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계연습

2003.03.28 02:46

김혜령 조회 수:462 추천:34

구부러진 골목길 보이지 않는 창안에서
누군가 우울한 반음계를 타고 있다
두 손의 어눌한 합창이
억새풀 휘청이는 붓에 묻어
회색 하늘에 비틀린 산이 솟고 무너진다
보통빠르기로, 조금 느리게, 느리게
왼손은 오른손보다
삼십이분의 일 박자, 십육분의 일 박자....
자꾸만 느려지기에 바람은
둔하고 낮은 음을 질질 끌며 힘겹게
힘겹게 고개를 젓는다

가끔 이 고단한 소리 앞에서
껄껄 웃어 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허기진 속이 다 보이도록
뻐근한 뼈들을 헐겁게 열어 젖히고
음표와 상관없이 하늘을 두드려
깃털을 뿌리듯 음계를 마구 흐트리며
그러면 거꾸로 바로
시간의 줄에 걸리는 별이 있을지
더러는 늘어진 줄 사이를 빠져
아득한 우주로 달아나는 날개도 있을 것이다

하루의 연습이 끝나고
날랜 오른손이 그림자를 버리고 떠난 자리
바람벽에 어둠으로 남은 사람은
느리게, 아주 느리게, 멈춰 선 듯이....
아직도 미진한 음을 찾아
더듬거리는 왼손의 손금에 매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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