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과 접목성: 문학과 시각예술에 나타난 현대 한국계

2003.02.03 01:24

김혜령 조회 수:1039 추천:32

일레인 H. 김 (김 혜령 번역)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2002. 8. 17. 미주한국문학 심포지움

고국과 접목성: 문학과 시각예술에 나타난 현대 한국계 미국인의 표현

대부분의 요즘 작가들과 예술가들은 1970년대 미국에 이민 온 교육받은 도시 중산층 자녀들이다. 그 이전 한국계 미국인들의 문학작품에 관심 있는 분들은 코리아 저널 (Korea Journal) 2001년 가을호에 게재된 필자의 글, 1934년부터 2001년까지의 한국계 미국인의 문학개관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요즘의 한국계 미국인들을 초기 이민사회와 연관시키는 한 가지 요소는 미국의 한국인들과 다른 아시아인들이 함께 경험하는 특별한 인종주의라 할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이들을 미국문화로부터 영원한 거리를 가진 외래 국외자로 취급하는 인종주의는 그 형태는 변했을지라도 내용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도 미국에서 태어난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그들의 유창한 영어에 대해 칭찬을 받고, 언제 모국으로 돌아가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미국에서 수십 년을 살고 일하며 중국계 미국인 자식들을 키워낸 뒤에도, 타이완에서 이민 온 웬호리는 중국본토에 연계된 간첩혐의를 받았고, 지난 해 미국 정찰기가 중국에 억류되었을 때는 미국 라디오 토크쇼의 사회자가 중국계 미국인들의 식당을 보이콧할 것을 요구했다.
한국계 미국인들은 어떻게 사회적으로 인식되는가. 아시아계 미국인 2세나 1.5세들은 종종 "문화적 다리", 또는 "두 세계 사이의 다리", "여기"와 "저기" 사이, 미국과 아시아 사이, 서양과 동양 사이, 미국인 자식과 이민 온 부모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도록 부추김을 받는다. 이러한 기대는 두 극 사이의 불평등(미국을 우월하게 보고 아시아를 열등하게 보는)을 내포한 이중성을 전제한다. 어떤 경우라도,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두 개의 세계가 아니라 적어도 세 개의 세계, 즉 주류 미국 사회, 상상 속의, 기억 속의, 또는 다시 가 본 아시아, 그리고 그 양쪽이 다 인정하지 않는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사회 사이에서 고투하고 있다. 이탈리아계, 그리이스계, 멕시코계 미국인들은 영원한 외국인으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이탈리아계 미국인이나, 그리이스계 미국인, 또는 멕시코계 미국인에게조차도 이러한 문화매개자나 다리로서의 역할을 기대하지 않는다.
미국문학에서, 이민자의 이야기들은 대체로 식민지시대 이후의 방랑생활이나 국경을 넘음으로써 못마땅한 지위의 한계를 희석시키는 정도의 내용으로 간주되고 있다. 미국문학 속에서 아시아계 이민 이야기의 근본적인 "진실"은 아시아에서 미국으로의 "진보"란 목적론에 입각해 있다. 에이미 탠 Amy Tan의 중국여성이민들은 중국의 여성혐오의 지옥으로부터 미국의 성평등 천국으로 탈출한다. 맥신 홍 킹스턴 Maxine Hong Kingston이 "여전사 Woman Worrior"를 통해 미신이 가득한 중국이민들의 유령세계로부터 어두운 구석구석까지 빛이 넘치는 미국사회로 출현하는 한 중국계 미국인의 성장을 이야기하려 했을지라도, 독자들은 야만으로부터 문명사회로의 "진보"를 보도록 훈련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미국 출판인들이 중국문화혁명의 공포로부터 탈출하는 여자들에 관한 소설 (안치 민 Anchee Min, "빨간 진달래 Red Azalea"나 그 이후 소설), 캄보디아의 "킬링 필드" (루옹 응 Luong Ung, "그들은 먼저 내 아버지를 죽였다: 캄보디아의 딸은 기억한다 First They Killed My Father: A Daughter of Cambodia Remembers", 2000, 찬리티 힘 Chanrithy Him, "깨진 유리가 표류할 때 When Broken Glass Floats", 2000), 전쟁으로 부서지고 혼란스런 필리핀(테스 유리자 홀테 Tess Uriza Holthe, "코끼리들이 춤을 출 때 When the Elephants Dance", 2002), 또는 월남(헤이스립 Hayslip, "하늘과 땅이 뒤바꿨을 때 When Heaven and Earth Changed Places"), 혼외정사로 아이를 갖거나 혼혈아를 가진 여자들을 죽이는, 즉 "명예로운 죽음 honor killing"을 강요하는 한국의 가부장 사회(엘리자베스 김 Elizabeth Kim 의 "만가지 슬픔 Ten Thousand Sorrows")로부터 미국의 자유와 행복으로 탈출하는 이야기를 열성적으로 환영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가 얼마나 경사스러우며 해방적이며 저항적일 수 있겠는가?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런 이야기나 그 해석은 유랑자들이 겪어온 진부한 절단과 상실일 뿐인 것이다. '메기와 만달라 Catfish and Mandala (1999)'에서 앤드류 팜 Andrew Pham의 화자는 그를 통해 말할 뿐 그에게는 말을 걸지 않는 두 세계 사이의 통역가로만 존재할 뿐이다. 마침내 화자는 카테고리 사이에서 자신의 미미한 정체성을 가까스로 찾아낸다. 그의 베트남 체류가 끝날 무렵, 한 늙은 여자가 그에게 말을 건다. 처음엔 영어로, 그 다음엔 불어로, 마침내는 월남어로. 그는 미소만 지을 뿐 대답하기를 거부한다. 그의 "보편성"으로 그녀를 실망시키거나 "[그들의] 공동의 역사를 상기시키기"보다는 익명으로 남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런 일에 나는 능하다. 나는 틈새에서 움직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손바닥에 담긴 물처럼 나 자신을 조금 남기고는 분류작업에서 미끄러져 나간다. 나는 빠르고 능숙하다. 소속감의 욕망에 사로잡히는 것보다 더 큰 공포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카멜리온이다. 그리고 훌륭한 카멜리온에게는 중심이 없고 그 순간의 자신이 가장 진실한 자아감각이다. (339)

