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어사전-2

2006.10.11 06:04

김혜령 조회 수:611 추천:132

2. 수지의 말
이상한 새였다. 아득히 먼 곳에서 부우, 부, 부, 부연 안개를 뿜어내며 우는 듯 하다가는 어느 새 귓가에서 웅웅 울고, 다음 순간엔 차가운 부리로 가슴을 헤집다가, 안아주려고 손을 뻗치면 다시 먼 곳에서 부우, 부, 부, 안개를 뿜어내고 있었다. 내 가슴에 구멍이 났나? 나는 새를 놓칠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게 잡히지 않는 새와 함께 안개와 구멍난 가슴속으로 몇 번이나 번갈아 자맥질을 했던가. 눈을 떴을 때 나는 내가 아주 깊은 물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유리창에는 새파란 하늘이 금방이라도 창을 무너뜨리고 밀려들어올 듯 몸을 비비고 있었고, 낯선 방안에는 시간이 멈춘 듯한 침묵이 무겁게 고여 있었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책이며 벗어 놓은 옷가지들, 음식이 말라붙은 접시, 오렌지와 바나나 껍질...... 이 난파선의 이름이 무엇이었더라. 나는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옆구리를 파고드는 가는 손가락이 느껴졌다. 연지. 곤히 잠든 동생의 입김이 등허리에 묻어 있었다. 촉촉하고 따뜻한...... 갓 구워낸 빵 같이 부드러운...... 갑자기 거센 허기가 몸 속을 훑고 지나갔다. 그건 아직 구체적인 식욕과는 연결되지 않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연하고 부드럽고 따뜻한 것들에 대한, 그것들을 박탈당해본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막연하고 맹렬한 그리움이었다.
그래, 내가 연지에게 왔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기억은 까마득하지만,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유일한 부표인 양, '연지' 라는 한 존재에 시선을 박고, 놓칠까 사라질까 눈 한번 깜빡거려보지 못하고, 내가 왔지. 질긴 해초처럼 몸을 감는 피로와 싸우며, 때로는 집채만한 자포자기의 파도에 수없이 잠기며......
바람이 지나는지 유리창에 걸린 푸른빛이 잠시 흔들렸다. 돌아눕는 연지에게서 시큼하고 역한 냄새가 났다. 연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토사물로 보이는 누런 찌꺼기가 말라붙어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가 이렇게 잠을 잔 걸까.
어린 시절에 연지는 곧잘 나를 꼬드겨 이불더미 속에서, 또는 상자처럼 사방으로 벽을 쌓은 방석들 틈에서 위로는 뚜껑까지 닫고, 그렇게 잠을 자곤 했다. 누가 먼저 그랬는지 몰라도 우린 그걸 타임캡슐이라고 불렀다. 창틀에서 말라죽은 나비를 나무그늘에 묻은 날도, 녹슨 칼날이나 깨진 유리구슬을 묻은 날도 우리는 캡슐 속에서 잠을 잤다. 그땐 왜 그리도 땅속에 고이고이 묻고 싶은 것이 많았는지. 왜 그렇게 숨죽여 꼭꼭 숨었으며, 그렇게 부둥켜안고 잠을 잤는지. 시간을 정지시키고, 무엇을 꿈꾸었던 것인지.

