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지 속의 고요

2004.01.07 16:44

김혜령 조회 수:1070 추천:98

나는 얼마 전 유씨 집안에 찾아든 어린 생명이다. 까마득한 세월을 기다려 마침내 어머니의 자궁에 들었으나 아직은 몸이 온전히 지어지지 않았으므로 세상을 육체의 감각으로 느낄 수는 없고, 다만 영혼의 눈으로 보고, 영혼의 귀로 듣고, 영혼의 입으로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내 몸이 조금씩 자라면서 이젠 그런 대로 어머니의 몸 안에서 눈을 뜨는 일에 익숙해져 가지만, 아직도 잠결에 어머니 꿈속에 들어갔다가 어리둥절해질 때가 있다. 세상 속에 어머니가 있고 어머니 속에 꿈도 있고 나도 있는 것이지만, 어머니의 꿈속에 들어가면 어머니 속에 세상이 있고 다시 그 세상 속에 나도 어머니도 있는 것만 같으니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어머니는 여러 날 같은 꿈을 꾼다.
꿈의 문을 열면 황톳빛 지평선이 가물가물 하늘을 어루만지는 벌판이 펼쳐진다. 아무도 없는 벌판을 어머니가 빨려 들어가듯 걸어가면 가지마다 새빨간 꽃을 피워 달은 나무가 한 그루 아지랑이를 헤치고 눈앞에 나선다.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서면 그 어느 발자국에선가 꽃들은 저마다 둥지로 변한다.
어머니는 달리고 날아서 둥지들을 살핀다. 둥지마다 둥그런 알이 하나씩 들어서 햇빛을 받으며 떨고 있다. 어머니는 점점 더 바쁘게 둥지 사이를 날아다닌다. 어머니는 자신도 모르는 무엇인가를 애타게 찾고 있는 것이다. 어느 새 알들은 제각기 다른 얼굴로 변한다. 증조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 때로는 새하얀 얼굴의 표정 없는 아이가 보이기도 한다. 물론 알들 중에는 나도 있지만, 아직 얼굴이 없는 나를 어머니는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니까 어머니의 세상 속에 나는 아직 없다고 해야 할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증조할머니의 얼굴이 입을 벙긋벙긋 들리지 않는 말을 하면 어머니는 고개를 흔들며 눈물을 흘리고 다시 날아오르려고, 날아서 멀리멀리 가버리려고 안간힘을 쓴다. 나는 아무런 말도 들을 수가 없는데, 증조할머니가 뭐라고 하셨기에 그러나? 어머니는 좋은 말인지 나쁜 말인지 알려고도 않고 울기만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몸부림을 치면 칠 수록 몸이 무거워져서 날지 못하고, 나뭇가지에 얼어붙은 두 발만 동동 구르다가 잠이 깨곤 하는 것이다.
한밤중에 잠이 깨면 어머니는 증조할머니 방으로 달려가 침대 위의 어둠을 더듬어 본다. 거기엔 언제나 끈적한 어둠이 멍울져 있어 어머니의 손길은 오래도록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커튼을 걷어올리고 깜깜한 창에 턱을 괴고 앉았다가, 화단의 자동물뿌리개가 물을 뿜어 올리는 새벽이 되어서야 졸음으로 무거워진 머리를 할머니 베개에 얹고 잠이 든다.
내일은 꼭 어머니를 불러 봐야지. 나는 어머니를 따라 다시 잠의 세계로 나서며 생각한다.

삐이 삐.
아침햇살이 붉게 물든 벽을 타고 주전자의 휘파람 소리가 들려온다. 옆집 릴리 아줌마가 찻물을 끓이는가 보다. 비교적 두꺼운 연립주택의 벽은 다른 모든 소음을 안에 가두지만 저 높고 가는 휘파람 소리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다. 소리는 풀잎처럼 작고 가는 혀가 되어 어머니의 뺨을 간질인다. 반쯤 잠이 깬 어머니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팔락인다.
콩코공 콩콩.
잠시 후 리드미컬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 차 쟁반을 들고 문밖에 섰던 릴리 아줌마가 활짝 웃는다.
굿모닝, 경화!
릴리 아줌마는 성큼 집안으로 들어서서 테이블 위에 쟁반을 내려놓는다. 쟁반 위엔 토스트와 계란 프라이, 커피와 녹차가 놓여 있다.
오, 릴리, 릴리.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어머니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젓는 모습을 아줌마는 장난스럽게 눈을 굴리며 바라본다.
오, 경화, 경화. 이러고 싶어요.
아줌마는 어머니의 말투를 흉내내고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 눈을 내리깔고 접시들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빠르게 덧붙인다.
혼자 먹기가 싫어서 그러는 건데 뭘.
나는 인도에서 왔다는 릴리 아줌마가 또글또글 구슬 굴리는 듯한 엑센트로 말하는 것이나 어머니가 릴리 릴리 혀를 차는 소리를 듣는 것이 재미있다.
오늘도 또 묘지에 가요, 경화?
고개를 끄덕이는 어머니의 목덜미를 아줌마의 시선이 안쓰러운 듯 쓰다듬는다.
그래, 쉽지는 않은 일이야. 치유되는 시간이 한없이 긴 것 같지만 살아보면 그것도 잠깐이야. 나는 꼬박 삼 년이 걸렸어요. 얘기했지요? 우리 아들애.
토스트를 한입 입에 문 채로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 바람에 어머니와 릴리 아줌마 사이를 흐르던 아침햇빛이 나직이 일렁이고, 나는 아주 편안하고 좋은 기분이 되어서 이 부드럽고 따뜻한 흐름에 언제까지고 나를 맡겨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 애, 패트릭이 가곤 난 뒤에도 난 수 없이 그 애 목소릴 들었어요. 미칠 것 같더라니까. 사실, 지금도 가끔 듣지만. 이젠 그저 오랜 친구 같아. 중얼중얼 의논상대도 되고. 어떤 땐 넌 에미 일에 참견 말고 좀 조용히 있어라, 하고 면박도 주고 말야.
아줌마는 끙 소리와 함께 힘차게 의자에서 일어서면서 어머니의 어깨를 가볍게 흔든다.
참, 그 남자 괜찮아 보이던데?
활기찬 몸짓으로 쟁반을 챙기던 아줌마가 붉어진 어머니의 뺨을 흘끔 쳐다본다.

