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화단에서

2006.12.06 05:24

김혜령 조회 수:1010 추천:157

오랜만에 꽃에 물을 주었다. 그간 추위와 맹렬한 바람을 핑계로 돌보지 못한 화단에는 화초들이 잎사귀를 축축 늘이고 앉아 겨울 햇살을 받고 있다. 봄에 아름다운 화단을 가꾸리라 희망을 품고 새로 사다 심었던 꽃들 중 삼분의 일 정도는 오래 전 잡초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흙 속으로, 먼지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저 빈 화분, 저 잡초들...... 못 본 척 고개를 돌리고 지극히 무심한 표정으로 물을 준다. 꽃들은 돌보는 내 손길과 상관없이 제 수명이 다해 죽었을지도 모르지만, 검은 빈자리는 마주보기가 달갑지 않다. 나의 게으르고 무지, 무심한 정신이 비죽비죽 돋아난 거친 잡초의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 같다.
가꾸지도 못할 화분은 왜 이리 잔뜩 늘어놓았는지, 나 자신을 탓해 보지만, 그래도 봄이 되면 또다시 빈 화분들을 채우려고 꽃을 사러 갈 것이다. 이번에는 내 게으름을 견딜 수 있는 좀더 강한 것으로 사리라. 선인장 종류가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하며 꽃집에 가지만 매년 봄에 내가 사들고 돌아오는 화초 중에는 나비 날개처럼 얇은 꽃잎을 팔랑거리는 꽃들이 섞여 있게 마련이다. 분홍, 빨강, 노랑, 보라...... 그 색깔과 꽃잎의 하늘하늘한 나부낌이 주는 봄의 느낌을 거역하기가 힘든 탓에 나는 올해는 다르리라, 다르리라, 모네의 정원이라도 목전에 둔 듯 새로운 다짐을 하고야 만다.
마른 흙을 적시는 물줄기를 따라 고물고물 생각이 흘러나온다. 쓰다만 소설, 읽다 만 책, 누군가에게 써보내려고 사두었던 카드. 그 카드에 쓰려고 했던 말들이 더듬더듬 입을 달싹인다. 소설을 시작했을 때의 느낌, 책을 살 때의 느낌들도 가물가물 몸을 돋우어 마른 정신을 적신다. 호스에서 솟아난 물줄기에 잠시 무지개가 선다. 갈증난 꽃들이 물을 받아 마시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 물줄기에 툭, 무엇이 떨어진다. 벽에 붙어 있던 달팽이 껍질이 계단을 굴러 내려간다. 낡은 육체의 집을 벗고 새 집을 찾아 떠난 모양이다. 울컥 부러움이 치솟는다. 그 새집이 달팽이에게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정신 또는 영혼의 집이라는 생각 따위는 떠오르지도 않는다. 저렇게 나도 내 집을 훌쩍 벗고 새 집을 지어보고 싶다. 연초 무성한 욕심의 씨실과 자만의 날실로 직조되었던 나의 집. 그 벽에 가득 써 붙였던 계획들. 이젠 생기를 잃고 말라 부서질 듯, 빈속이 내비칠 듯, 얇아진 집. 툭, 나도 내 정신의 허물을 벗어 던지고 싶다.
새해에는...... 달랑 한 장만 남은 달력을 곧 떨굴 것을 생각하며 조심조심 희망과 의지를 앞세워 새 집의 틀을 짜 본다. 물기를 머금어 제법 풋풋해진 흙과 화초냄새가 콧속으로 스며든다. 어느 새 물줄기는 흥건히 발을 적시고, 한 떼의 뱀처럼 엉킨 호스와 젖은 낙엽 사이에서 물이 찬 달팽이 껍질이 뒹굴뒹굴 평생 공들여 짜냈을 나선형의 문양을 뱅글뱅글 돌리고 있다. 호스를 감아 놓고 오랜만에 실컷 물을 마신 화초들을 의기양양 일별한 뒤, 집안으로 들어선다. 이제부터 실현할 희망과 의지의 리듬으로 머릿속에 뿜빠뿜빠 행진곡이라도 울리는 듯 싶다.
그런데 문을 여는 순간 확 달려드는 냄새. 어제 먹은 튀김냄새다. 누군가 내 얼굴에 타월을 내던진 듯 헉, 숨이 막힌다. 새우튀김을 좋아하는 아이 때문에 어제는 중년기 체지방에 대해 얻어들은 모든 지식을 눌러버리고 튀김을 먹었다. 그렇다면 오늘 저녁은...... 나도 모르는 새에 내 정신은 부엌으로 달려가 냉동, 냉장고를 뒤적인다. 아이와 남편, 그리고 나의 식성을 위한 식단이 머릿속에 뒤엉킨다. 문득, 타월을 내던지고 싶어진다. 그러나 내가 내던진 타월은 허공을 떠돌다 다시 내 얼굴 위로 떨어질 것이다. 어제 먹은 반찬 냄새가 가득 배인 그 타월은 바로 삶을 지탱하는 일상, 그것이기에.
차 한 잔을 우려놓고 시계를 본다. 아이를 데리러 갈 때까지 그래도 다섯 시간이 남았다. 직장도 안 나가면 매일 집에서 뭐하냐는 황당한 질문 앞에서가 아니라도, 종종 그 시간들이 어떻게 꽃은커녕 떡잎 하나 내밀어보지 못하고 사라져버리는지, 어떻게 바쁘기만 했던 그 시간들이 빈 화분과 잡초로 가득 차 버렸는지 나 자신 의아할 때가 있다.
창문을 활짝 열어본다. 깎여진 잔디의 비릿한 냄새, 물먹은 흙과 화초의 푸릇한 냄새와 튀김냄새가 섞여든다. 오늘은...... 우편물을 정리하고 (연말에 배달되는 광고물의 양은 거의 괴물적이다.), 납부금을 내고,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고 (외출할 시간이 없으니 배달료가 없는 곳을 찾아 인터넷으로. 줄 사람이 많으니 오늘부터 한두 개씩이라도.), 아이 학교에서 가져온 통신문에 답하고, 빨래를 정리하고. 그 사이에 점심도 챙겨 먹어야 한다. 아 참, 보내려던 카드, 읽던 책, 쓰던 소설...... 집안으로 들어설 때 푸르던 희망과 의지는 그만 일상의 끝으로 밀려가 누런 욕심과 자만으로 변신하는 듯 싶다. 아니, 아니다. 오늘은 카드부터 쓰고, 소설 한 줄이라도 쓰고, 간단한 점심식사 후에 납부금 내고......
봄이 오면 나는 또다시 꽃을 사러 화원에 갈 것이다.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지나는 동안 봄에 한껏 유혹적인 빛깔과 자태로 팔랑이던 꽃잎들은 떨어지고, 더러는 줄기는 물론 뿌리까지도 말라 흙 속으로, 허공으로 자취도 없이 사라질 테지만, 만발한 꽃과 푸른 잎의 생기에 대한 희망과 의지를 거역할 수는 없을 것이고, 새롭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희망과 의지란 반찬냄새에 절은 일상의 타월처럼 아무리 허공을 향해 내던져도 다시 돌아와 얼굴을 뒤덮고 들이쉬는 숨결에 스며들고야 마는, 생명 바로 그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새해에는 새로 세우는 나의 희망과 의지가 일상에 억눌리지도, 일상을 무시하지도 않은 채, 일상과 사이좋게 어울릴 수 있기를, 그래서 내 정신의 집에 보다 성숙한 문양을 넣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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