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작교 건너가 만나리

2009.02.11 02:37

김혜령 조회 수:1041 추천:147

현은 활처럼 몸을 구부리고 울었다. 아이를 향해 억지로 웃어 보이느라 양옆으로 힘껏 당겨 놓았던 입술이 맥없이 벌어지고 만화의 여주인공처럼 흑흑,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슬픔과 경악을 감추느라 굳어있던 자신의 몸이 가을 햇볕에 바싹 마른 석류 열매 마냥 쩍 갈라지고, 새빨간 석류 알들이 쏟아지는 황홀한 모습이 보이는 듯도 했다. 하지만 내게 루비 같은 석류가 어디 당키나 한 말인가. 그리도 흐리멍덩 못나게만 살아왔는데. 쏟아진다면 징그러운 종양이 쏟아지겠지. 종양은 아직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란 걸 알면서도 현은 자기 자신에게 이왕이면 좀더 큰 불행과 도전의 빌미를 던져주기로 작심한 듯 위악을 떨었다. 그게 뒤집어보면 자기연민이고 청승이란 걸 알면서도, 아니 그렇게 청승을 떨고 있는 자기 자신이 기가 막히도록 가엾어서 현은 벗어날 수 없는 울음의 궤적에 들어선 고속열차 같이 어디로 달려가는지도 모르는 채 펑펑 울음을 뿜어냈다.
전화를 받은 건 일 주일 전이었다. 예년처럼 매모그램을 찍어놓고서도 또 예년처럼 아무 일 없겠거니 잊어버리고 지내던 그녀에게 확대 사진이 필요하니 다시 찍어달라는 간호사의 전갈은 그저 성가신 주문일 뿐이었다. 어느 한 순간 혹시, 하는 의혹과 함께 머리카락 한 올쯤 쭈뼛 곤두섰는지는 몰라도, 그것은 스타일도 의도도 없이 늘 허리케인을 품고 사는 듯한 그녀의 머리에 결코 눈치 챌만한 변화가 못되었다.
수화기를 턱과 어깨 사이에 끼운 불편한 자세로 현은 함부로 휘갈긴 메모와 오래 눌러보지 않은 전화번호들이 삐죽삐죽 눈을 흘기는 수첩을 찢어발길 듯 급히 넘겼다. 어디다 이 성가신 일을 끼어 넣나. 제법 착실히, 건강을 챙기며 산다는 그녀에게 매년 한번의 시력검사, 두 번의 치과 검진과 스케일링, 한번의 종합검진, 그리고 한 번의 산부인과 정기검진과 매모그램, 즉 유방 엑스레이는 있었어도 유방 확대엑스레이는 없었으므로 현은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새도 쥐도 아닌 박쥐를 만난 동물학자 마냥 당혹스럽고 짜증이 났다.
아이의 피아노 레슨 날, 미술학원에 가는 날...... 그나마 방학이 되어 현이 아이 학교에 자원봉사 하러 가는 날은 없어 다행이었지만, 아이가 태권도나 수영을 하는 날도 피하고, 남편이 골프를 치는 날과 아이가 생일초대를 받은 날이나 이웃집 아이가 놀러 오는 날, 서울의 친정엄마, 시어머니와 통화하는 날들을, 마치 매모그램을 찍는 일이 날 잡아 해야하는 대역사라도 되는 양, 피하다 보니 여름이 다 가도 현이 병원에 다시 갈 수 있는 날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첫 매모그램은 어떻게 찍었나. 미루고 미루다가 아이가 방학을 하기 며칠 전에 황급히 해치웠다는 기억이 나긴 했지만, 고작 일 주일밖에 안된 그 시간은 너무도 아득한 골짜기 저편의 일 같기만 했다.
이럭저럭 아이를 제 친구 집에 맡기고 방사선과에 다녀온 게 오늘 오후의 일이었다. 아무도 못 믿을지 모르지만 아이가 일곱 살이 되도록 현이 아이를 남에게 맡긴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 현은 이 일을 계획하면서부터 신경이 예민할 대로 예민해져서 마침내 방사선과에 도착했을 때는 다짜고짜 답답한 가슴을 풀어헤치며 외치고 싶은 심정이 되어 있었다. 자, 빨리 봐라, 실컷 봐라. 이 가슴 어디 종양이 있나.
성가시던 마음이 짜증으로 변하고 짜증은 어느 새 악의로 변해서 접수를 받고 안내하는 방사선과 직원들의 행동 하나 하나에 대해서 이죽거리는 마음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굼벵이를 삶아 먹었나, 왜 저리 느려? 아이구, 그렇게 큰 소리로 부르지 말아요. 나 귀 안 먹었어요. 내가 영어를 모를 것 같으면, 너희들이 그렇게 큰 소리를 지르고 행동까지 슬로 모션으로 한다고 알아듣니? 근데, 머리가 무척 나쁜가 보지, 방금 전에 대답한 걸 또 묻는 걸 보니. 시간 맞춰 오라고 성화더니 왜 이리 기다리게 하는 거야. 그러다가 한숨을 쉬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래, 내가 너희들 봉이지. 이왕 잡혀 온 걸 어쩌겠나. 나 같은 사람들을 많이 잡아와야 먹고 살 돈도 나오겠지. 아휴, 세월아, 네월아, 그저 남는 게 시간이에요.
하지만 그렇게 기다린 시간은 사실 10분도 되지 않았다. 상의를 벗고 소매 없이 망토 같이 생긴 가운을 걸쳐 입고 엑스레이 기사에게 안내 받아 촬영실로 들어갈 때 시계를 보았지만, 현은 제 속에서 이미 꼬일 대로 꼬인 악의를 차마 풀지 못했다. 그걸 풀어버리면, 재촬영이군요, 하며 현의 눈을 마주보는 중년 여기사의 조심스런 눈길을 받아낼 자신이 없었다.  
촬영기사가 장갑 낀 손으로 문제의 오른쪽 가슴을 차가운 촬영판 사이에 이리 주물러 붙이고 저리 주물러 붙이고 쥐어짜듯 짓누르며 엑스레이를 찍는 동안 현은 지시대로 멈춘 숨결과 함께 정지된 시간 속에서 가슴으로부터 퍼져나가는 통증에 정신을 집중했다. 썩은 동아줄 마냥 자꾸만 갈래갈래 부서지는 통증을 잡고 현은 한껏 간절한 마음이 되었지만, 무엇인가를 기원해야 할 것 같은 그 순간에 막상 기원할 만한 것은 떠오르지 않았다. 하긴 해님과 달님이 된 오누이를 따라 허겁지겁 썩은 동아줄을 잡은 호랑이에게도 그 순간에는 무언가를 손에 잡았다는 사실이 전부였을 것이다. 하늘 나라도, 먹고사는 일도, 곧이어 닥칠 추락이나 죽음까지도, 모두 그 순간 밖의 일이므로.
그래서 현은 전심전력으로 통증을 붙잡았다. 통증은 날카로운 섬광처럼 그녀의 의식을 꿰뚫으며 퍼져나갔다. 통증은 이제 어린 왕자의 억센 바오밥나무처럼 그녀의 한쪽 가슴을 움켜쥐고 미친 듯이 자라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통증의 가지 끝에서 현이 만난 것은 그저 새까만 어둠이었다. 위도 아래도, 자신이 서 있는 곳도, 자신의 생사도 구분되지 않는, 생사의 의미도 사라지는 공허한 자리.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것은 그녀의 의식을 제압하고 말았다.