어머니는 오늘도 화단의 꽃을 잘라들고 묘지로 간다. 겨우겨우 돋아난 꽃들을 하루가 멀다 하고 잘라서 이제 어머니의 한 평 남짓 좁은 화단에는 잘라진 꽃들의 밑동만 남아 하늘과 땅을 잇고 있다. 동강난 꽃줄기들의 대롱 속으로 휘이휘 바람이 드나든다.
묘지엔 정갈한 햇살의 그물이 펼쳐져 바람이 불거나 새들이 날아오를 때마다 금빛으로 파닥인다. 그물을 빠져 다른 세계로 가버린 혼들의 흔적이 크고 작은 묘비로 서서, 남겨진 세계의 시간을 그림자로 어루만진다.
증조할머니를 묻은 다음 날 이곳에서 어머니와 나는 아버지를 만났다. 나의 잉태 이후 아버지를 만나기는 그것이 처음이었다. 어머니가 묘비에 새겨진 글자들을 더듬고 있을 때 아버지는 무덤들 사이의 그늘을 성큼성큼 넘어서 어머니에게로 왔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차가운 손과 외로운 얼굴, 그리고 파닥이는 가슴을 품에 안고 잠시 조용한 물결이 되어 주었다.
어머니는 나란히 놓인 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의 묘에 꽃다발을 하나씩 놓아두고는 묘석에 등을 기대고 앉는다. 나뭇가지 사이로 하늘이 흘러간다. 어느 새 어머니의 시선은 둥지 사이를 날던 새가 되어 묘비들 사이를 헤맨다. 어머니 얼굴 위에서 그늘이 나부낄 때마다 나도 주먹을 꼭 쥐고 시선을 늘인다. 묘지에 가득한 적막을 가르며 아버지의 얼굴이 희끗 나설 것만 같다. 어머니는 해가 저물도록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어머니가 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를 보러 묘지에 오는 건지, 오지 않는 아버지를 만나러 오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아마 그 모두를 만나러 오는 것일 게다.
새들은 끊임없이 날아오르고 내리며 묘지 위에 펼쳐진 햇살의 그물을 흔든다. 마침내 차가워진 묘석에서 등을 떼기까지 나는 어머니가 자꾸만 성글어 가는 그물을 빠져 다른 세상으로 가버릴까 봐 조마조마하다.

어머니가 다시 병원으로 출근하면서부터는 그런 걱정을 덜 하게 되었다. 병원은 소음으로 가득 차 있다. 의사들과 환자며 환자의 보호자를 찾는 방송이 수시로 쩌렁쩌렁 천장과 벽들을 울리고, 방송이 들리지 않을 때도 어디선가 벌집처럼 붕붕 울리는 떨림이 가라앉지 않는다. 육체를 들고 나는 생명들의 비명과 탄식, 상한 육체에 매달린 신음소리들은 한시도 멈추지 않고 건물 안을 떠돈다. 그 소음은 서로 엉겨서 몸을 비비적거리다가 때론 지쳐서 무겁게 가라앉으며 또 다른 소음의 무리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그때마다 무거운 막 같은 것이 한 겹씩 내려앉는다. 묘지에서처럼 쉬이 빠져나갈 구멍 따위는 없어 보인다. 오히려 사람들은 소음의 밑바닥으로 가라앉지 않으려고 종종걸음을 친다. 어머니도 그랬다.
어머니는 온종일 약병들이 촘촘히 쌓인 선반 사이를 오가며 약을 꺼내고 무게를 재고 수치와 이름을 기록한다. 어머니가 기록하는 그 수치와 이름들 사이에 무시로 어른거리는 아버지의 이름이나, 손바닥에 흩어진 알약들 사이에 돋아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것은 어머니와 나 뿐이다. 가끔 아버지를 찾는 방송이 들릴 때마다 어머니가 흠칫 놀라고 더러는 약 선반 사이를 정신없이 서성이는 걸 아는 것도 역시 어머니와 나 뿐이다.
그러다가 멈춰 설 때 어머니의 시선은 창 밖 벌거벗은 나뭇가지에 걸려 있다. 그 위에 겨울 해가 타고 있고, 나무 속에 자리를 찾지 못한 새들이 약병에서 쏟아진 알약처럼 공중에 흩어진다. 새들이 남기고 떠난 나뭇가지를 보며 어머니의 가슴이 흔들리는 것을 나는 오래도록 혼자 바라보아야만 한다.

