 퍼져 나갔다.

사람들이 소리를 찾아 네모나라의 서쪽 끝에 도착했을 때, 네모 반듯하던 울타리는 부서지고 짐승들은 우리 밖에 흩어져 저마다 하늘을 향해 목을 뽑으며 울고 있었다. 공중에는 오랫동안 갇혀 있어 날 줄 모르는 줄만 알았던 새들이 날개를 파닥이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그 바람에 부서진 별빛이 금가루 은가루를 날리며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빛의 한복판에서 사람들은 기지개를 켜듯 몸을 트는 커다란 나무를 보았다. '고집 센 나무'였다. 그리고 그 나무 속에 그 사람이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마을에 얼굴을 보이지 않아 사람들에게서 잊혀졌던 그 사람이 늙은이 팔같이 휘어진 나뭇가지에 안기듯 걸터앉아 피리를 불고 있었다.
둥글게 둥글게, 피리 소리는 모여선 사람들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퍼져 나갔다. 아주 멀고 먼 곳으로부터 날아와 그들의 팔이 닿지 않는 가슴 속 깊은 곳을 어루만져 주는 그 소리. 사람들은 저마다, 제 안에 무겁게 닫혀 있던 네모난 뚜껑이 열리고 그 속에서 잠자던 무엇이 기지개를 켜며 깨어나는 것을, 깨어난 기쁨과 오랜 잠 속에 고여 있던 슬픔으로 저도 모르게 하늘을 향해 분수처럼 소리를 뿜어 올리는 것을 느꼈다. 그 소리는 그들이 태어날 때부터,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전부터 그들 속에 담겨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 온몸의 세포를 열며 솟아올랐다. 그들의 소리는 둥글게 퍼지는 피리소리와 어울려 공중에 뒹굴었고, 기쁨과 슬픔으로 달아오른 그들의 몸은 새와 짐승들과 함께 들판에 뒹굴었다. 색색의 울음과 노랫소리가 터질 듯 세상을 가득 채우고 세상의 모서리들을 무너뜨리며 더 멀리 더 멀리 퍼져나갔다.

마침내 별들이 사라지고 깊은 물 속 마냥 짙푸르던 새벽하늘까지도 창백히 빛깔을 잃어 갈 때에야 사람들은 자신들의 가슴을 뚫고 솟아오르던 소리의 거센 물줄기를 잠재울 수 있었다.
그리고는 흐트러진 자신들의 모습을 알아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언제나 반듯한 가르마로 빗겨져 있던 머리카락들은 풀더미 같이 헝클어져 있었고, 구겨진 옷자락에는 여기저기 흙이며 풀, 새의 깃털 따위가 묻어 있었다. 게다가 자신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가. 주위를 둘러보는 그들에게 고집 센 나무가 보였고, 그 둘레에는 겹겹이 파문처럼 퍼져 가는 둥근 길이 보였다. 우리가 저 둥근 길을, 끝도 시작도 없이 돌고 도는 저 이상한 모양의 길을 따라 이곳에 왔단 말인가? 언제 저렇게 많은 둥근 길들이 저 고집 센 나무를 향해 생겨났단 말인가? 그들은 모두 분명 지난 밤 네모나라의 곧은길들을 달려왔다고 생각했지만, 주위 어디에도 곧은길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보이는 것이라곤 들판에 함부로 나뒹굴다가 잠이든 짐승들 뿐 이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밤새 짐승들과 함께 울부짖으며 새벽을 맞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수치심으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졌다.
그들은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사람들은 서로의 눈길을 피해가며 부서진 울타리를 고치고 잠든 짐승들을 깨워 우리 속에 몰아 넣은 뒤 전보다 한층 더 단단한 자물쇠를 채웠다. 돌과 흙을 져다가 둥근 길을 덮고 다시 자로 그은 듯이 곧은길을 만들어 냈다.
그 길을 걸어 그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 자리를 떠나기 전에 그들은 다시 한 번 나무 속에 홀로 앉아 있는 피리 부는 사람을 보았다. 그는 피리를 가슴에 품어 안은 채로 한없이 슬픈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 저 부끄러운 둥근 눈물, 이상한 소리를 내는 둥근 구멍, 시작도 끝도 없이 엉켜 있던 둥근 길들이라니. 사람들은 그를 놓아둔 채 얼른 눈길을 거두고 돌아서 앞을 다퉈 마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젠 짐승들도 울지 않았고, 피리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엷은 바람이 한 줄기 앞을 가로막듯 스치고 지나갔고, 그래서 잠시 고개를 돌려 피리 부는 사람의 떠나가는 뒷모습을 보게 했을 뿐이었다.