촬영이 끝났다는 말을 듣고서도 현은 한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혹시 보충촬영이 필요할 경우를 위해 탈의실에서 기다려 달라던 촬영기사가 현의 탈의실을 노크했을 때도 현은 아직 좁은 탈의실의 나무문짝 너머, 제 가슴에서 무지막지하게 자라난 바오밥나무의 끝이 닿아있던 깜깜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과 다시 마주선 촬영기사의 얼굴을 복잡했다. 비 개인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총총한 주근깨와 주름이 아니더라도, 상대를 향한 걱정과 배려를 표시해야 하면서도 부러 겁에 질리지 않도록 안심시켜야 하는 기묘한 역할 때문에 여자의 얼굴은 고통스럽게 뒤틀려 있었다. 아마 그 얼굴 때문이었을 것이다. 의사에게 안내해 주겠다는 여자의 말을 듣기가 무섭게 현이 벌떡 일어나 알지도 못하는 길을 앞장서 행진하듯 걸어가고, 여자가 소개해 주는 의사에게 서둘러 손을 내밀어 시원시원 흔들며 인사를 건네고 별로 우습지도 않은 일에 큰소리로 웃어주었던 것은. 현은 촬영기사만이라도 그 엉거주춤 불안한 역할에서 빨리 구해주고 싶었다. 그게 인간 된 도리일 것 같았다. 현이 의사의 말을 들으며 과장된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일 때, 촬영기사의 눈빛은 아직 긴장을 풀지 못했으면서도, 주름진 입술 밑으로는 안도의 한숨이 빠져나가는 것을 현은 놓치지 않았다. 괜찮아요. 당신 잘못이 아닌 건 누구나 다 알잖아요. 당신은 고역스런 역할을 잘 치렀으니, 이제 편히 쉬세요. 현은 불안하게 의사와 현의 눈치를 보며 서 있는 촬영기사를 휴게실로 데려가 커피, 아니 신경을 안정시켜준다는 카모밀 차라도 한잔 대접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현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현은 촬영기사의 눈길도, 의사의 설명도 짜증스러웠다. 첫 번 촬영에서 우려되었던 이상 흔적이 확대촬영에서도 확인되었고, 그 흔적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는 이제 조직검사를 해봐야 한다는, 기껏해야 두 문장이면 끝날 설명을 하느라고 늙은 여의사는 틀니가 분명한 입을 끊임없이 벙긋거리고 있었다. â아무 것도 아닐 경우가 대부분이지만ä, â어차피 이런 검사란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서 하는 것이니까ä, â혹시 악성이더라도 이렇게 초기에 잡아내는 경우에는 회복 확률이 훨씬 커지는 것이니까.ä...... 잘 맞지 않는 틀니 사이로 수많은 우려와 확률의 수치가 새어나가는 중에도 뚱뚱한 금발의 여의사는 한껏 자상하고 여유 있는 표정을 잃지 않고 호호 하하 웃고 있었다. 현 역시 의사의 틀니가 빠질까 걱정스러운 중에도 호호 하하 따라 웃었다. 아아, 알겠어요. 그렇지요, 그렇지요. 마치 아이의 학교 선생에게서 호기심 많은 아이의 엉뚱한 행동을 보고 받을 때처럼 현은 한입 가득 턱뼈가 뻐근해지도록 웃음을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것이 있다면, 질문이 있느냐는 의사의 말에 서둘러 고개를 가로 저었고, 헤어지는 순간까지 호호 하하 제 몸을 흘러나온 웃음이 제 것 같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온몸의 울림통이 유난히도 크게 떨리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현은 울다가 콧물을 닦으려고 옆자리에 놓여 있는 손가방 속에 손을 밀어 넣었다. 이럴 때 영화에서는 곧잘 잘 생긴 남자배우가 손수건도 건네주고, 그러더구만. 그러면 비운의 여자주인공이 인정사정 없이 팽, 소리를 내며 코를 풀고. 현은 그렇게 슬픔의 폭풍 속에서도 잔물결 마냥 퍼져 가던 웃음을 그리워하며 아쉬운 대로 티슈를 찾았지만 손에 잡힌 건 한 뭉치의 종이책자들 뿐이었다. 의사가 읽어보라고, 마치 그 속에 모든 해답이 있다는 듯이, 그러니 그것으로 더 이상 의문과 불안으로 끈적거리는 현의 시선쯤은 충분히 밀어낼 수 있어 다행이라는 듯이, 문득 홀가분해진 표정으로 건네주었던 책자들이었다. 매모그램, 보충확대촬영의 필요성과 의미, 조짐검사의 필요성과 과정, 결과와 회복......
헤어질 때 인심쓰듯 끌어안던 여의사의 물컹한 가슴의 감촉을 기억하고 현은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그때 의사의 눈은 현에게 말하고 있었다. 어이구, 불쌍해라. 다음엔 어느 병실에서 너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지금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전혀 다른 모습의 너를. 아니, 어쩌면 이게 끝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어차피 그건 네 일인걸. 내 몸은 아직 멀쩡하거든.
현은 왼쪽 팔을 뻗어 오른쪽 어깨와 팔을 쓸었다. 의사의 감촉을 기억하고 있는 그 부분이 벌판에 내던져진 듯 시리고 추웠다. â시리다ä는 말을 생각하다가 현은 저도 모르게 흥흥 웃고 말았다. 어머니가 곧잘 해주던 우스개 소리가 생각났던 것이다. â응치가 시리고 시리가 응치다ä. 오래 전 일제시대에 어머니의 친척아저씨가 억지로 일본어를 배우느라고 외우고 다녔다는 말이었다. 한국어의 â엉치ä, 즉 엉덩이가 일본말로는 â시리ä라는 뜻이었는데, 그 단어들과 문장이 담고 있는, 현실의 권위와 자기자신에 대한 조소 어린 느낌과 함께 언제부턴가 그 말은 현의 집안에서 턱없이 싱겁고 가소롭다는 뜻으로 쓰여졌다. 현 역시 미국유학 초기 언어와 문화의 벽에 부딪쳤다고 느낄 때마다 스스로 최면 걸 듯 중얼중얼 써먹기도 했지만, 현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우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상한 한기를 느꼈다. 나중에 당시 처녀 총각이었던 현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서로에게 소개시켰다는, 그러니 현의 존재를 가능케 한 장본인이기도 한, 그 망국의 청년이 검은 두루마기 자락을 펄럭이며 어둡고 추운 겨울 벌판을 겨울나그네처럼 걸어가는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â응치ä로부터 시작된 한기는 온몸으로 퍼져나가고, 마침내 폐를 가득 채워 청년은 쿨룩쿨룩 기침을 했다. 덕분에 들릴 듯 말 듯 바람을 타고 흐르던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는 사라지고, 깜깜한 밤만 남아 컹컹 허공을 두드리는 기침소리를 받아냈다. 응치가 시리다던 아저씨는 겨우 마흔을 넘긴 나이에 호호백발 할아버지가 되어서 폐병으로 죽었다고 했다.
잠시 싱거운 웃음을 선사하던 한번도 본 일 없는 아저씨의 영상도 사라지고 이제 현의 벌판에는 â굿 럭ä이라는 의사의 마지막 외마디만 바람 따라 뭉친 덤불더미처럼 데굴데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래, 나는 이제 행운이 필요한 사람이지. 그것밖에는 매달릴 게 없는 사람이구나. 현은 어느 새 집 없는 개가 되어  덤불더미를 따라 헐벗은 벌판을  떠돌고 있는 제 모습을 보고 있었다. 아득한 지평선 너머로 해는 이미 사라져 잿빛 어둠이 몰려오는데 눈이 미치는 그 어느 곳에도 생물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외로움에 지친 개는 불어오는 바람을 향해 목청을 뽑으려 고개를 젖혔고, 현 역시 다시 턱까지 차 올라온 울음을 토하려고 잠시 고개를 세우는데, 언뜻 앳된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엄마. 언제부터 부르고 있었는지, 아이는 놀이터 터널의 부연 플라스틱 창에 코가 납작해지도록 달라붙어 의아한 눈으로 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여기가 맥도널드였지. 여름 해가 길게 비껴든 어수선한 부엌에서 칼과 빈 도마를 마주보고 섰다가 창 너머 구름에 석양이 불붙는 걸 보고 앞치마를 내던지고 집을 나왔던 생각이 났다. â밥상 부수는 여자ä. 오래 전에 읽은 소설(김채원, â겨울의 환ä) 구절이 왜 그 순간에 떠올랐는지는 몰라도, 현이 그 순간 부수고 싶었던 것은 밥상뿐이 아니었다. 부엌도 집도, 골프 모임에 나간 남편 (이런 날 골프를 치러 가다니!)을 포함한, 자신을 바라보거나 바라보지 않는 모든 시선, 문득 낯설어져 버린 그들과의 관계...... 그리고,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자신까지도...... 아니 못난 자신부터...... 모두 부숴 버리고만 싶었다. 그렇게 집을 뛰쳐나오는 순간에도 현이 아이를 챙긴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성본능과 습관 때문이라 하겠지만, 그렇게 달려온 곳이 고작 맥도널드라니.