우리가 헤어졌을 때 나는 대학교, 연지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그날 이민가방을 싸들고 비행장에 나갈 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함께였다. 택시 안에서 연지는 나에게 화장할 줄 아느냐고 물었고, 관심 없다는 내 말에 통통한 입술을 삐죽거렸다. 미국서는 고등학생들도 화장한다는데. 연지는 아침나절 공들여 지져 붙인 앞머리를 조심스레 더듬어 보고 있었다.
또 저놈의 데모. 시도 때도 없이 화염병 들고 뎀벼드는 저것들이 학생이여, 깡패여? 최루탄에 잠겨 꼼짝 않는 네거리 한복판에서 택시기사가 분통을 터뜨렸다. 논 팔고 소 팔아서 학교 보내줬더니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꼭꼭 닫은 창 틈 어디론가 최루가스와 함께 울부짖는 듯한 노랫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토옹일...... 사람의 파도가 한 겹 두 겹 밀려오고 있었다. 호루라기 소리가 부연 시야를 날카롭게 갈랐고, 곧이어 후닥닥 달려가는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 텅, 소리가 나도록 차체에 몸을 부딪쳤다. 아니, 저런...... 어떤 놈의 새끼야? 기사는 창문도 열어보지 못하면서 차안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만 질렀다.
나는 사라진 발자국 소리를 따라 어느 골목을 생각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그 어느 봄날이었던가 휑하니 열려진 교문을 나서서 그냥 자꾸만 걸어갔던 적이 있었다. 그날도 시내의 큰 거리들은 바람에 날리는 벚꽃잎과 최루가스와 노랫소리, 호루라기 소리로 가득했다. 그 노출이 심한 사진처럼 한없이 밝았던 봄날, 그래서 거리에 선 채로 턱까지 차 오른 햇빛을 게워버리고 싶었던 날, 어디선가 성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문득 달려든 땀냄새가 숨통을 막았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충혈된 눈으로 헐떡이며 다가와 불쑥 손을 내밀었고, 그 손을 얼결에 맞잡은 다음 순간 나는 사람들의 물결 속에서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니 이유도 모르는 채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일 게다. 그날밤 잠자리에서 시작된 경도는 한 달이 지나도록 계속되었다. 그 동안 나는 핏기 없는 얼굴로 목적지도 없이, 무엇을 찾는지도 모르는 채 거리를 쏘다녔고, 푹 젖은 생리대를 바꿀 때마다 내 몸이 쉬지 않고 쏟아내는 이것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내 안에 있는 모든 약하고 비리도록 여린 것들, 날아가는 꽃잎처럼 몽롱한 꿈이며 그때까지 나라는 사람을 이루었던 막연한 기억들이 한꺼번에 내 밖으로 쏟아져 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가까스로 도착한 비행장에서 택시기사는 짐을 내려주며 말했다. 아가씨들 어디 좋은 나라로 가는 모양인데 가거든 잘 살아요. 뒤돌아 볼 것 하나 없어. 에이, 이 놈의 나라. 그는 때묻은 수건을 돌려 땀에 젖은 목덜미를 닦더니 길바닥에 코를 힝 풀고 가버렸다.
짐을 부치려고 서두르는 연지의 손을 잡았을 때도, 난 여기 남아야겠다고 말했을 때도, 연지는 빤히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눈에 눈물이 고이는 순간, 연지는 가슴에 새기듯 또렷한 발음으로 말했다. 그래, 참 잘났다. 나쁜 년! 돌아서는 연지의 눈가에 서툴게 바른 마스카라가 멍처럼 꺼멓게 번져 있었다. 저만치 연지를 따라 짐 부치는 곳을 나서고, 출국수속을 마치고, 탑승대기실에 앉았다가, 그 애가 혼자 탑승구를 빠져나가는 것까지 지켜보았지만, 연지는 끝내 고개를 들지 않았다. 십 년 전의 일이었다.

연지와 함께 캠퍼스를 걸었다. 윤기 나는 진초록 나뭇잎들 사이로 노랗게 해가 지고 있었다. 대여섯 먹은 여자아이 하나가 달려와 수풀을 헤치고 진분홍색 달걀 하나를 찾아 들더니 까르르, 터진 목걸이의 구슬 같은 웃음을 뿌리며 사라졌다.
부활절 달걀이야. 탑승구를 빠져나갈 때처럼 혼자 저만치 앞서가던 연지가 나를 기다리고 섰다가 말했다. 그래에. 나는 엉거주춤 들릴 듯 말 듯 어색한 대답을 했다. 연지는 곧 다시 돌아서 걸어갔지만 나는 기다려준 연지가, 말을 걸어준 연지가, 아니 그냥 연지가 고마워서 목이 메었다. 석양에 금빛으로 물들어 잔바람에 보스스 떨고 있는 연지의 성글고 짧은 머리카락 밑으로 가느다란 목 위에 얹힌 동그란 머리통이 들여다보였다.
돌토라니. 어머니는 늘 혼자 골몰해 있는 연지를 그렇게 불렀다. 그 말을 몰랐던들 내가 너를 떠나보낼 수 있었을까. 토란. 땅의 알. 돌토란. 돌멩이처럼 단단한? 사전에도 없는 그 말속에서 나는 언제나 홀로 당당한 연지에 대한 어머니의 연민과 자부심을 느끼곤 했었다. 아니 그건 어머니의 어쩔 수 없는 바램이었는지도 모른다.
의사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머니가 죽을 결심으로 낳았던 연지 밑의 남동생은 돌을 못 채우고 죽었다. 선천적으로 심장이 약한 아이였다. 늘 입술이 보라색이었던 그 아이가 파랗게 질려서 죽는 걸 본지 한 달이 못 되어서 연지가 심하게 앓았다. 어머니의 무리한 임신과 출산, 그리고 아기의 병치레에 정신이 팔려 연지의 예방접종을 제때 못한 건 사실이지만, 하필이면 이젠 흔치도 않은 소아마비에 덜컥 걸려 다리를 절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 못한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연지는 확실히 운이 나빴다. 그러나 돌아가시는 날까지 연지에 대한 죄의 무게를 한줌도 덜지 못하고 말없이 괴로워했던 걸 생각하면 어머니의 운이 연지보다 더 나빴다고 해야 할 지 모른다.