필자가 보기에 스스로 속할 수 없는 세계 사이의 이와 같은 왕복은 승리라기보다는 비극이다. 끊임없이 주위를 관찰하고 관찰되며, 그는 어떤 세계로든 녹아들고 싶어하는 것이다.
특히 인종적 이민의 경우, 미국으로의 이민은 물질적인 편안함과 자유로운 익명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 역시 상실과 고통을 인정해야만 한다. 아시안 이민들은, 월남인, 필리핀인, 또는 한국인이건 간에 미국의 인종주의와 식민지주의, 신식민지 자본주의, 그리고 아시아에서의 제국주의 전쟁을 통해 형성되었다. 그들의 기억, 역사, 그리고 경험들은 모두 금세기 아시아에서의 미국 역할에 대한 픽션과 직접적으로 모순된다. 그러므로 시민권을 원하거나 미국문화와 자신과의 갭을 없애고 싶어하는 아시안 이민들은 그들의 모국에서의 미국 제국주의 사업이나 자신이 직접 체험한 미국에서의 멸시나 차별 등등, 미국 자체도 잊으려고 하는 자신의 역사나 기억을 부인해야만 하는 것이다.
"미국 이야기"는 결말, 즉 해피엔딩을 고집하는 일체성의 화법이다. 즉, "옛날 옛날에" 뿐만 아니라 "행복하게 살았더란다" 까지를 원하는 것이다. 세상을 통합되고 동일성을 가진 하나로 인식하기 위한 일체성과 결말의 공식은 어떤 피해의 인정도 배제한다. "네 자신의 불운을 가지고 남을 원망하며 징징대지 말라." "털고 일어나 전진하라." 그들은 이렇게 훈계한다. 그러나 현재의 밑받침인 과거를 인정하지 않고는 전진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지금 위기에 처했는지도 모른다. 미국의 부는 전멸된 아메리칸 인디언과 훔쳐온 아프리카인들, 그리고 착취당한 갈색, 노란색 피부의 빚에 팔린 노예들과 날품팔잇군들의 뼈대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들의 혼이 온 천지를 떠돌며 인정받기를 갈급해 하지만 우리는 그 혼을 불러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단지 흰 피부의 특권으로 현재의 지위를 차지한 대부분의 백인 미국인들은 인종주의나 인종차별이 출산과 육아, 학교교육, 성, 범죄정의, 스포츠, 연예 등등 미국 생활의 중심적인 요소인데도, 인종에 대해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들은 색맹인 척, 인종차별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인종차별이 사라질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미국의 보수적 종교지도자와 정치인들은 미국 역사 속에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예전의 일체성에 대한 향수를 언급하곤 한다. 지저분한 갈색 또는 노란 피부의 이민들이나 가족의 가치를 모르는 미혼모들도 없고, 다루기 힘들고 제멋대로의 흑인들이 국가를 분할시킬 듯 위협하기 이전의 "그 좋았던 옛날"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 시절에는 행복한 노예들이 목화밭에서 노래를 불렀고, 멕시칸들은 들에서 허리 굽혀 일했으며, 손빨래 세탁소와 찹수이 식당의 중국인들은 그들의 상전들을 존경하고 복종했던 것이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보스톤에 이르는 미국의 주요도시에서는 동일화를 통해 일체를 이루겠다는 신념 아래 타국에서 온 어린이들에게서 그들의 모국어와 문화를 빼앗는 영어 단일화 운동이 일고 있다.