그 후론 아무도 피리 부는 사람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가 머물던 고집 센 나무는 벌써 여러 해 꽃도 열매도 없이 홀로 하늘을 떠받치며 서 있기만 할 뿐 이었고, 네모나라에서 피리소리를 아는 사람들도 차츰 사라져 갔다. 그가 남긴 자취라고는, 그 외에는 아무도 가보지 못한 세상을 향해 고집 센 나무로부터 그의 걸음을 따라, 나무의 뿌리를 따라 구불구불 돋아난 길과, 그가 떠나던 새벽에 사진사가 찍은 사진 한 장 뿐 이었다. 그것은 그가 떠나던 날 새로 만든 곧은길에서 찍은 기념사진이었는데, 신기하게도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고개를 내민 그 사람의 얼굴이 함께 찍혀 있었다. 배경이 된 들판과 하늘만큼이나 평온한 얼굴이었다.
네모마을도 그가 떠난 뒤 본래의 평온을 되찾았다. 사람들은 전처럼 네모난 집에서 살고 똑바른 길들을 서둘러 걸어다니며 더 많은 길과 네모난 집들을 만들어 냈다. 우리 속의 짐승들도 온순히 머리를 네모난 먹이통에 넣고 지냈다. 언젠가 한두 번, 웬 젊은이들이 고집 센 나무 주위에 모여들어 어린 시절 요람에서 들었다는 이상한 소리를 흉내내려했다는 얘기가 들리기도 했지만, 소문은 오래 가지 못했다. 아직까지 네모나라의 서쪽 끝을 지키고 선 고집 센 나무도 그런 떠도는 소문들과 함께 사람들 기억의 깊은 바닥으로 사라져 갔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몸 속에 그곳을 향해 물처럼 구불구불 흘러가는 길이 핏줄로 자라는 것도 모르는 채 네모의 모서리 속에서 더욱 튼튼한 네모를 만들며 살아갔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1 차력사 김혜령 2007.08.05 1580
70 바커스병과 우거짓국과 초록별 김혜령 2005.07.26 1299
69 개미들 김혜령 2006.04.05 1146
68 새들이 운다 김혜령 2008.05.15 1126
67 롱슛 김혜령 2008.08.27 1119
66 둥지 속의 고요 김혜령 2004.01.07 1070
65 나무 안의 길 김혜령 2008.03.19 1042
64 오작교 건너가 만나리 김혜령 2009.02.11 1041
63 귀에 대한 소고 -부처님 귀 김혜령 2003.01.03 1018
62 은어사전-8 김혜령 2006.10.11 1015
61 겨울 화단에서 김혜령 2006.12.06 1010
60 빗소리 김혜령 2008.12.07 995
59 지금 나는 김혜령 2009.05.30 991
58 은어사전-7 김혜령 2006.10.11 955
57 신발 한 짝에 대한 명상 김혜령 2003.01.29 937
56 숲으로 가득하리라 김혜령 2010.03.07 921
55 은어사전-4 김혜령 2006.10.11 919
54 은어사전-6 김혜령 2006.10.11 896
» 네모나라의 요술피리 김혜령 2003.02.05 891
52 바람 김혜령 2006.12.04 874

회원:
1
새 글:
0
등록일:
2015.06.19

오늘:
0
어제:
0
전체:
22,5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