화들짝 깨어난 현은 울음으로 일그러진 입술을 황급히 웃음모양으로 재조정하고, 한편으론 재빨리 팔을 뻗어 냅킨을 집어들고 팽팽 코를 풀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현은 아이를 향해 두 팔을 들어 만세 부르듯 흔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â하늘 향해 두 팔 벌린 나무들 같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나무들 같이......ä 가끔 현이 아이와 장난 삼아 주고받는 â성대한 인사ä 방법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고작 3미터 거리의 아이에게 이건 좀 지나치지 않나 싶었지만, 현은 다급했고, 비록 현의 눈물과 안경, 아이의 콧김으로 흐려진 플라스틱 창을 사이에 두어 희미하긴 해도 그제야 아이의 얼굴에서도 의구심이 사라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이가 다시 터널 속으로 사라지고 현이 쑥스러운 팔을 내리는데, 또 다른 시선이 급히 거두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오늘따라 텅 비어 있다고 느꼈던 놀이터 식당 저편에 한 가족이 앉아 저녁을 먹고 있었다. 젊은 아빠, 엄마, 그리고 현의 아들과 비슷한 나이의 계집애 하나. 그들의 눈앞에 구원을 요청하듯 흔들었던 자신의 두 팔을 생각하니 울컥 울음과 웃음이 앞 뒤 없이 치솟는 바람에 현은 다시 몸을 활처럼 구부리고 한 움큼의 냅킨을 움켜쥐었다.
안경을 치켜들고, 아이가 보는 앞에서는 감히 닦을 생각도 못했던 눈물을 닦아내면서 현은 생각했다. 저 계집애는 엄마가 있는데, 내 아인 엄마가 없을 거라 말이지. 혼자 엄마 없는 집안을 어슬렁거리며 현의 흔적들을 뒤적거리는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고, 그 흔적들이 닳아지고 흩어지면서 아이의 기억에서 자꾸만 희미해져 가는 제 모습이 떠올랐으며, 곧이어 냠냠 햄버거를 먹고 있는 계집애의 통통한 뺨을 힘껏 꼬집어주고 싶은 악의가 치솟았다. 저 놈의 계집애, 엄마 없어 기죽은 내 아일 깔보기만 했단 봐라. 그러고 보니, 현은 자신이 이미 형편없이 나쁜 귀신이 되어버린 것만 같아서 잦아들던 울음이 다시 치솟았다. 어차피 일곱 살 박이 아이를 두고 죽는다면 훨훨 미련 없이 이 세상을 떠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현은 아이의 작은 어깨 위나 머리맡에 발도 손도 목소리도 얼굴도 없이 떠돌고 있는 제 모습을 상상했다. 누구에게도, 아이에게조차도, 보이지 않는 모습, 들리지 않는 목소리. 발도 없고 손도 없고 â시린 응치ä마저 없으니 어디 편히 앉거나 누울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자 이 세상에 한이나 미련이 남아 차마 떠나지 못하고 기약도 없이 산 사람들 세상을 기웃거리고 서성이는 모든 귀신들의 외로움과 고단함으로 현은 목이 꽉 메이고 온몸이 뻣뻣해져 버렸다.
그런 귀신들을 달래느라 제사상도 차리고 푸닥거리도 한다지만, 어쩌다 부엌에 들어와 봐야 할 줄 아는 요리라고는 라면이 고작인 남편이나 일곱 살 짜리 아들에게 제사상 따위를 기대하기는 애당초 그른 일이거니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이켜봐도 제사상 음식이 먹음직스러웠던 기억은 없었다. 귀신들을 꽤나 어려워하는 것 같이 수선스레 온 친척들이 다 모이고 격식 따져가며 제사상을 차려도 부엌에서 일하는 여자들은 귀먹은 귀신도 알아들을 만큼 큰소리로 투덜거리기가 일쑤였고, 꾸벅꾸벅 졸던 현이 밤이 늦어 겨우 얻어먹는 제삿밥은 입안에 깔깔하기가 모래를 씹는 것 같았다. 어린 현이 한술 뜨고 얼굴을 찡그리면 이구동성 귀신들이 먹고 간 음식이라 그렇다고 했다. 제삿날 내내 현이 본 색다른 사물이란 큰아버지가 붓글씨를 휘갈겨 쓴 종이 몇 장, 그나마도 불에 태워지고 까만 재로 물에 풀려서 지붕 위에 뿌려지던 모습이 전부였는데, 언제 어느 귀신이 뭘 먹고 갔다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차라리, 투덜거리며 만든 귀신 음식은 처음부터 맛없는 것이라는 쪽으로 현은 생각을 굳혔다. 그런데 나는 이제 나쁜 귀신이라니. 나쁜 귀신들은 섣부른 무당들에게 칼을 맞기 일쑤였고, 그래도 안 떨어진다 싶으면 달래는 척 굿을 해주어도 여간 귀찮아하는 게 아니었다.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주듯이, 아니 귀찮은 개 물고 가라고 상한 고깃덩이 멀리 던져주듯이, 원 풀어드렸으니 그만 가쇼, 다신 오지 마쇼, 그런 식이었다. 그러니 나쁜 귀신에게 돌아가는 것은 기껏해야 길길이 날뛰는 무당춤 구경에 먼지가 보얗게 덮인 고사떡이 고작인 것이다.
그런데, 내가 지금 왜 제사상, 굿상 타령을 하고 있나. 밥상을 부수고 싶어 뛰쳐나온 여자가. 현은 한 움큼의 모래를 입에 문 얼굴로 계집애를 바라보았다. 계집애의 엄마는 현의 우는 얼굴에 닿아있던 시선을 재빨리 거두었고, 계집애의 아빠는 미처 거두지 못한 눈길은 현 쪽에 그대로 놓아둔 채 얼른 초점을 흐려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으며, 계집애는 의기양양하게 햄버거를 씹으며 손가락에 묻은 케첩을 쪽쪽 소리가 나도록 빨고 있었다. 귀신도 아닌 사람이 이렇게 펑펑 울고 있는 걸 뻔히 보면서도 모른 척 하다니. 현은 그들이 어째 주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면서 정말 자신이 그 사이 보이지 않는 귀신이라도 된 것 같아 겁이 나고 새삼 야속한 생각도 들었다.

골프모임에 나갔던 현의 남편은 밤이 깊어서야 돌아왔다. 왔어? 침대 한쪽에 웅크리고 누웠던 현은 소리 없이 눈꺼풀만 들어 물었고, 그는 â별일 없지?ä 하고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더니 밑동 잘린 통나무처럼 벌렁 쓰러져버렸다. 그 바람에 등뒤의 매트리스가 출렁거리며 현의 코끝으로 희미한 술 냄새를 실어 날랐다.
내가 방사선과에 다시 가야했던 일을 기억이나 하고 있는 걸까. 그의 â별일ä에는 무엇이 포함된 것일까. 단지 일상적인 하루의 안녕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검사결과까지 포함해서 하는 말일까. 그가 정말 저리 태평하게 아무 일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다면 그의 직감을 믿어도 되는 게 아닐까. 그는 곧잘 본인도 모르고 있는 남의 병을 먼저 눈치채지 않던가. 아무개는 안색이 안 좋아, 몸 어디가 안 좋은 게 분명해. 남편은 오랜만에 만난 사람을 가리켜 불쑥 그런 말을 했고, 그런 말들은 종종, 그것 봐, 암이라고? 내가 석 달 전에 만났을 때 어째 느낌이 이상하드라니까, 내 눈이 점쟁이지, 하는 말로 이어지곤 했다. 그렇다면...... 현은 안심해보려고 마음을 먹다가 불현듯이 요즘 들어 남편이 내 얼굴을 제대로 본 일이 있었는가 의심이 솟구쳤다. 더구나 지금은 어두운 밤이고 그의 눈은 술과 졸음으로 흐려져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니, 현의 가슴은 다시 불안에 휩싸였고 다음 순간 용암처럼 뜨겁고 거센 울화가 치밀었다. 이 인간이 나를 쳐다보지도 않는구나. 제 마누라가 죽는지 사는지 상관도 않는구나. 더불어, 기껏해야 남편의 무심에 제 마음을 걸고 매달리려고 했던 자신을 향해 버럭 짜증이 났다. 벌떡 일어나 방안의 전등을 모두 휘영청 밝혀놓고, 코를 고는 그의 눈꺼풀을 끌어올리며 소리치고 싶었다. 봐라, 똑똑히 봐라, 네 마누라 곧 죽게 생겼는지.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너, 내 두 뺨이 바로 무릉도원이었다고, 그렇게 환했다고 했지. 너 지금도 내 눈 똑바로 바라보고 그 말 할 수 있니? 그러나 현은 일어날 수도, 소리칠 수도 없었다. 어둠을 걷고 그의 눈꺼풀까지 걷어올리면 그 밑에서 어떤 자신의 모습을 만나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몸이 석고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버렸던 것이다.