서녘하늘에 노을이 화염처럼 뻘겋게 번질 때쯤 연지는 저녁을 먹자며 나를 불자동차 마냥 새빨간 자동차에 태우고 시내로 나갔다. 겨울이 아니면 비도 별로 오지 않는 곳이라고 들었는데 창밖에 보이는 나무며 잔디에는 푸른 윤기가 잘잘 흘렀다.
아버지는 요즘 어떠시니? ...... 아버지는 어떻게 지내시냐니까. 연지가 너무 오랫동안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도 들지 않아서 나는 조금 큰 소리로 다시 물었다. 글쎄. 연지는 상에 가득 놓인 음식만 열심히 먹을 뿐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며칠 굶은 건 나였는데도 식욕은 연지 몫이었는지, 지난밤에 그렇게도 토하던 아이가 이 아이가 맞나 싶게 왕성한 식욕이었다. 연지야. ...... 연지야. ...... 연지...... 응. 마지못한 듯 잠시 고개를 들었지만 통 시선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 연지와의 대화는 폭포를 거슬러 오르는 것만큼이나 힘들었다. 식사를 끝내고 다시 자동차에 탈 때, 대답을 듣지 못한 내 말들이 끝내 폭포를 거슬러 오르지 못한 한 떼의 은어처럼 배를 뒤집고 나뒹굴 때에야 연지가 불쑥 입을 열었다. 궁금하면 언니가 내일 아침에 전화해봐. 내일 아침? 응. 월요일 아침에는 혼자 계시거든. 그래에. 나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것을 구걸하는 사람의 비참한 심정으로 풀이 죽어 대답했다. 연지가 아버지에 대해 대답하기 싫어하고 말을 아끼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가 죽은 듯 잠자던 낮 동안 야자수는 이파리 가득가득 햇빛을 모아두었던 것일까. 이제 하늘에 노을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데, 야자수들은 바람이 지날 때마다 푸르고 넓적한 이파리들을 흔들어 신나게 빛을 뿌리고 있었다.
연지의 학교에 거의 다 왔다고 느낄 때쯤 저만치 허옇고 길게 펄럭이는 강이 보였다. 어마, 연지야, 저건 무슨 강이니? 휘익 바람이 뺨을 스치는 순간 벌떡 몸을 일으키는 강이 보이는 듯했다. 강? 연지는 눈을 돌려보지도 않고 화난 사람처럼 쥐어박듯 빠르게 대답했다. 비닐하우스야. 저마저 다시 속기는 싫다는 듯 단호한 말투였다. 으응, 그렇구나. 강이면 저한테 물 한 모금이라도 길어 달랄까 봐 그러나, 같이 뛰어들잘까 봐 그러나. 한약냄새가 나는데? 한약? 나는 연지가 말도 않고 제것은 물론 내 쪽 창문까지 한꺼번에 올려버리는 바람에 하마터면 턱을 다칠 뻔했다.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내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연지가 씹어뱉듯 말했다. 아니, 그냥 셀러리야.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창문 틈에 낀 바람이 잉잉 신음소리를 냈다.