안색이 좋지 않아요. 이걸 좀 마셔봐요.
어머니가 쉬는 시간에 아버지가 찾아와서 멍하니 앉아 있는 어머니를 살핀다. 임신부에게 커피라니. 다행히 어머니는 아버지가 내민 커피를 시늉만 하고 마시지는 않는다. 하얀 가운에 푸른 줄의 청진기를 목에 걸고 있는 아버지. 어머니의 눈길을 피하면서 어머니의 얼굴이며 목덜미, 컵을 든 손가락, 머리칼이며 그 위에 번지는 햇빛까지도 찬찬히 살피지만, 아버지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모양이다. 어머니의 손톱, 발톱, 머리카락 끝까지 퍼져 있는 떨림을, 그 갈망과 두려움을 정말 보지 못하는 모양이다. 목에 대롱거리는 청진기를 들어 어머니 가슴에 대어보면 어머니와 나, 우리를 들을 수 있을지. 아무 것도 모르는 채 뒤돌아서 걸어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어머니는 오래도록 바라본다.

어머니는 그날 밤 꿈속에서 아버지의 얼굴이 담긴 둥지에 내려 날개를 접었고, 나는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안도감과 함께 아쉬움이 나를 채웠다. 나뭇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렸던 둥지들이 그 속에 선택받지 못한 알들을 담은 채 내가 내쉰 한숨의 물결을 따라 떠내려갔다. 나는 세상이 왜 이리 푸를까, 생각했다. 내 한숨이 저리도 푸르렀던 것일까. 하얗게 빛나던 알들 위로 푸른 물결이 한 겹 두 겹 쌓여가고, 마침내 검푸른 어둠으로 지워져 갈 때 나는 문득 깨달았다. 선택받지 못한 그 모두가 아버지 얼굴 밑에 숨어 선택받은 나와 한 가지였다는 것을. 그리고 어둠의 저편으로 사라진 그들을 오래오래, 그들을 기억할 수 없을 때까지도 그리워하게 되리라는 것을.
그러나 그날 밤 둥지 속에 담겼던 아버지의 얼굴은 또다시 할머니 얼굴이 되었고 어머니는 울면서 깨어났다.

아직도 안색이 나쁘네. 정말 괜찮은 거예요?
의사라는 나의 아버지는 언제까지 이렇게 멍청한 질문만 하고 있을 건지, 나는 답답해서 다시 한숨을 쉴 수밖에 없다. 그가 환자들에게도 그러지 않을까, 걱정스러워 따라다녀 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좀 더 집에서 쉬지 그랬어요?
이럴 때 아버지는 좀 바보 같다. 어머니가 아침마다 누구의 생각을 지팡이 삼아 자꾸만 가라앉는 몸을 일으키는지, 왜 일으키는지, 전혀 생각이 미치지 않는가 보다. 하긴 어머니의 꿈을 볼 수 없으니 할 수 없는 일인지 모른다.
저어, 그날 말이에요.
어머니가 어렵게 입을 연다. 그래요, 그날. 나는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빛을 보고 신이 나서 어머니를 응원한다. 말해버려요, 어머니.
아, 아, 말 안 해도 알아요.
아버지는 얼굴을 붉히며 손을 저어 말을 막는다. 그 바람에 커피가 조금 엎질러지고, 아버지는 목덜미까지 붉어져서 바지 위에 엎어진 커피자국을 문지르며 황급히 더듬는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내가, 내가 생각이 모자랐지요. 그, 그냥, ...... 그냥, 좋은 치, 친구면 되지요, 뭐...... 그럴, 수...... ? ......
어머니는 입 속 가득 고인 말들을 삼킨다. 어머니의 목울대를 되돌아온 말들이 내 주위에 곤두박질친다. 자음과 모음이 부서지고, 나는 어느 새 별빛 찬란한 어둠 속에 있다.