현은 어둠 속을 흘러가는 남편의 고른 숨소리가 그의 것인지 제 것인지 분간이 안될 때까지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겨우 고개를 돌려 그 쪽을 바라보았다. 저만치 그는 한 무더기 부연 돌섬 같이 누워 있었고 그와 그녀 사이에는 어둠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는 전과 다름없는 삶의 세상에 살고 있는데 현 자신만 함부로 돌팔매질하는 누군가의 손에 잡혀 혼자 강의 이편으로 내던져진 것만 같았다. 간간이 지나가는 자동차 불빛에 비친 가로수 그림자가 침대 위의 어둠을 젓고 지나갈 때마다 현은 눈물로 부풀고 뻣뻣해진 눈꺼풀을 껌뻑이며 생각했다. 저 강물이 얼마나 깊을까, 저 강을 내가 다시 건너갈 수 있을까.

타나바타 마쓰리. 현은 익숙하지 않은 단어를 귀에 담은 채 TV화면에 저절로 박혀버린 무심한 시선으로 집집마다 내걸린 오색종이를 보고 있었다. 그곳이 어딘지는 몰라도 넋이 빠진 엄마 옆에서 지루해진 아이가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보다 포기해버린 자리가 거기였다. 대나무에 높직이 매달려 담 너머로 얼굴을 내민 오색종이에는 언뜻 한자 같이 보이는 것이 몇 자씩 적혀 있었다. 듣고 보니 견우성과 직녀성의 만남을 축하하며 자신의 소망을 비는 일본의 축제라고 했다. 하지만 이날 비가 오면 견우성과 직녀성이 은하수를 건너지 못하므로 일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현은 저도 모르게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랬다.
맞다. 음력 칠월칠석. 그 다음 날, 음력 칠월 초파일이 현의 생일이었다. 비가 오건, 오지 않건 칠월 초파일은 어김없이 긴 이별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어린 시절 집에서 일하던 청상과부 식모 아줌마로부터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이 칠월칠석이고 그 밤이 지나면 헤어져 다시 일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제 가슴이 철렁 깊고 깜깜한 우물에 던져져 가라앉던 절망감을 현은 기억했다. 칠월 초파일, 제 생일에는 해가 쨍쨍 내리쬐어도 밤하늘에는 별 하나 없이 깜깜할 것만 같았고, 하늘 어디에선가는 비가, 아니 눈물이 내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견우나 직녀가 아니라도 이별을 서러워하는 누군가의 눈물, 어쩌면 그 식모 아줌마나 그녀의 죽은 남편, 또는 현 자신의 눈물이.
그리고 현은 그때부터 매우 오랫동안, 아마도 아이를 낳아 제 생일도 잊을 만큼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되기 전까지, 거의 한 해도 거르는 일없이 제 생일을 전후로 이별을 경험했다. 어린 시절 함께 놀던 사촌이 어느 날 불덩어리가 되어서 앓아 눕더니 뇌막염으로 죽은 것도 현의 생일이 지나고 일주일도 못 되어서였다. 중학교 시절 여름방학 중에 문득 현에게 전화를 걸어왔던, 같은 반이라는 것밖에는 모르는 아이가 개학을 열흘 앞두고 유원지의 호수에 빠져 죽은 것도 날짜를 따져보니 현의 생일과 사흘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집에서 기르던 개나 고양이, 새, 하다못해 금붕어가 죽는 것도 현의 생일이 지나고 한두 달 안팎의 일이었다. 할머니나 할아버지, 집안 어른들이 세상을 뜨는 것도 한참 극성을 부리던 무더위가 가시고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그 시기였고,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경험했던 두 번의 연애가 끝난 시기도 그와 비슷했다. 무책임에 가깝도록 미숙하고 불안정한 열정만의 만남이 여름방학이라는 공백기간을 거치면서 겪어야 하는 감정변화의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겠지만 현의 의식 속에서는 고정적인 자리를 차지할 만큼 만남에 대한 강력한 불안과 공포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 실제로 벌어지는 이별은 아니라도 이별에 대한 상상과 공포와 절망감을 유발하는 일들은 끊이지 않고 현과 그녀의 생일 주변을 빚쟁이처럼 맴돌았다. 오죽하면 삼 년 넘게 기다렸던 남편의 프로포즈가 단지 자신의 생일에 이루어졌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말았을까. 현의 공포를 알지 못했던 남편은 그 해가 다 가고 새해가 올 때까지 현의 눈치를 보면서 자신의 사랑과 결합에의 의지를 새롭게 증명해 보여야 했다.
아, 내가 그 일들을 어찌 잊었을까. 까마득하던 공포와 불안의 기억은 그 갑작스런 재생의지가 곧바로 괴력으로 변해 현의 혼란스런 의식 한복판에 철썩 떼어낼 수 없는 자기암시로 달라붙었다. 그래, 내 생일이 멀지 않았지. 현의 생일은 음력 칠월 초파일이지만 양력을 쓰는 호적에도 7월 8일로 올랐고, 언제부턴가는 굳이 음력을 따지기가 귀찮아진 나머지 현도 주위 사람들도 양력 7월 8일을 생일로 챙기고 있었다. 그런 만큼 한참 더위가 익어 가는 양력 7월에 맞이하는 현의 생일은 견우와 직녀가 만나고 헤어지는 칠월칠석과의 연관성을 주장하기가 어려워진 셈이지만 지금의 현에게는 그런 사실은 거추장스런 세부사항에 불과했다.
현은 제 안에서 잠이 깨어 무서운 속도로 팽창하기 시작한 이별의 공포를 꿀꺽 눌러 삼키고 다시 하늘을 보았다. 하늘은 여전히 태평스레 파랬다. 벽지처럼 밋밋하고 무표정한 푸른 색. 어느 한 곳 구겨진 곳도, 찢어진 틈도 없었다. 물론 견우도 직녀도 보일 리 없었다. 울컥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누가 바로 제 얼굴에 벽지를 붙여놓은 것 같았다. 그것도 한 대야는 족히 될 강력한 풀을 흠뻑 바른 벽지를. 현은 숨이 막혔다. 아무도 모르리라. 벽지 뒤에서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가 어떻게 울고 있는지. 나라는 벽이 어떻게 균열되어 가고 있는지. 그 균열마다 어떤 눈물이 시퍼런 강이 되어 흘러 넘치고 있는지.
벽지 뒤의 균열된 벽이 되었다가 어느 새 시퍼런 강물 속에 빠져들기 시작한 현의 의식은 그 강물 속에 퍼져 가는 석양을 바라보다 상어를 만난 물고기처럼 소스라치며 튀어 올랐다. 핏빛으로 물든 강물, 아니 그녀의 핏줄기를 타고 울퉁불퉁 도깨비처럼 생긴 암세포들이 퍼져 가고 있었다.
현은 자신의 살과 피를 걸신들린 주정뱅이들처럼 함부로 뜯어먹고 마시는 암세포들의 잔치를 눈앞에 보았다. 그들은 낄낄거리면서 먹다가는 뱉고 더러는 토하고 배설하면서 들리지 않는 큰소리로 떠들어댔다. 그리고 그들의 소음과 광적인 식욕으로 하얗게 뼈만 남은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햇빛을 보는 일조차 힘에 겨운지 커튼을 드리워 어둑신한 방에 홀로 누운 여자의 얼굴은 현에게 낯익은 얼굴이 아니었다. 그러나 현의 눈앞에 점점 확대되어 오는 여자의 얼굴은 현이 모르는 얼굴도 아니었다. 광대뼈가 불쑥 튀어나오도록 움푹 패인 뺨에 고인 푸르스름한 어둠과 휑뎅그렁 추수 끝난 겨울 들판처럼 넓어진, 푸른 핏줄이 지렁이처럼 드러난 이마, 고통으로 흐려진 눈동자에서 가끔씩 남은 힘을 다하는 듯 짧게 빛나는 광채. 그건 오래 전 암으로 돌아가신 할머니의 얼굴이었고, 현 자신의 얼굴이었다. 현은 자신과 할머니의 얼굴이 닮았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으면서 잠시 마음이 숙연해졌지만 다음 순간에는 다시 왈칵 눈물이 솟았다.