연지와 나는 다시 한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일인용 침대라 작았지만 연지도 나도 마른 편이라 그런 대로 누울 만 했다. 연지야. ...... 연지야. ...... 응. 연지야, 괜찮니? 연지가 저녁 식사 후에 또 한차례 토하고 난 뒤라 나는 걱정이 되어 물었다. 괜찮아. 내가 또 과식했나 보지, 뭐. 연지는 별 것 아닌 듯 말하더니 돌아누워 버렸다. 가로등 빛이 블라인드 사이로 길게 들어와 담요 위에 빗살무늬를 만들었다. 자주 그러니? '또'라는 연지의 말이 걸려 조심스레 물었지만 담요 속에 얼굴을 파묻은 연지에게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래, 연지야. 잘 자. 새 그림자가 푸드득 빗살무늬를 헤치며 날아갔다. 어디를 헤매다 이 밤까지 깨어있었는지 몰라도, 함께 가던 길동무를 잃은 듯 문득 가슴이 철렁하도록 서운했다. 연지야. ...... 연지야, 미안하다. ...... 연지의 고른 숨소리가 잠시 멎는 듯 했다. 한참만에 잠이 든 줄 알았던 연지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 주엔 여기 학생들이 돌아와. 그래, 오래는 못 있겠구나.

수, 수지...... 수지 맞냐?
죽었던 딸이 돌아오기라도 한 듯 아버지는 몹시 말씀을 더듬으셨다. 수화기를 잡은 채 떨고 있는 아버지의 손이 보이는 듯 했다. 어쩌면 손등이 하얗게 되도록 수화기를 부여잡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건 단순한 반가움만이 아니라 일종의 공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풋, 하고 김빠진 웃음이 새어나왔다. 제 뜻이 제일이라고 나 몰라라 돌아설 땐 언제고, 뜻도 용기도 살길마저도 꺾여버린 이제는 피붙이라고 날 좀 보소, 찾아와서 하던 일 다 팽개치고 버선발로 뛰어나와 반겨주기까지 바라는가 싶어 나 자신이 우습기도 했다.
그런데 잠시 후에 이어진 아버지의 말씀은 더욱 일품이었다. 난 잘 있으니 걱정 말아라. 누가 뭐랬나? 결국 아버지도 나도 각자 상대방이 자신들만 애틋하게 걱정하고 있으리라 믿고 바라며 지난 십 몇 년을 살아온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연지에게 아버지의 안부를 물었던 내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듯 했다. 아버지 안부가 궁금했던 게 아니었겠지. 내 걱정을 해달라고, 날 좀 봐달라고 애걸하고 싶었던 거겠지. 적어도 아버지가 날 곁눈질로라도 쳐다봐 줄 수 있는지를 알고 싶었던 거겠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느라고 눈물을 찔끔거리며 이를 악물고 있는데, 전화기 저편에서 문이 열리고 닫히는 듯한 소음이 들리는 듯 하더니 아버지 말씀이 갑자기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 그, 그래, 그래, 너, 너희들도 잘 있거라. 나중에 또, 또, 또 통화하자. 쫓기듯 끊어진 수화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려니 연지가 지나가며 피식 웃었다. 오늘도 잘 지내신다지? 그럼 됐지, 뭐. 그래, 그럼 된 거지, 된 것이고 말고. 이 돌토라니야.

연지와 함께 거리를 쏘다닌다. 벌판을 지날 때면 비닐로 만든 부연 강이 저만치 펄럭이고, 열린 창으로 한약 냄새가 흘러든다. 그리고 가끔은 사십 나이에 폭삭 늙어버렸던 어머니의 성긴 백발이 그 속에 흩날리며 끼어 들기도 한다. 멍하니 창 밖을 보고 있는 내가 못마땅해진 연지가 내 코나 턱이 걸릴 만큼 야멸차게 창문을 올릴 때쯤이면, 힘겹게 한약 한 사발을 다 비우신 어머니가 뼈만 남은 손등으로 입술을 훔친다. 아무리 닦고 문질러도 어머니의 입술은 거무죽죽, 핏기가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손등에는 한약만이 아닌,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저 세상의 그림자처럼 번져 있다.
여긴 강물 따위는 꿈도 꿀 수 없는 사막이고, 저건 셀러리라니까. 한약이 아니라니까. 굳은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연지는 꾹 다문 입 속으로 그렇게 외치고 있을 것이다. 미안하다, 연지야. 나는 더러는 들리게, 더러는 들리지 않게 중얼거려 본다. 나는 모든 것이 미안하다. 연지를 혼자 보낸 것이, 연지를 불쑥 찾아온 것이, 연지의 귀한 시간을 빼앗으며 곳곳을 쏘다니게 만드는 것이, 비닐하우스를 강이라 하고 셀러리를 한약이라 한 것이. 그리고 때때로 연지가 화를 벌컥 내며 '그 미안하다는 말 좀 그만 둬!'라고 말하게 하는 것까지 모두 모두 미안할 뿐이다.

