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소묘

2003.03.28 02:34

김혜령 조회 수:494 추천:39

한 아이가 대문을 연다 힘겹게 버티던 기억의 문짝을 밀치며 왈칵 빛이 쏟아진다 무수한 얼굴들이 무표정한 빛덩이로 떠내려 온다 노출이 심한 필름 속으로 빛을 거슬러 오르며 아이는 두려움과 갈증으로 목줄기가 타오른다

뻐꾹뻐꾹 따옥따옥 누군가 부르고 있다 나뭇잎 속에서 길 끝에서 시간의 시작에서.... 하얀 아이스크림 차가 딩동딩동 늘어진 빛을 끌며 지나간다 삐끔히 열려진 대문 속엔 세월의 이끼를 깔고 한 움큼 서늘한 적요가 고여 있다 아 누군가 누군가 나를 나의 뿌리를 온 힘 온 마음으로 불러 주었으면.... 부서지는 발자국은 희게 탄 가슴에 뜨거운 기다림을 새긴다

터진 입술 사이로 질금 새나간 넋, 얼음과자 위의 빨간 제 핏자국을 아이는 애무하듯 핥고 또 핥는다 달고 비릿한 설움이 혓바닥에 그림자로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어느 꿈이었을까 열린 문 속에서 수 없이 보았던 필름이 되돌아간다 노인은 오늘도 소식 없는 화분에 정성껏 물을 준다 기다림은 영혼에 날아와 박힌 한 점 씨앗 물뿌리개를 기울일 때마다 푸른 사리가 쏟아진다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서 아이는 온종일 먹은 햇빛을 게워낸다 열려진 문 안을 흘끔거리며 희게 바랜 시간이 서러워 혀를 떨며 울먹인다 아이는 어느 새 노인의 얼굴을 하고 있고 노인은 주름살 사이에 아이의 얼굴을 감춘다 뻐꾹뻐꾹 따옥따옥 울음을 삼키며 길은 한 동이 푸른 그늘을 가슴에 붓고 너울너울 어둠의 적요 속으로 되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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