내가 아무래도 큰 죄를 지어 벌을 받는가 보다. 팔십 평생 꼿꼿하기가 대나무 같았던 할머니, 의사의 딸이었고 일찍이 여의전을 졸업하고 의사의 부인으로 곱게만 살아온 할머니가 뼛속까지 퍼진 고통의 물결 사이에 한숨 실어 흘린 말이 그랬다. 그때 할머니는 무엇을 보고 계셨던가. 유리를 한 겹 덮씌운 듯 멀기만 하던 눈동자로. 현은 입을 벌려 할머니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현을 보고 있지 않았고, 현이 정신을 차리고 할머니의 시선을 찾았을 때는 이미 진통제에 몸과 정신을 맡기고 잠이 들어버린 뒤였다.
현은 다시 눈앞에 보이는 할머니를 향해 무슨 말이든 해보려고 입을 벌려보았지만, 아무 말도 나와주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할머니는 누구보다도 착하게 사셨잖아요. 할머니, 암은 병이고, 병은 몸에 고장이 난 거지 벌이 아니라는 거 잘 아시잖아요. 그런 쓸 데 없는 말은 지금도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모두들 호상이라고 했다. 팔십을 넘겼으니 천수를 누리셨고, 풍성히 남기신 자손들 지켜보는 앞에서, 그나마도 오래 병치레 않고 자는 듯 가셨으니, 당신도 자손들도 복 받은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현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뭔가 억울한 느낌이 오래도록 목에 걸려 있었다. 암세포에 온전히 정복당하기까지 당신이 겪었던 고통을 보았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날 할머니를 위로해 드리지 못해서 일까. 평생을 종교 없이 사셨어도 임종을 앞두고는 종교적인 의식을 통해 위로나 용서를 구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할머니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가로 저으셨다. 모르긴 해도 할머니가 말씀하신 죄나 벌이 종교와 무관하다는 느낌만은 그때도 지금도 확실했다. 그때 할머니가 말씀하신 죄는 그저 견디기 힘든 고통에 대한 투정이고 호소였는지도 모르지만, 지금 현은 그것이 바로 제 목에 걸려 있는 것만 같았다.

조직검사를 받기로 한 날 현은 새벽 일찍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약속시간을 맞추느라 허둥지둥 달려가야 했다. 아침을 먹고 몸을 씻고 옷을 입고 집을 나서기까지 평소 무심코 지나치던 일상의 모든 것들이 한 번, 두 번, 더러는 세 번이나 네 번까지도 거듭 제 존재를 주장하며 얼굴을 들이밀었기 때문이다.
아침은 무엇을 먹어야 하나. 아무 일 없는 다른 어느 아침처럼 토스트와 달걀 프라이에 우유와 커피를 마실까, 아니면 남편이 좋아하는 잣죽이라도 끓일까. 내가 다시 그에게 잣죽을 끓여줄 수가 있을까. 그러다가 스크램블드 에그와 소시지를 넣은 부리토를 좋아하는 아이 생각이 났다. 내가 너무 유난을 떠는 걸까. 조직검사, 아니, 나 하나 죽는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좀더 담담할 수는 없을까.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이에게도 낫지 않을까. 그렇게 망설이며 조리대와 냉장고 사이를 뱅뱅 돌다가 반쯤 타버린 토스트를 상에 늘어놓았을 때는 기다리다 지친 아이와 남편은 이미 우유컵과 커피잔을 비우고 각자의 일에 빠져 있었다.
몸을 씻을 때는 제 가슴을 쳐다볼 수가 없어서, 볼 수 없는 가슴을 차마 외면할 수가 없어서, 눈길이 닿지 않는 그 가슴의 외로움과 두려움이 껍질 벗겨진 생살에 소금 뿌린 듯 따끔거리도록 아파서, 보통 때보다 배가 넘는 시간이 걸렸다.
옷을 입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조직검사 안내서를 따르면 그저 â상, 하의가 따로 떨어진 간편한 옷ä을 입으면 그만이었지만, 현에게는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침 생리 중이어서 생전처음 해보는 이런 â엄청난ä 일을 치르다 어떤 실수를 저지를까 무서워 바지는 입을 수가 없었고, 평소에 안 입던 치마를 고르자니 이 치마는 구겨졌고, 이 치마는 단이 뜯어졌으며, 저 치마는 너무 짧고, 저 치마는 후크가 아슬아슬하고, 이 치마는 허리가 조이고, 저 치마는 너무 얇거나 두껍거나 색깔이 장례식용이거나 바람난 여자용이거나 했다. 옷 무더기를 침대 가득 쌓아놓고 약속시간에 가까워 가는 시계를 흘끔거리며 바싹바싹 애를 태우다가, 벌거벗지만 않으면 됐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옷을 입고 방을 나서자 거실에서 놀던 아이가 탄성을 질렀다. 우와, 엄마 예쁘다. 신문을 보던 남편은 고개를 들어 현을 바라보고 빙긋 웃더니, 걱정 말고 다녀와, 했다.
뭘 걱정 말라는 걸까. 조직검사를 해야 한다는 말에 그는, 속 시원히 해보면 되지 뭐, 했고, 그날은 자신이 직장을 쉬고 집에서 아이를 보겠다고 자청했다. 그러니 아이 보는 일을 걱정하지 말라는 걸까, 조직검사 결과를 걱정하지 말라는 걸까. 그가 아는 누구 부인도, 누구 누나도 조직검사 했지만 아무 이상 없었다던가. 조직검사 결과야 남편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다시 한번 남편의 â점쟁이 눈ä을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에 현은 잠시 남편 주위를 서성거렸다. 게다가 왜 나를 보고 웃었을까. 현은 분홍과 보라색이 은은히 섞인 니트 상의에 한쪽 옆선과 아랫단 위로 커다란 꽃무늬가 수 놓여진 자주색 플레어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내 차림이 우스워서 그랬을까. 다시 보니 턱없이 고전적이다 못해 청승맞은 기분까지 들었다. 저 여자가 마지막으로 용을 쓰는군, 그러는 걸까, 아니면, 꽤나 불안한가 보군, 그러는 걸까. 내가 죽을 병에 걸렸다면 저 남자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니,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오래 전 연애시절에 나 이전에 사귄 여자가 없었느냐는 현의 물음에 그는, 응 하나 있었는데 죽었어, 하고 간단히 대답했다. 시시콜콜한 질투와 열정으로 뒤엉킨 연애시절의 공연한 질문에 말려들어 고문당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겠지만, 조직검사를 받기 위해 집을 나서는 그 순간에 그 말은 오랫동안 물 속에 가라앉아 있던 시체처럼 불쑥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올라 제멋대로 떠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죽으면 저 사람, 다른 여자에게 말하겠지. 응, 마누라? 하나 있었는데 죽었어. 더 이상의 어떤 질문이나 항의도 차단하려는 듯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이 현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남편의 죽었다는 옛 애인은 백혈병이었다가 폐결핵이었다가 했다. 요즘도 폐결핵으로 죽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으면 얼른 아니, 폐암이지, 했다. 남편의 기분에 따라 교통사고로 비명에 죽기도 하는 그 옛 애인은 한때 그들 연애에 적당한 신비감과 농담거리를 제공하는 얘깃거리로 자리잡았다가 차츰 잊혀졌지만, 현은 지금 그 당시 그녀에 대해 느꼈던 자잘한 질투와 함부로 죽음을 말한 죄책감, 그리고 훗날 현을 가리켜 남편이 â죽었어ä라고 대답할 또 다른 여자에 대한 질투와 그 여자 앞에 힘없고 말 못하는 시체로 널브러져 있을 자신에 대한 모멸감과 연민으로 울컥 눈물이 솟구쳤다.
눈물을 감추느라 달리듯 서둘러 자동차에 들어가 앉았지만, 어질러진 집안을 생각하니 현은 다시 불안하고 처연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집안을 저렇게 어질러 놓고 나가도 되는 걸까. 늘 죽음을 생각하며 산다는 어떤 사람은 집을 나설 때면 다시 못 돌아올 것을 생각해서 서랍 속의 속옷 하나 하나까지 모두 철저히 단속을 하고 다닌다던데. 현은 떠나야 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망설이다 마침내 어차피 나와 다른 세상 얘기라면 누가 알랴, 될 대로 되라는 기분이 되어서야 집을 나섰다.

프런트에서 연이어 들이미는, 흰색, 노란색, 분홍색 종이가 겹겹이 붙은 서류에, 설명을 들었노라, 이러 이러한 부작용이 있는 줄 아노라, 죽어도 괜찮노라(?), 서명하고 나서도 한참이 지난 뒤에야 현은 탈의실로 안내를 받아 들어갈 수 있었다.