내가 서울의 유학원을 통해 황급히 입학허가를 받아온 언어학교는 연지의 기숙사에서 두 시간이나 떨어져 있었다. 그나마 교통체증 없이 씽씽 달릴 수 있을 때 얘기지, 길이 막히면 서너 시간은 좋이 걸리는 거리라고 연지가 투덜댔다. 입학원서를 낼 때 몇 번이나 연지의 학교와 도시 이름을 대며 근접한 곳으로 찾아줄 것을 신신당부했지만, 유학원 직원은 싫으면 그만두라는 맨송맨송한 얼굴이었다. 어차피 오래 다닐 것도 아니지 않느냐는 성가신 표정이기도 했다. 하긴 그가 벽에 걸린 지도를 짚으며 말할 때 그 거리는 손톱만큼도 안 되어 보이긴 했다.
그 손톱만큼의 거리 속에 저승까지라도 닿겠다는 듯 끝없이 긴 화물기차가 덜커덕거리며 지나갔고, 볼품 사납도록 벌겋게 벌거벗은 민둥산들이 우악스런 근육을 자랑하듯 울퉁불퉁 솟아 있었으며, 가시 돋친 선인장들이 몸을 비틀고 서 있었고, 그 선인장 사이를 씨암탉 만한 까마귀들이 악악 소리를 지르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 까마귀들마저 별로 보이지 않는, 아무리 눈을 질끈 감아도 강 같은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메마른 사막이 나왔다. 군데군데 모닥불이 번지듯 피어 있는 야생 양귀비들의 선명한 오렌지 색깔이 시선을 찔렀다. 풍차가 한 떼의 새들처럼 모여 서서 하얀 날개를 돌리는 모래언덕을 수없이 지나,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건 사람 사는 현실 속이 아니지, 싶은 생각이 들 때쯤에야 저만치 머리를 흔드는 야자수 몇 그루와 함께 내가 다닐 학교가 있는 신흥소도시가 나타났다.
유학원에 내게 남은 돈의 절반 이상을 털어 주고 받아낸 입학허가서와 여권을 내보이고, 또 이런 저런 서류에 글씨 연습이라도 하듯 거듭거듭 서명을 한 다음, 나는 이수지가 아닌 쑤우지 리가 되었다.
학교에서 나와 자동차로 십 분이면 족히 횡단하고도 남지 싶은 도시의 주도로에 들어서자마자, 저만치 '냉면개시'라고 휘갈겨 쓴 한글이 보인다. 맥도널드 주차장으로 들어서려던 차를 돌리며 연지가 흐흐 웃는다. 언니는 그래도 김치 먹고 싶지? 나는 속이 메슥거려 햄버거도 김치도 먹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었지만, 말하기가 귀찮아져서 그냥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튼 조선민족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씹어뱉듯 하는 연지의 말끝에 문득 공장에서 함께 일하던 조선족 아줌마들 얼굴이 떠오른다. 다들 어떻게 됐을까. 그들은 윤동주가 별과 함께 불러보았듯 패, 경, 옥, 그런 이국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가. 허옇게 지워져버린 기억 속에서 이름들은 생각나지 않았지만 그녀들의 이름이 무엇이라 해도 가난한 이름들이었던 건 확실했다. 나는 온종일 윙윙 미싱을 돌리고 실밥을 뽑아내는 그들의 푸른 작업복 명패에 가만히 '쑤우지 리'를 붙여본다. 그러나 곧 고개를 젓는다. 쑤우지 리는 죄 없이 죽은 짐승, 아니 어쩌면 가난한 경제식민국 인민의 기름이 지글거리는 햄버거를 무자비하게 씹고, 제국주의의 상징인 코카콜라 병나발을 불고 있는 게 더 어울린다. '냉면개시' 집에 들어가 식탁에 앉기도 전에 쑤우지 리는 이미 배가 불쑥하니 불렀다.