어머니가 말하려던, 그날, 그 밤이 거기, 바람 부는 벼랑 위에 걸려 있다. 그래, 그 밤까지도 나는 나무와 나무 사이, 별과 별 사이를 날아다니는, 아니, 그들 모두에 흩어져 세상을 가득 채우는 혼이었다.
그 밤, 어둠의 한 귀퉁이가 열리고 한 쌍의 빛이 보였다. 나는 또 새로운 별들이 탄생했는가 싶어 곧 그리로 날아가 볼 참이었다.
빛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곧이어 나는 그것이 쌍동이 별이 아니라 전광등을 켠 자동차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 속에 한 여자와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남자는 곤히 잠이 든 듯 싶고, 운전대를 잡은 여자는 뚫어져라 앞을 보고 있었지만 그녀가 전혀 앞을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금세 알 수 있었다. 앞을 보기에는 그 눈에 흥건히 고인 눈물이 너무도 깊어 보였던 것이다. 그 눈물이 넘쳐나면 여자는 그 눈물을 타고, 그 눈물에 떠밀려서, 어디까지라도 흘러가 버리고 말 것만 같았다. 나는 불어나는 눈물의 깊이를 살피느라 여자가 벼랑에 다가서고 있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여자의 눈물이 둑을 넘어 쏟아지려는 순간, 굉음과 함께 섬광을 뿜어내는 충격이 있었다. 여자의 차는 벼랑 끝의 소나무를 들이받았고, 나는 어느 새 그녀의 눈물로 터질 듯한 눈두덩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적어도 옆에 잠들었던 남자가 깨어나 여자를 흔들어 깨울 때까지는 말이다.
그는 여자의 뺨과 이마와 입술을 더듬으며 말했다.
어디까지, 날 태우고, 어디까지 가려고 했어요?
그의 입술이 여자의 목덜미를 더듬을 때, 나는 여자의 눈물이 그녀를 지탱하던 둑을 무너뜨리고 두 뺨에 넘쳐흐르는 것을 보았다. 그 눈물은 내게까지도 닿아서 나는 그만 그 눈물에 젖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이제 나는 결코 저 눈물줄기를 벗어날 수 없으리라고. 그 눈물줄기를 거슬러 어디까지고, 그녀의 슬픔이 있는 그 어디까지고 가야 하리라고. 아마, 내가 혼으로 떠도는 오랜 세월동안 기다렸던 것이 있었다면 바로 이것이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버지는 잠시 더 어머니 옆에 엉거주춤 앉았다가는 말없이 가버린다. 어머니는 아버지 등에 머물렀던 시선을 한참 만에야 거두어 하늘을 본다. 빈 나뭇가지들이 은빛 하늘을 받치고 있다.
오늘은, 오늘은 꼭 어머니를 부르리라. 나는 또다시 다짐을 한다. 내가 아버지를 직접 불러 줄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저녁이 되자 나무들은 저마다 제 그림자를 깔고 누웠다. 밤은 그림자를 키워 고요한 어둠의 골짜기 속에 어머니의 방을 감싸 안았다. 어둠의 물결에 흔들리며 잠이 든 어머니는 곧 잠의 한복판에 돋아난 낯익은 문을 열고 벌판으로 나선다.
벌판엔 새빨간 꽃을 단 나무가 굵다란 가지들을 비틀며 서 있다. 어머니는 천천히 꽃을 향해 날개를 젓는다. 어머니가 날개를 저을 때마다 꽃들이 한 송이 한 송이 둥지로 변한다. 둥지 속의 알들이 제각기 어머니를 부른다. 어머니는 이 알 저 알을 조바심하며 살피고 다닌다.
어머니, 어머니.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어머니를 부른다. 어머니는 또다시 알속에서 아버지 얼굴을 보고 있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날개를 채 다 접기도 전에 아버지 얼굴의 뺨과 턱이 무너지면서 합쪽한 증조할머니 얼굴로 변해 버린다.
어머니, 어머니. 나는 내 혼신의 바닥으로부터 힘을 모아, 이 세상에 흩어진 나의 전부를 모아, 어머니를 부른다.
내 소리를 들었을까? 어머니는 벌떡 잠에서 깨어 일어난다.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이 온몸을 뒤흔든다. 나는 어머니 몸밖으로 쏟아지지 않으려고 어머니의 눈물줄기를 꼭 잡고 놓지 않는다. 어머니의 온몸이 눈물로 터질 듯한 눈두덩이 된다. 어둠 속으로 둥지가 떠온다. 눈물 맺힌 눈 속에서 알 하나가 떨고 있다.
삐이 삐이.
릴리 아줌마의 찻주전자가 휘파람을 분다. 아줌마도 잠을 못 주무시나 보다. 어머니의 가슴이 무섭게 두근거린다. 부서질 것 같은 가슴을 싸안고 어머니가 무너지듯 울음을 터뜨린다. 나는 어머니를 어루만져주고 싶지만, 자궁 속에 갇힌 내 몸은 어머니의 가슴에 손이 닿지 않고, 몸으로부터 자유로운 영혼은 손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릴리 아줌마를 불러보지만, 내 소리는 어머니의 울음을 넘지 못하고 어둠의 바닥을 기어다니는 어머니의 울음은 벽을 넘지 못한다.

어머니는 매일 달력을 살핀다. 그 밋밋한 날짜들 사이에 잃어버린 무엇이라도 숨어 있는 듯 열심이다. 아버지는 가끔 병원약국으로 찾아와서는 말없이 어머니를 바라보다가 간다. 아버지의 얼굴을 향해 달려가려는 두 손으로 달력의 날짜들을 부여잡고 어머니는 애써 고개를 들지 않는다.
나는 아직도 어머니의 울음을 타고 떠도는 얼굴 없는 알일 뿐이다. 나는 잉태되기까지, 기억도 할 수 없이 길고 긴 시간을 기다렸지만, 이 며칠 동안의 기다림처럼 견디기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았었다. 두 사람이 언제까지나 이렇게 서로를 살피고만 있으면 어떻게 하나? 나는 손가락을 입에 물고 생각에 잠겼다.

산모도 아이도 건강하군요. 팔 주밖에 안됐으니 어느 쪽으로 결정해도 안전해요.
나는 의사가 어머니의 두려움과 불안으로 가득한 얼굴을 살피며 했던 말을 되새겨 본다. 그 말은 벌써 며칠째 어머니의 마음속에서 수 없이 많은 메아리를 만들며 울리고 있다.
어느 쪽으로 결정하다니. 그 말은 분명 내겐 충격이었다. 아직도 결정할 무엇이 남아 있다는 것을, 더구나 그것이 어머니의 생각에 딸려 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까지 전혀 생각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아주 매력 없는 말도 아니었다. 내 영혼이 차츰 잃어 가는 자유를 다시 찾고 비좁은 육체를 떠나 훨훨 떠다닐 수 있다면...... 나는 어머니의 눈물줄기에 매달려 자궁 속을 맴돌고 있는 나의 몸뚱아리를 바라보았다. 만지면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연약하고 부질없는 살덩어리였다. 그것이 이 고통스런 기다림과 시시때때로 어머니의 몸과 마음을 뒤흔드는 혼란의 이유라니. 하지만 그것은 지난 몇 주 동안 어머니와 함께 꿈을 꾸고 함께 울며 함께 무엇인가를 기다릴 수 있었던 나의 집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처음으로 내게 쓰여진 '아이'라는 호칭의 실체였다. 나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세상을 떠도는 영혼만이 아니라, 어머니의 세상에 사는 '아이'인 것이다.