매모그램을 찍을 때처럼 분홍색 망토 같은 옷을 벌거벗은 상체에 걸치고 상자 속 같은 탈의실 의자에 앉아 있자니 현은 자신이 좁은 외양간에 갇힌 소가 된 것 같았다.
현은 아이를 낳고 처음 일이 주 동안 제대로 젖을 빨리지 못해 고생한 적이 있었다. 아이가 아직 잘 빨지를 못해서 그러는 건지, 젖이 충분치 못해 그러는 건지, 아니면 다만 아이와 엄마가 서로 타이밍을 못 맞추는 것인지, 이유를 모르는 상태로 허둥지둥 분유를 타 먹이며 지내다가, 겨드랑이까지 딱딱하게 차 오른 게 바로 젖이라는 생각에 펌프를 사용했다. 두 개의 빨판을 젖꼭지에 붙이고 스위치를 누르면 연결된 투명한 튜빙을 통해 뽀얀 젖이 작은 병에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는 게 보였다. 그 후로 아이는 젖을 잘 빨았지만, 모유를 너무 좋아하게 된 나머지 현은 출산휴가가 끝나 직장으로 돌가간 뒤에도 하루 두 번씩 펌프를 들고 회사 양호실 옆의 빈방을 찾아가야 했다. 아이를 품에 안고 젖을 먹일 때의 나른하고 안온하던 느낌과는 달리 그렇게 썰렁하고 좁은 빈방에서 펌프질을 할 때면 자신이 젖소와 다름없는 포유동물이라는 낯설고 조금은 슬프고 굴욕적인 자각이 앞섰다.
포유동물. 현은 어깨 위에 헐렁하게 걸쳐진 분홍 망토 밑으로 지나친 냉방 때문에 올올이 소름이 돋은 살갗과 꼿꼿이 일어선 젖꼭지를 느끼며 생각했다. 오래 전에는 이 세계가 하나의 대륙이었다고 했다. 하나였던 땅덩어리가 갈라져 오대양 육대주가 생기고 그렇게 서로에게서 분리된 생물들은 제가기 자신이 위치한 환경에 적응하며 번식하는 동안 더 이상 교접이 불가능한 다른 종으로 진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은 갈라지는 대륙을 그린 슬라이드를 강의실 스크린에서 보고 난 뒤 그 강의가 끝날 때까지 눈앞이 흐려져서 아무 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다. 온몸에 눈물이 차 오르는 것만 같았다. 현이 난생처음 부모형제를 떠나 미국으로 유학 온 첫 학기였다. 현은 눈물 속에서, 갈라진 대륙의 한 끝에 서서 저만치 바다 건너의 사슴을 바라보고 있는 캥거루를 보았다. 앞을 가리는 건 제 눈물이란 걸 뻔히 알면서도 현은 자꾸만 그림 속의 캥거루도 사슴도, 들소도, 하마도, 자다 깬 코알라 곰도, 모두 이유도 모르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울고 있는 것만 같았다. 눈을 지그시 감으니 눈물이 대륙 사이에 번져 다리가 되는 것을 보고 현은 잠시 미소를 짓기도 했지만, 동물들은 서로를 쳐다보기만 할 뿐 움직일 줄을 몰랐다.
지금은 한기에 떨며 꼿꼿이 일어선 제 젖꼭지가 눈물에 밀려 떠내려가는 어느 대륙 끝의 짐승처럼 가엾게 느껴졌다. 침대 저편, 어둠의 강물 너머 저 만치에 부옇게 웅크린 남편의 몸이 보였다. 그 다시는 건널 수 없을 것 같은 강물 앞에서 포낭동물이라는 제 가능성의 반을 잃어버린 모든 포유동물의 회한과 고독이 제 젖꼭지 끝에 매달려 떨고 있는 것만 같았다. 쩍 갈라진 확률의 이쪽과 저쪽. 산 사람의 대륙과 죽은 사람의 대륙. 나는 지금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것일까. 온몸이 시리다는 느낌에 얼른 â응치가 시리다ä를 몇 번 반복해 보았지만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현은 마침내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수술실로 들어갔다. 수술실이라기보다는 가운데 구멍이 뚫린 이상한 침대가 있고, 그 침대 밑에 이런저런 장비들이 잔뜩 놓여 있는 방이었는데, 그 침대 앞에서 간호사가 현에게 설명을 했다. 조직검사 과정은 대강 알고 계시지요? 현은 방사선과 의사가 건네 준 안내책자를 열 번도 넘게 읽는 터라 고개를 끄덕였지만, 간호사는 제 의무를 다하느라 귀찮아 죽을 지경이라는 표정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이상이 발견된 가슴 주위를 마취하고, 그 자리에 흡입기가 연결된 주사바늘을 꽂아 몇 군데의 조직을 빨아낸다는 것까지는 아는 얘기였는데, 그 자리에 작은 타이태니움 조각을 넣어 표식을 남긴다는 말은 새로웠다. 금속조각을 내 몸 속에 넣는다구요? 아, 예, 오늘 검사 결과에 이상이 없거나 있거나, 앞으로 해야 할 치료나 검사를 위해서 표식이 필요하거든요. 그렇지만...... 그 금속조각이 내 몸 속에서...... 현은 그 이물질이 몸 속에서 이상반응을 일으키지는 않을까 묻고 싶었지만 간호사는 자칫 과민반응을 보일 것 같은 현의 입을 빨리 막으려고 시큰둥하던 태도를 바꾸어 호들갑을 떨었다. 정말, 아주, 아주우 작은 조각이에요. 한번 보실래요? 간호사가 내민 투명한 플라스틱 통 속에는 점처럼 작은 금속조각이 들어 있었다. 잘 보이지도 않지요? 자, 크게 보시려면 이쪽에 달린 돋보기를 통해 보세요. 돋보기를 통해 보아도 너무 작은 것이라 현의 눈에는 가물가물 형태가 잘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그 순간의 인상으로 모양을 말하라면, 현의 눈에 그건 날개를 펼친 새의 모습이었다.
내가 벌써 돋보기가 필요한 나이가 되었나 싶어 눈을 찡그리고 보는데 대여섯 명의 가운 입은 여자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이 사람은 의사, 이 사람과 이 사람은 간호사, 이 사람은 테크니션이고 이 사람은 보조사, 이 사람은 무슨 무슨 코오디네이터, 게다가 전화안내를 한다는 여자까지 견습 삼아 들어왔다며 현의 양해를 구했다. 호호, 하하, 떠들썩하니 악수하고 인사를 나누는 경황 중에도 그들은 익숙한 솜씨로 현을 침대 위에 엎어놓았다. 김장을 돕거나, 새로운 화장품이나 미용 도구를 써보려고 동넷집에 몰려든 여자들 같이 희희낙락 즐거운 태도들이었다. 아이, 스커트가 참 예뻐요. 한 여자가 현의 몸 위로 담요를 덮을 때, 한 여자는 단추를 눌러 현이 누운 침대를 자동차 정비공장의 작업대 마냥 위로 올렸고, 다른 여자는 침대의 구멍 속으로 현의 오른쪽 유방을 끌어냈다. 마치 고장난 자동차 같군요. 현이 가까스로 꺼낸 농담에 여자들은 또 호호 깔깔 웃으면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런 말들 많이 해요, 하고 대답했다. 한쪽 유방을 잡힌 채로 현은 불편하기 짝이 없는 자세로 엎드려 있었는데, 침대 밑으로 양동이 같은 것이 놓여지고 기계들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들이 번갈아 괜찮으냐, 괜찮으냐 묻기는 했어도, 현은 이제 고장난 젖소가 된 기분이었다. 맙소사, 자주색 꽃무늬 치마에 분홍 망토를 두른 젖소라니. 현은 자신이 졸지에 버터나 우유상자에 그려진 우스꽝스런 상표가 된 것만 같았다.