식당 게시판에 붙은 광고를 보고 연지와 나는 방을 찾아 나선다. 한국인 노부부가 사는 널찍한 집 마당 한 구석에 본채에 비하면 개집만큼도 안되어 보이는 별채가 비어있다. 잔디 위에 무지개를 세우는 자동물뿌리개의 물줄기 위를 껑충껑충 절뚝절뚝 뛰어 넘어서 별채의 문을 연다. 문을 열면 고꾸라지듯 엎어질 수밖에 없는 거리에 침대가 있고 침대에서 일어나 몸을 틀면 욕실과 화장실, 다시 틀면 부엌이다. 으응, 저 노인네들 은퇴하기 전에 집지기 집이었나 보군. 연지가 문지방에 서서 야릇한 미소를 입술에 물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것도 부엌에서 고개만 살짝 틀면 다 보인다. 그래도 폭신한 침대도 있고, 조리대와 냉장고가 있는 부엌, 양변기와 샤워가 달린 욕실도 있으니, 석유풍로 하나로 부엌을 삼고 몇 세대가 하수구와 바가지 하나로 욕실을 삼던 달동네 그곳에 비하면 얼굴이 화끈거리는 호화주택이었다.

내가 그 집으로 거처를 옮기는 날, 연지는 웬 곱슬머리 남자 하나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내 이삿짐이라 봤자 연지에게 올 때 가져온 중형 트렁크 하나와 그 동안 연지에게 끌려 다니며 산 약간의 속옷과 담요, 서너 개의 식기 정도였고, 남자는 연지보다도 약해 보이는 빈약한 몸매에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어 무슨 도움이 되랴 싶었지만, 연지의 의기양양한 표정을 본 이상은 의문을 제기할 수도 없었다. 이사의 도움을 청하기는커녕 버스 안에서 만나면 일어서서 자리를 권하고 싶은 몰골의 그 사내는 피부색이나 이목구비로 보아 혼혈인지는 몰라도 한국말을 대충은 알아듣는 것 같은데도 연지는 그를 '디'라고 부르며 영어로만 말을 걸었다. 디, 우리 언니야. 디와 내가 도와줘야지, 언닌 아무 것도 모르거든. 게다가 언닌 지금 남편도 애인도 없이 혼자거든. 덧붙인 그 말에 섞인 가시와 비웃음에 숨이 헉 막혀서 나는 연지를 마주 보지도 못하고 부동자세로 잠시 숨을 고라야 했다. 디, 디가 알아서 짐을 옮겨야지 그렇게 멍하니 서 있기만 하면 어떻게 해? 저거 봐, 언니는 무거워서 잘 걷지도 못하잖아. 연지는 그렇게 말하며 내가 번쩍 들어 차에 실으려던 트렁크를 내 손에서 빼앗아 디에게 맡겼다. 얼굴이 벌개진 디가 별로 무겁지도 않은 가방을 휘청거리며 옮기는데, 연지는 입술을 묘하게 일그러뜨리며 한마디 더 했다. 디, 그렇게 느려 가지고는 오늘 밤 집에 못 들어가겠는걸. 연지가 어디 노예시장에 가서 저 남자를 사왔나, 아니면 인신매매단과 내통하나? 괜찮아요, 디. 짐도 별로 없는데 내가 천천히 싣고 연지가 운전하면 돼요. 얼굴이 뜨거워진 내가 황급히 디에게 다가서려는데 연지가 도끼눈을 뜨며 막아섰다. 언니는? 그 부릅뜬 눈이 내 가슴을 내려찍듯 말하고 있었다. 내 먹이에 손대지 마. 네가 내 허기를 아니? 네가 뭘 아니?
정오가 지날 무렵 새 거처에 도착해서도 연지의 성화는 그치지 않았다. 덕분에 디는 휘청거리며 짐을 내려놓은 뒤에도 햄버거와 음료수를 사오고, 건전지와 휴대용 라디오, 손전등 같은 급할 것도 없는 비상용품을 사온 다음에도 연지를 태우고 나가서 장까지 잔뜩 봐와야 했다. 내가 짐을 다 풀어놓고 다시 몇 번이나 하릴없이 이리저리 옮겨놓고도 한참이나 지나서야 돌아온 연지는 봉지, 봉지 잔뜩 사온 물건들을 꺼내며 땀에 젖은 디에게 짧게 말했다. 고마워, 디. 오늘 참 수고가 많네. 땀도 많이 흘렸는데 들어가서 먼저 씻지 그래? 글쎄, 아니, 늦었는데 난 그만 가지 뭐. 우물쭈물 눈치를 보는 듯한 디의 말에 연지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칼날을 내리치듯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소리야? 이렇게 장까지 봐왔는데 집들이 파티를 해야지. 마지못해 샤워를 하고 나온 디를 앉혀 놓고, 연지는 온몸의 피부가 분홍색으로 변하고 어쩌면 비늘도 돋았지 싶을 만큼 장시간 목욕을 한 뒤 산뜻한 새 옷을 차려입고 드라이어로 머리까지 정성 들여 예쁘게 단장하고서야 향수냄새를 풍기며 욕실에서 나왔다. 내가 이렇게 고마운 디를 어떻게 그냥 보내. 그럼 벌받지. 연지는 안절부절못하는 디를 향해 거품이 흐르는 맥주 잔을 들어올리며 목젖이 보이도록 크게 웃었다.
연지는 창 밖이 어두워지고, 벌판 어디선가 코요테 울음소리가 들릴 때쯤 느릿느릿 설거지를 하고, 그릇에 물기 한 점 남지 않게 마른행주질까지 하고 나서야 디를 동반하고 떠났다. 마침내 연지가 살짝 취한 목소리로, 디, 우린 이제 그만 가자, 라고 구원의 선고를 내릴 때까지 나는 디가 오 분이 멀다하고 시계를 보는 것을, 감히 다가서지 못하는 전화기를 안타까이 흘끔거리는 것을, 그리고 연지에게 불려오면서 반지를 뽑아놓은 제 손가락을 불안스러이 더듬거리는 것을 고스란히 보고 있어야 했다. 설사 그가 꾀 많은 토끼처럼 용기를 내어 용왕님, 용왕님, 제 반지, 아니 제 심장은 뽑아서 제 집 앞 바위 위에 널어놓았거든요, 하고 진실을 말한들 통할 연지가 아니니 더욱 안타까울 뿐이었다.