묘지에 찾아오는 갈매기들을 따라 언덕을 넘으면 소나무 숲을 지나 바다가 펼쳐진다. 물 이랑과 숨바꼭질을 하며 갈매기들은 끼룩끼룩 파도 속에 제 목소리를 심는다.
어머니는 모래 위에 펼쳐진 하늘을 보며 마음속에 편지를 쓴다.
닥터 강...... 어머니는 고개를 저어 곧 그 말을 지워 버린다. 아니, 강민규씨. 내 안에...... 내 안에 당신의 아이가...... 어머니는 또다시 고개를 젓는다. 그러다가 어머니의 고개는 금세 또 무엇인가를 향해 뻣뻣하게 자라나고. 나는 그렇게 갈등하는 어머니의 고개를 위해서 푹신한 베개가 되어주고 싶다.
내 안에 우리의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것...... 그것을 알리는 일에 나는 이렇게 주저합니다. 그것으로 당신을 가두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요. 어떤 이유로도, 어떤 말로도 당신을 가두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요. 당신이 스스로 찾아와 내 둥지에 들기를 기다리는 일.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해야 하는 일이 아니겠어요?
바다가 파랗게 몸을 세우고 달려와 젖은 모래에 가득 찍힌 새 발자국들을 지워버린다. 모래밭에 남은 흰 거품들이 따라가려고 모래를 쓸며 뒤척이다가 툭 툭 꺼져 버린다.
그런데, 그런데 내 안에 아이와 함께 부쩍부쩍 자라고 있는 물음표는 어떻게 하지요? 만약, 만약이라는 말이 내 안에 키우고 있는 물음표 말예요. 만약, 당신이 알았다면. 만약, 내가 당신에게 청한다면. 만약, 만약...... 내 안의 물음표가 갈고리가 되어 당신을 붙들고 당신의 가슴을 할퀴고 해칠까봐 나는 겁이 나서 당신에게는 입도 열지 못하지요. 그것은 이미 이렇게 뒤채며 내 가슴을 찌르고 있는데...... 답은 어디에 있나요? 혹시, 내 안에 아이가 자라듯 당신 속에 자라고 있나요?
비행기 한대가 구름 사이로 날아와 파란 하늘에 하얀 글씨를 쓴다.
C O N G R A T U L A T I O N S
N A N C Y
천천히 하늘에 그려진 글자들은 공중에 펼쳐놓은 그물 마냥 바람을 타고 가볍게 흔들린다. 낸시라는 여자에겐 무슨 좋은 일이 있는 것일까? 나는 문득 하늘로 날아올라 어머니에게 낸시라는 이름을 따다 주고 싶어진다. 그 뒤를 길다란 플래카드를 끌고 헬리콥터가 타, 타, 타, 타, 소리를 내며 따라간다. 무료상담, 신속한 이혼. 신속한 이혼? 아무리 흔하고 때론 절실한 일이겠지만 이렇게 평화로운 바닷가에는 어울리지 않는 광고라는 생각에 어머니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글자들을 살핀다. 다시 보니 그것은 '신속하고 헌신적인(devoted)'이었다. 그것이 왜 '신속한 이혼(divorce)'으로 보였을까? 어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편지를 지운다. 공중에 매달렸던 글자들도 구름 사이로 사라져간다.