가운을 입은 목장의 여자들이 현의 침대 밑에 모여 앉아 현의 가슴을 주무르고 찌르며 작업에 몰두해 있는 동안 현은 딱딱한 침대에 얼굴이 짓눌린 채로 가물가물한 기억을 따라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아마 사촌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을 것이다. 바로 전날 같이 놀았던 사촌이 아프다더니 며칠 후에는 죽었다고 했으므로 현은 사람이 죽는다는 새롭고 엄청난 사실 앞에 몹시 어리둥절해 있었다. 한동안 어른들의 침통한 분위기에 억눌려 있던 호기심이 고개를 들면서 현은 눈앞에 보이는 어른들 모두에게 죽음에 대해 묻는 이상한 아이가 되어 있었다.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흙 속에 누워 있으면 답답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죽은 사람에게는 상관이 없다고 했다. 죽은 사람은 같이 놀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다시 만날 수도 없다고 했다. 하지만, 지난가을에 사촌과 함께 땅 속에 묻었던 유리구슬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말간 눈을 뜨고 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죽은 사람에게 전화는 할 수 있느냐니까, 행여 현이 사촌 집에 전화를 걸까봐 집안식구들이 모두 질색을 하며 말렸다. 죽은 사람은 말을 할 수가 없다고, 그냥 자는 거라고 했다. 그래도 현은 달아나려는 어른들을 줄기차게 따라다니며 묻고 또 물었다. 죽으면 입이 없어지는가. 어떻게 없어지는가. 밥도 먹지 않는가. 배가 고프지 않은가. 그러면 사촌은 젯밥도 먹지 않을 것인가. 언제 깨어나는가. 꿈도 꾸지 않는가. 누군가는 죽는 것은 하느님의 부름을 받아 천국에 가서 천사들과 사는 것이라고 했지만, 땅에 묻힌 사촌이 하늘나라에 있다니, 하느님도, 천국도, 천사도, 현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라 궁금증과 혼란만 더할 뿐이었다. 갑자기 사촌이 사라져버린 죽음의 세계, 삶과 죽음, 산 사람과 죽은 사람 사이의 경계선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는 것인지, 현은 말로 되어지지도 않는 의문들을 뒤죽박죽 가슴에 품고 숨이 턱에 차도록 헐레벌떡, 진저리를 치며 달아나는 어머니를 따라다녔다.
그렇게 따라 다니는 어린 현의 모습은 어느 새 현의 아들이 되어 있었다. 아, 내가 죽으면 누가 그 고역을 치를 것인가. 남편이 그걸 감당할 수 있을까. 응, 하나 있었는데 죽었어, 하고 말하는 사람이?
어린 현의 죽음탐구는 견디다 못한 어머니의 갑작스런 폭발로 끝나고 말았다. 그날도 아침부터 시작된 현의 질문공세에, 부엌을 들락거리며 늦잠 자는 자식들을 깨우랴, 도시락을 싸랴, 아침상을 보랴, 몸이 열이라도 모자라게 바쁘던 아머니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던 기억은 생생한데, 구체적으로 어떤 말이 오갔던 것인지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쨌건 현의 죽음의 세계를 향해 끝없이 샘솟는 질문의 흐름을 일격에 꺾어 누를 만큼 강력했던 것만은 확실했다.
그게 무엇이었던가. 저만치 달아나는 어머니의 치마꼬리를 따라, 어린 현과, 어린 아들의 종종걸음을 따라, 가물가물 부연 기억의 회로를 헤매는데 목장의 여자 하나가 현이 덮고 있던 담요를 벗겨냈다. 일어나세요. 다 끝났어요. 갑자기 밀려든 한기에 떨며 뻣뻣한 몸을 일으키는데, 다른 여자 하나가 현을 부축하며 재빨리 분홍 망토를 내려 거즈와 반창고가 붙은 가슴을 가려주었다. 잘 참으셨어요. 불편했을 텐데 꼼짝도 않으시고. 현이 갑자기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눈만 껌뻑거리며 말이 없자 여자는 변명하듯 덧붙였다. 타겟 부위가 깊어서 좀 힘들었거든요. 현은 그래도 뭔가 미진한 마음에 아직 그대로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는데, 여자들은 벼르던 김장을 이제야 끝냈다는 듯이 현은 쳐다보지도 않고 웃고 떠들며 각자 시원시원 물건들을 챙기고 작업한 자리를 치우고 있었다. 저어...... 현은 겨우 목구멍에 굴러다니던 낱말들을 맞추고, 현의 가슴에 구멍을 내고 반창고를 붙인 여자의 눈길을 찾아 힘겨운 말을 내밀었다. 그 조그만 새...... 새요? 아니, 금속조각, 그것도 넣었나요? 물론이죠. 여자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여자들은 다음 김장 때 만나자는 듯이 호호 깔깔 웃으며 뿔뿔이 흩어져 사라졌다.

한쪽 가슴에 반창고를 붙이고 돌아온 뒤 현은 죽은 듯이 며칠을 보냈다. 눈앞에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고, 자신도 몸을 움직여 아이와 남편에게 밥상을 차려주고 함께 밥을 먹으면서도 현은 자신과 그들의 세계가 같지 않다고 느꼈다. 내가 몇 번이나 더 이렇게 상을 차릴 수가 있을까. 때로는 자신이 지금 바로 제 제사상의 젯밥을 먹고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옷 속에 가려져 보이지는 않아도 제 가슴에 붙인 반창고가 바로 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징표 같았고, 반창고 밑, 구멍 속에 담긴 금속 새가 언제라도 날개를 퍼덕이며 일어나 현이 모르는 세상으로 현을 데려갈 것만 같았다.
타겟 부위가 깊다니 뼈와 폐에 가깝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엔 폐 사진을 찍고, 조직검사를 하고...... 현은 자신의 몸을 우악스레 움켜잡고 무성히 뻗어나가는 바오밥나무를 하루에도 수백 번씩 보았다. 그리고 그 가지 끝의 새까만 허공과 그 밑에서 제 몸과 존재가 시들고 구겨지며 스러져 가는 모습도. 암세포가 척추로 가면 몸을 움직일 수가 없게 되고, 폐로 가면 숨쉬기가 힘들어지고, 마침내 뇌에 이르면 정신이 흐려질 것이다. 아예 아무 것도 느낄 수도 생각할 수도 없으면 좋으련만. 신장에서 시작된 할머니의 암세포는 이미 손쓸 수도 없이 온몸으로 퍼져 있었지만,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사흘 전까지도 진통제를 요구할 만큼의 의식이 살아 있었다. 그런데 그 고역을 이제 자신이 치러야 한다고 생각하니, 울컥 할머니 몫까지 억울한 생각이 치솟았다. 게다가 그렇게 일그러지고 무너진, 온몸이 썩어들어가는 제 모습을 아이에게 보이고 기억에 남겨야 한다고 생각하니 현은 견딜 수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맞아요, 할머니.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어차피 질 수 밖에 없는 싸움이라면, 자신은 물론 주위 사람들까지 대가없는 고통에 지치게 할 게 아니라 일찌감치 나 스스로 결단을 내는 게 옳지 않을까. 쓸 데 없는 수술에, 고통스럽기만 한 치료에...... 내가 그렇게 끔찍하고 지겹게 앓다 죽으면, 건강보험을 쓴다해도 재산은 또 얼마나 축날 것인가. 내가 죽어 생명보험이 나온다 해도...... 현은 생명보험 보상금 액수와 크레딧카드 빚, 주택융자금, 매년 천장부지로 오르는 아이의 장래 대학등록금, 그리고 앞으로 병치레에 들어갈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를 비교해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생명보험이나 큰 걸 들어둘 걸. 후회막급이지만, 이제 와서는 어쩔 수 없는 일. 역시 자신이 결단을 내는 게 최선이지 싶었다.
그렇지만 내 아이는 저렇게 어리고, 정신적인 탯줄은 아직도 짧기만 한데. 내가 죽으면 저 남자가 아이 밥이나 제 때 차려줄까. 무슨 일에 열중하면 종종 코앞에 차려놓은 식사도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이 숙제는 제대로 봐줄까. 철 따라 옷은 챙겨 입힐까. 나 없는 아이 생일은 어떻게 보낼까. 현은 추운 겨울 날 꾀죄죄 구겨진 반바지 밑으로 벌겋게 살갗 터진 종아리를 내놓고 배고프고 시무룩한 표정으로 책가방을 질질 끌고 가는 아이의 모습이 눈앞에 보여 진저리를 치며 주먹을 쥐었다.
노쇠한 할머니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셨지만, 나는...... 나는 아직 젊으니까. 그깟 가슴 하나쯤 떼어내면 어떠랴. 아마존의 여전사들은 멀쩡한 가슴도 떼어내고 살았다는데. 가슴 하나 떼어내고, 프랑켄슈타인 같은 모습으로라도 아이와 함께 지낼 수만 있다면...... 그러자 현은 자신이 호랑이에게 팥죽도 주고 팔도, 다리도, 하나씩 떼어주었다는 옛날 얘기 속의 아낙이 되어 팔도 다리도 몸통도 없이 생각만 남은 귀신이 되도록 어두운 산골을 홀로 걷고 있는 것만 같았고, 한편으로는 호랑이 앞에서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물러서지 않는, 떼어낸 가슴에 피묻은 붕대와 짐승가죽을 두른 여전사가 되어 수풀 우거진 정글을 헐떡이며 가고 있는 것도 같았다. 어쨌거나 현이 가고 있는 길은 죽도록 외롭고 어두웠으므로 현의 몸은 수시로 활처럼 구부러져 울음을 쏟았다.