사막의 밤은 깊었다. 안채의 불이 꺼지고 화단에 자동물뿌리개가 한바탕 소란스레 도리질을 하며 돌아가고 난 뒤에도 나는 오랫동안 잠을 못 이루고 뒤척였다. 어둠을 가르는 코요테 울음소리 사이로 부우, 부, 부, 안개를 뿜는 듯한 새소리가 들렸다. 저 새, 어디서부터 나를 따라온 걸까. 새 소리를 들으며 몇 번이나 자맥질하듯 잠 속으로 빠져들었지만, 또 그 소리에 몇 번이나 다시 깨어나 낯선 방을 두리번거려야 했다. 내가 살아오면서 이 방에 들기까지 그렇게도 많은 방을 지나왔던가. 잠 속에서 나는 매번 다른 방에 누워 있었고, 그래서 눈을 뜰 때마다 자리를 잡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떠다니는 의자며 탁자, 창문과 문짝들을 더듬더듬 제 자리를 찾아 끌어내려 놓아야 했다. 그리고 잠이 들면 또다시 울음소리가 들렸다. 코요테와 새소리, 그리고 나뭇잎 서걱대는 바람소리 사이로 꺼억꺽 가슴 바닥을 긁어 올리는 듯한 사람 울음이 들렸다. 연지였다. 아니, 어쩌면 그, 아니 아버지였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면...... 돌아누울 때마다 자꾸만 누군가 등뒤에서 나를 보라고 울고 있었지만 눈을 떠보면 입을 막은 듯, 땅속에 묻어버린 듯, 울음소리는 멀어졌다. 연지야, 그만 나와. 우리, 이젠 그만 캡슐에서 나가자. 아, 이것이 캡슐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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