어머니가 매일 쓰고 지우는 편지더미의 밑바닥, 어머니의 중심으로부터 돋아난 눈물줄기를 건드리면 반짝이는 눈물방울들이 쏟아진다. 그 눈물방울마다 낡고 구겨진 기억이 담겨있다. 어머니의 유년이 거기 있고, 어머니의 어머니, 어머니의 아버지, 증조할머니, 그리고 윤곽이 흐려 쉽게 연관되어지지 않는 얼굴도 두엇 들어 있다.
유년의 어머니가 노래를 부르며 혼자 놀고 있다. 곱게 땋아 푸른 리본으로 묶은 머리며 옥잠화가 수놓인 하얀 블라우스. 어머니의 눈동자는 푸른빛이 돌만큼 짙다. 아, 저 예쁜 아이와 함께 놀 수 있다면. 얘야, 얘야. 나는 힘껏 달음박질치는 아이를 불러본다. 내 소리를 들었는지 아이는 잠깐 움칫하더니, 돌아서서 장독대로 달려간다. 아이는 거기 비어있는 독에 숨바꼭질하는 꿩처럼 얼굴을 들이박고 노래를 부른다. 독 속에 갇힌 노래 소리는 점점 커지고 뒤엉키며 울음소리로 변해간다. 얘야, 얘야. 나는 다시 아이를 불러보지만, 아이가 고개를 들고 바라보는 것은 내가 아니라 어느 새 그 자리에 나타난 어머니의 어머니이다.
어머니의 어머니는 긴치마로 둥근 배를 덮고 있다. 나는 그 속에 들은 것이 언젠가 어머니의 꿈속에서 언뜻 보았던 핏기 없이 새하얀 얼굴의 아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본다. 아, 그리고 저 분. 묘비를 갖지 못한 어머니의 어머니. 아직도 어머니의 주위를 떠돌고 있는 뼛가루가 죽은 아이와 함께 화장되어 허공에 뿌려진 그분이라는 것 또한 어렵지 않게 알아진다.
아이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반색을 하며 제 어머니에게 다가서려는 순간, 어디서 나왔는지 증조할머니가 두 팔을 휘저으며 그 사이를 막아선다. 증조할머니는 찌를 듯이 사나운 얼굴로 둥근 배를 가리킨다. 그 보름달처럼 둥근 배속에는 아마 보면 눈이 멀어버리는 꿈이라도 들어 있었나 보다.
그 기억의 갈피에서는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이의 얼굴 위로, 휘젓는 팔 그림자만 자꾸, 바람을 가르는 풍차날개 마냥 지나갈 뿐이다. 증조할머니의 앙상한 두 팔. 그 두 팔이 어머니와 그녀의 어머니를 가르고, 어머니와 세상을, 어머니와 어머니를 가른다.
경화야, 경화야.
어머니의 할머니가 두 팔을 이불 속에 감춘 채로 어머니를 부른다. 처녀가 된 어머니는 할머니의 몸을 일으켜 약을 먹인다. 빨강, 노랑, 하양, 파랑, 그리고 파랑과 하양의 점박이 약과 시멘트 반죽 마냥 찐득한 물약까지. 경화야, 경화야, 증조할머니는 끝없이 부르고, 어머니는 약을 먹이고 변을 받고 목욕시키는 일을 반복한다. 그 반복되는 동작의 틈바구니에서 어머니는 언뜻언뜻 울고 있는 그녀의 아버지를 본다. 가슴을 뜯으며 탄식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그녀를 부르는 증조할머니의 목소리에 스러져가고, 어머니는 문득, 이 생에서 뿐만이 아니라 다른 생에서도 그렇게 살았으리라고, 그렇게 살리라고, 생은 그런 것이라고, 막연히 느낀다.
그러다가 뚝, 그 기억은 끊어지고, 다음 순간 비교적 새롭고 선명한 기억이 활짝, 닫혀진 기억의 문을 열며 뛰어든다. 어머니가 퍼렇게 멍든 다리를 절룩거리며 할머니 방으로 뛰어들듯이.
어머니는 다친 다리의 고통은 잊어버린 채, 비죽비죽 얼굴 위로 솟아오르는 기쁨과 부끄러움과 슬픔을 익숙한 죄책감으로 덮고 있다. 할머니는 자는 듯 조용하지만, 어머니는 전날 밤 소나무를 들이받고 벼랑 앞에 멈춰선 자동차 속에서도 경화야, 경화야, 부르는 증조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를 휘저으며 달려들던 앙상한 두 팔의 그림자도 보았었다.
증조할머니는 동그랗게 뜬눈으로, 밤이슬을 묻히고 돌아온 어머니를 보고 있다. 바싹 마른 입술은 반쯤 벌어져 있지만,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는다. 경화야, 경화야, 부르지도 않고, 끙끙 신음소리를 내지도, 푸아, 하고 한숨을 쉬지도 않는다. 어머니는 벌컥 이불을 제쳐보지만, 증조할머니의 혼은 이미 그곳에 있지 않다. 뼈와 가죽만 남은 두 팔이 거기 힘없이 늘어져 있을 뿐이다.
뒤죽박죽 기억을 담고 쏟아지던 눈물방울들은 다시 하나의 줄기가 되어 어머니와 나를 연결하고 어머니와 나를 채운다.

어머니는 오늘도 아버지에게 편지를 쓴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만나면, 그때까지 마음에 썼던 말은 아무 것도 소리내어 전하지 못하면서도 마음속으로 만이라도 바라고 또 바라면 아버지가 들으리라고 생각하는가 보다. 그러기에 어머니는 가끔 마음속에 편지를 쓰다가도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저으며 썼던 것을 지워 버린다. 어머니가 고개를 저으면 어머니의 마음속에 증조할머니의 두 팔이 어른거린다. 당신의 아내, 당신의 아이, 당신의 자리. 팔에는 그런 말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그 두 팔이 어머니가 간절히 바라는 것을 끊임없이 정죄하고 구속한다. 어머니는 그 두 팔을 밀어내며 다시 편지를 쓰지만 증조할머니의 두 팔은 결코 죽지 않는 나무의 가지처럼 또다시 자라나서 어머니의 마음을 휘젓는다.
그런데도 나뭇가지들이 잠시 휘젓기를 멈추면, 그 가지들 사이에서 어머니는 또다시 아버지를 본다. 하늘의 구름은 우는 듯 웃는 듯한 아버지의 표정으로 어머니를 보고 있고, 가지마다 매달린 마른 나뭇잎들은 아버지의 손이 되어 어머니에게 오라는 듯 가라는 듯 손짓을 한다.
어머니는 밤마다 한 발짝씩 다가가고 또 한 발짝씩 멀어지는 꿈을 꾸고, 꿈은 낮으로 이어져 묘지의 묘비들 마냥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 어머니의 망막 위에서는, 그 서늘한 그림자들 사이로 아버지가 걸어오던 장면이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처럼 희끗희끗 몸을 뒤챈다.