그 골짝에서 바라보니 아이와 남편의 눈길은 멀기만 했다. 남편은 잘못 건드리면 어떤 히스테리가 터져 나올지 겁이나 일부러 현과 눈 마주치기를 피하는 것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남편이 자신의 눈 속에서 죽음을 보아버릴까 봐, 그런 남편의 눈동자를 마주보게 될까봐, 현 스스로 남편과 마주치는 일을 피하고 있었다. 그래도 현은 남편의 눈길이 아쉬웠다. 그가 â점쟁이 눈ä으로 현을 바라보며 â넌 괜찮아ä하고 한 마디만 해줄 수 있다면. 그게 아니라도 그녀를 바라보아 주기라도 한다면. 하지만 설사 아이와 남편의 눈을 마주 본다고 해도 그들이 이미 다른 세상 사람인 현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누가 이 어두운 골짝의 나를 알아보랴. 아무리 â시리가 응치고 응치가 시리다ä를 수십 번 읊어도 뼛속까지 시린 외로움을 알아보랴. 누가 그 춥고 외롭고 어두운 골짝을 들여다보고 싶으랴.

검사결과는 일주일 이내에 주치의에게 전달된다고 했으니 7월 7일이면 충분했지만, 마침 7월 4일 미국독립기념일 연휴가 끼는 바람에 결국 현의 생일인 7월 8일이나 그 이후까지 기다려야 하게 되고 말았다. 덕분에 현의 남편은 말없이 눈치만 살피고 있었고, 현은 제 생일마저도 축하는커녕 이 세상의 모든 죽어 가는 사람들과 어두운 골짝을 방황하는 외로운 귀신들을 대표하여 통곡하고 또 통곡하는 심정으로 힘겹게 보내고 말았다.
현은 낮에도 수시로 잠에 빠져들었고, 밤에도 수시로 깨어났다. 잠을 자면 어느 새 좁고 어두운 골짝을 걸어가고 있었다. 골짝에는 이 세상의 빛 같지 않은 희미하고 푸른빛이 드문드문 봄밤에 보던 신기 어린 백목련 꽃송이들처럼 모습을 드러냈고, 그 빛에 언뜻언뜻 앞서가는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누굴까. 어깨주름이 많이 잡힌 허연 옷을 입었고, 잘 보이지는 않지만 한 손에는 리라를 들었다. 아, 오르페우스. 돌아보지 말아요, 제발, 제발. 현은 앞서 걷는 그리스 의상의 남편과 자신 사이의 거리가 바로 그가 고개를 돌리지 않도록 신이 처방한 생명의 거리라고 굳게 믿었으므로, 그와의 보조를 한치 틀림없이 맞추느라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서 깨어났다. 그리고 다시 잠이 들면 중절모를 쓰고 두루마기를 휘날리며 걸어가는 아저씨의 뒷모습. 아저씨, 아저씨, 응치가 시리고 시리가...... 현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아저씨가 반가워서 아는 척을 하려고 했지만, 아저씨는 앞만 보고 중얼중얼 푸른 어둠의 터널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현은 다시 한쪽 가슴을 움켜쥐고 어둠 속을 걸어갔다. 가면서 다음엔 호랑이에게 무엇을 떼어 주어야 하나 생각했고, 가면서 팔과 다리와 몸통을 잃어, 현은 어느 새 구르는 듯 흐르는 듯 가고 있었다. 싸웠어야 하는데, 끝까지 싸웠어야 하는데...... 이제는 보이지도 않는 가슴을 움켜잡고 한탄하는데, 저만치 하얀 한복을 차려입은 할머니가 보였다. 다가가 살펴보니 할머니는 한 손으로는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목련 꽃송이를 흩으려 뿌리고 있다. 어둠 속에 흩어지는 꽃잎이 언뜻언뜻 호랑이의 안광처럼 번쩍거렸다. 할머니, 할머니 일어나셨네, 이제 안 아프세요? 현이 깊이 잠긴 목소리를 억지로 끌어내어 할머니를 부르는데, 할머니는 손을 잡은 아이를 바라보고 빙긋이 웃으셨다. 아이는 어려 죽은 현의 사촌이었다가, 현이 되어 몇 걸음을 옮기더니, 어느 새 현의 아들 모습이 되어 종알대며 할머니 손을 잡고 가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아가, 아가, 아가!
현은 땀에 젖어 도리질을 하며 깨어나 두리번거렸다. 집안은 구석구석까지 여름 한낮의 햇빛으로 가득 차 있었고, 저만치 현의 아이가 오래된 그림처럼 앉아 혼자 무어라 종알대며 놀고 있었다. 이게 현실인가, 아직은 이게 내 자리, 내 몸인가. 현은 축축한 손으로 제 가슴을 더듬었다. 얇은 여름옷 밑으로 반창고 붙인 봉긋한 가슴이 잡혔다. 반창고 밑에는 작은 구멍, 그리고 그 구멍 속에는 작은 새. 한숨이 새어나왔다. 손에 잡힌 가슴의 부피만큼은 아직 이게 현실이라고, 진짜라고, 제 것이라고 믿어도 좋을 것 같았다.
전화벨 소리에 흠칫 놀라 몸을 일으키다가 현은 흐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열려진 창으로 옆집 일본여자가 모시모시 전화 받는 소리가 꿈처럼 아득히 들려왔다. 옛날 소련 사람들, 가장 행복한 순간이 새벽에 찾아온 KGB 요원에게 우리 집이 아리라 옆집이라고 말할 때라던가. 어제로 현의 생일도 지났으니 조직검사 결과는 이미 나왔을 테지만, 주치의에게서는 아직 소식이 없었고, 현 역시 집안의 전화기들을 본 척 못 본 척 지나만 다닐 뿐 전화 걸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리가또, 아리가또. 모이를 쪼는 새처럼 고개를 까닥거리고 있을 옆집 여자를 상상하며 현은 다시 잠이 들었다.
기모노를 입은 여자들이 종종걸음으로 좁은 골목을 가고 있었다. 호호 깔깔, 웃음소리,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려오고, 집집마다 담 너머로 고개를 내민 장대 끝에 오색종이가 붙어 팔락이고 있었다. 종이에는 â응치ä, â시리ä, 그런 말도 쓰여있고, 캥거루, 사슴, 하마, 젖소 같은 동물 그림도 한두 획의 붓질로 휘갈기듯 그려져 있었는데, 가만히 살펴보면 집집마다 같은 새 그림이 걸려 있었다. 날개를 활짝 펼친 새. 새 그림을 따라 걷다 보니, 골목 끝에 한복 입고 허리띠를 질끈 동여맨 여자 뒷모습이 보였다. 아, 어머니, 엄마, 엄마, 부르며 어린 현은 헐레벌떡 꼬불꼬불한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엄마, 엄마, 엄마는 내가 안 보여? 어머니는 뭐가 그리 바쁜지 대꾸도 없이 앞으로, 앞으로만 재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엄마, 내가 죽어서 이젠 안 보이나? 엄마, 내가 죽었어? 죽었으면...... 엄마, 죽은 사람에게는 산 사람이 안 보여? 죽은 사람은? 보여, 안 보여? 그 순간이었다. 불현듯 어머니가 걸음을 딱 멈추고 돌아서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죽어 봤니? 내가 그걸 어떻게 아니?
현은 깜짝 놀라서 잠이 깼다.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나올 듯 쿵쿵대며 날뛰는 심장을 누르다가 현은 저도 모르게 히히 웃고 말았다. 아, 그거였구나. 어머니의 충격요법. 사촌이 죽고 난 뒤, 죽음의 세계라는 두려운 수수께끼에 매달려 엄마 뒤꽁무니만 좇아 다니던 어린 현에게 일격을 가했던 말. 더없이 정직한 그 대답 앞에 어린 현도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났다. 아, 그렇지. 그건 이 세상의 누구도 다녀오지 못한, 그래서 아무도 얘기해 줄 수 없는 세상이지. 그것은 혼란스런 꿈을 꾸다 죽비를 얻어맞은 듯한 깨달음이었고, 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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