아버지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이 더 멀리 더 멀리 마중 갈수록 아버지의 발걸음은 조금씩 더 먼 곳에서 멈추어진다. 그제는 약국의 선반 사이까지 어머니를 보러왔던 아버지가 어제는 약국의 창구 앞에서 멈추어 섰고 오늘은 저만치 복도 끝에서 걸음을 돌린다. 내일은 그 어디, 약국이 있는 건물 앞에서 돌아서려는지.
어머니의 마음이 가는 만큼 내 몸은 자라나는 것일까. 나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내 몸이 신기하고 이상스러워서 어머니, 어머니, 불러본다. 약 먼지가 떠도는 선반 사이를, 햇빛이 번득이는 약국창구를, 소리 없는 진동만이 가득 찬 복도 끝을, 휘젓는 나무그림자에 할퀴우는 건물의 입구를 떠도는 어머니. 어머니의 시선을 부르고 싶어서 나는 나의 중심에 닿아 있는 어머니의 눈물줄기를 흔들어보지만, 어머니는 마치 못할 말을 한 사람처럼 입을 가리고 화장실로 달려가 구역질을 할뿐이다. 어머니는 어머니 속에 고여 있는 모든 말들을, 괴로움을, 상처를, 어머니의 세상 전부를 다 게워낼 듯 구역질을 하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어머니의 눈물줄기를 부여잡고 매달려 어머니를 부른다. 어쩌면 나까지도 게워내고 싶었을 어머니. 몸밖의 세상, 어머니 밖의 세상, 아무도 아니고 동시에 모두였던 세상의 자유, 어머니의 꿈속에서 멀리 멀리 떠내려가던 그 모든 알들의 유혹적인 부름을 들으면서도 나는 어머니의 눈물줄기를 잡은 손을 놓지 못한다. 그저 온 힘, 온 마음으로 내가 여기 있다고, 어머니의 눈물을 맞잡은 내가 여기 있다고, 어머니를 불러보는 수밖에.

문득, 눈물이 그렁그렁한 어머니가 고개를 든다. 방울방울 눈썹에 맺힌 눈물 속, 방울마다 맺힌 아버지의 얼굴 속에서 어머니를 부르는 무엇을 본 것일까. 어머니는 마침내 나를 본 것일까? 어머니는 천천히 웅크렸던 몸을 일으킨다.
약국창구를 지나 복도를 돌아, 결코 빠르지 않지만 단호한 걸음걸이로 어머니가 걸어간다. 어머니의 가슴이 쿵 쿵 쿵 쿵 북소리를 낸다.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은 정확한 박자의 울림. 아주 멀고 먼 옛날 깊은 숲 속에서나 들었음직한, 그래서 그 먼 옛날로부터 지금까지 이 세상에 흩어져있던 모든 정령과 생명을 불러모으는 듯한 북소리. 그 소리에 화답하듯 또 하나의 북소리가 들려온다. 여리지만 흔들리지 않는 박자의 울림. 아, 그것은 어머니와 함께 가는 내 가슴의 소리다.
어머니는 노을이 몸을 비비는 유리문을 밀어젖히고 바람을 맞으며 걸어간다. 어머니의 옷깃과 함께 시든 꽃잎과 마른나무들, 겨울화단의 헐벗은 풍경이 펄럭이는 바람을 타고 뒤로, 뒤로 밀려난다. 어머니는 아무 것도 보지 않고, 오직 가슴속의 북소리만 들으면서 앞을 향해 걸어간다. 또 하나의 유리문, 석양이 무늬진 기다란 복도. 어머니는 자신의 길다란 그림자를 앞세우고 거침없이, 북소리를 따라서 걸어간다. 아아, 이렇게 가는 것이, 이렇게 어머니와 발맞춰 가는 것이 사는 것이라면, 삶은 뛰어들어도 괜찮을 무엇이리라는 생각에 나는 신이 나서 발딱 재주를 넘어본다.
복도 끝, 아버지의 문은 우뚝 멈춰선 어머니의 손아래에서 가슴의 메아리인양 쿵쿵 소리를 낸다. 캄 인. 목이 조금 잠긴 듯한 아버지의 목소리. 이제 어머니가 아버지의 세상으로 들어가려는가. 나는 내가 어머니의 세상으로 들어가던 순간의 섬광과 굉음의 충격을 생각하고 주먹을 쥐고 질끈 눈을 감는다.

저항 없이 열린 아버지의 세상에는 흩어진 책이며 논문, 열려진 상자들로 가득하다. 그 종이조각들 위로 흘러 다니는 붉고 노란 노을의 물결 한복판에서 아버지가 엉거주춤 몸을 일으킨다. 반가움과 부끄러움으로 아버지의 얼굴에는 홍조가 파닥거린다. 내일 가보려고...... 그렇지 않아도 내일, 내일 만나서 말하려고......
어머니는 천천히 아버지의 방을 둘러본다. KOREA라는 주소가 쓰여 있는 상자마다 들어 있는 책이며 논문, 연필꽂이, 얼룩진 커피 컵, 사진틀...... 책상 위에는 푸른 줄의 청진기. 문득 나는 그것이 눈물줄기를 닮았다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고개를 떨군다. 조금 전 아버지 얼굴에서 파닥이던 붉은 기운은 그새 어머니 가슴의 북소리까지 빼앗아 달아났나? 북소리는 점점 더 멀어지고, 희미해지고, 어머니는 고개를 돌린다. 북소리의 흔적을 찾으려는 듯, 어머니의 눈길은 먼지가 떠도는 아버지의 텅 빈 서가와 노을이 번득이는 벽면을 헤매고 있다.
그 벽에 손바닥만한 액자 하나가 걸려 있고, 액자 속에는 한 여자가 들어 있다. 연필선 몇 개로 그려진 여자의 뒷모습. 왜 하필 뒷모습일까.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등을 돌린 채로 그림을 살핀다. 두어 가닥 머리카락이 흘러내린 여자의 목덜미. 돌아선 목덜미의 시린 감각이 그림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목덜미에 감긴다. 보는 사람의 뒷모습을 비추는 이상한 거울 속에 빠져 버린 듯 하다.
그 여자에게 돌아가려는 거예요. 어깨에 닿을 듯 다가선 아버지의 목소리가 떨고 있다. 어머니는 그림의 밑단에서 비뚤비뚤한 글씨를 발견한다. '아빠가 그린 엄마'. 거기 한 가족, 한 둥지가 들어 있다. 지금은 비어 있을지 모를 그 둥지가 그대로 둥그런 눈이 되어 어머니를 마주 본다. 그 여자, 끝없이 나를 거부하고 세상을 거부하고 자기자신까지도 거부하지만, 또 그렇게 모두를 부르고 있어요. 둥지는 또 어느새 크고 깜깜한 입이 되어 어머니의 귀에 속삭인다. 거부하는 몸짓만큼이나 거세게 나를 불러요. 아주 깊고 아득한 소리의 거울을 보는 듯 싶다. 문득, 그 속에 보이는 빈 독. 어린 시절 그 속에 함부로 쏟아 넣는 소리를 삼켜버리던 어둠의 깊이.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아찔함에 어머니는 잠시 비틀거린다. 어둠의 한복판으로 한줄기 바람이 휘몰아치고 낙엽이 날아오르듯 몇 장 기억의 갈피가 희뜩거린다. 온종일 닫아 걸린 방, 뛰쳐나가는 어머니의 어머니, 그 뒤를 달려가는 어머니의 아버지. 가슴을 쥐어뜯는 울부짖음. 그 여자, 자신을 믿지 못해요. 아이도 내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할 만큼. 그 죄의식, 그 끝없는 의심, 그 뒤척이는 몸부림의 근거가 어디 있는지. 어떤 때는 같이 있는 나까지도 그 여자를, 아니 이 세상을 믿을 수 없을 때가 있어요.
마침내 어머니는 아버지를 향해 돌아서서 손에 들고 있던 액자를 내민다. 어머니는 끌어안으려는 아버지의 몸짓을 읽고, 자신의 온몸에서 일어서는 갈망의 외침을 듣지만, 휘젓는 증조할머니의 두 팔은 또다시 그녀를 가로막는다. 유경화, 당신은 내게 세상을 믿게 했지요. 믿고 싶게 만들었지요. 아버지는 어머니를 안고 가만히 등을 두드리지만, 어머니의 몸은 고집스레 액자를 그녀의 눈앞에 들이미는 할머니의 두 팔에서 뻗어 나온 가지처럼 뻣뻣해진다.

벌써 사흘째, 어머니는 방을 떠나지 않는다. 방은 거울 속같이 조용하다. 그 속에 마른나무 그림자가 가끔 햇빛을 저으며 몸을 흔든다. 그뿐, 어머니를 둘러싼 세상은 숨을 죽이고 눈을 뜨지 않는 어머니를 지켜본다.
감은 눈 밑으로 절벽같이 깜깜한 세상, 그 어둠의 한 귀퉁이를 열고 부옇게 돋아 오르는 통로. 낯익은 그 통로에는 얼룩덜룩한 석양이 흔들리고 있다. 통로가 끝나는 곳에 밋밋하게 나있는 문짝 하나. 어머니는 그 문짝 앞에서 멈춰 서지만 다음 순간 헛발을 딛듯 문 밖으로 나가 서있다.
다시 마른나무들의 벌판. 가지 끝마다 피어난 빨간 꽃은 둥지로 변하고 어머니는 둥지들 사이를 달리고 날아다닌다. 앉아보면 둥지마다 어머니를 부르는 손, 어머니를 가로막는 손. 어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달리고 날아서 달아난다. 멈추고 싶지만, 어머니는 숨쉬기를 멈출 수 없듯 그 일을 멈출 수가 없다. 마구 고개를 젓다보면 다시 깜깜한 어둠.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며 돌아눕지만, 어둠 속에선 언제나 통로가, 문이 돋아 나오고, 그 문은 어머니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거센 바람에 밀리듯 훨쩍 훨쩍 열려서 어머니를 마른나무들의 벌판으로 몰아내고야 만다. 꿈은 수레바퀴처럼 어머니의 감은 눈 속에서 돌아가고 또 돌아가고, 영원히 멈추지 않을 듯 돌아간다.
그런 중에도, 어머니가 보아주지 않아도, 나의 몸은 자라난다. 눈가루를 모으고 모아 커지는 눈덩이같이, 수많은 꿈의 파편들을 모으고 또 모으며 어머니 눈물줄기에 매달린 영혼은 무럭무럭 몸으로 자라난다.
그러다가, 수 없이 그러다가, 또다시 다가선 문틈으로 언뜻 비쳐진 얼굴. 문틈에 끼었던 바람처럼, 문이 열리는 순간 아버지는 훨훨 꽃과 둥지의 벌판을 날아서 멀어진다. 부르고 싶은 혀의 떨림은 내 몸에까지 견디기 어려운 경련으로 퍼져나가는데도 어머니는 다문 입을 열지 않는다.
삐이 삐이.
벽을 넘어오는 찻주전자의 휘파람소리. 지난 이틀동안 릴리 아줌마는 문을 두드리다가 돌아가곤 했다.
콩코공 콩콩.
아줌마는 어떤 실망의 무게라도 떨쳐내겠다는 듯 탄력 있는 박자로 문을 두드린다. 움칫, 웅크린 어머니의 몸이 흔들린다.
이 세상의 문은 열릴 것인가? 나는 가만히 어머니의 눈물줄기를 흔들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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