실상, 인종적 평등 없는 동일화는 낙오자를 만들어냈다. 학교 중퇴자나 국내 형무소의 투옥자들 대부분이 아프리칸 아메리칸이나 라틴계의 우매성과 범죄성에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라틴계 이민들과는 달리, 현대의 아시안 이민들은 그들이 대부분 도시의 교육받은 중산층 출신이기에 우선 앞선다. "모범적 소수"의 틀은 통상적으로 같은 결과를 위해서 아시아인들이 백인 미국인들보다 훨씬 더 많이 배워야 하고 훨씬 더 오래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사실을 편리하게 무시한다. 또는 아시안 아메리칸들은 미국 사회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것을 포기하거나 맞바꿔야 하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것이 이원체는 아니다. 한국계 미국인들의 피지배가 지배적인 백인들과의 관계만으로 형성된 것은 아니고, 그 외 아프리칸 아메리칸이나 멕시코계, 라틴계, 그리고 다른 아시안 미국인들과의 층층이 변화하는 힘의 관계에서 형성된 것이다.
지난 십 년 동안 한국계 미국인들의 창작활동이 왕성했다. 그 기간동안 한국계 미국인들은 보다 많은 영화를 만들어 냈고, 시각 및 공연예술을 선보였으며, 과거 80년 동안만큼의 많은 소설과 기록과 시집들을 발간해냈다. 이런 90년대의 극적인 창작활동의 증가는 처음으로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영어에 능숙한 한국계 미국인 세대가 성인이 된 만큼 당연한 결과라 할 것이다. 비교적 많은 숫자의 그들 부모들이 1970년대에 이민국이 선호하는 전문, 기술 직종으로 미국에 이민 왔다. 게다가 과거 20년 동안의 미국 인구의 인종적 분포 변화는 새로운 독자층을 형성했고 출판과 예술발표의 길은 대체로 같은 시기의 다른 유색인종 예술가들에 의해 이미 열려 있었기에 한국계 미국인들의 작품에 대한 호응을 기대할 수 있었다.
필자는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 이후 맹렬하고 갑작스런 한국계 미국인들의 문화활동의 번성을 부분적으로나마 그 폭동 때문에 많은 한국계 미국인들이 겪었던 정체성과 자기 표현의 위기에 있다고 본다. 폭동 기간 동안 그들은 흑색, 갈색 인종들의 분노의 타겟이 되었으며 인쇄 및 방송 매체를 통해 영어에 미숙한 외국인일 뿐만 아니라 자신과 자신들의 재산 외에는 아무 것도 안중에 없는 빈민가의 욕심 많은 상인들로 널리 선전되어졌던 것이다. 많은 한국계 미국인들, 특히 1.5세들은 자신들을 나타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바로 자신들의 인생이야기나 상상을 통한 한국인과 한국계 미국인들의 이야기로써 스스로 자신들의 모습을 정의 하고자 했다. 그들의 문학작품은 한국에서의 가족생활에 대한 소설 (헬렌 김 Helen Kim, "긴 장마철 The Long Season of Rain", 1996; 미아 윤 Mia Yun, "바람의 집 House of the Winds", 1998)과 자서전 (카니 강 Connie Kang, "고국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였다 Home Was the Land of Morning Calm", 1995), 이민 온 조부모나 부모의 한국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한 책 (이 혜리 Helie Lee, "할머니가 있는 풍경 Still Life with Rice", 1996; 미라 스타우트 Mira Stout, "일천 그루의 밤나무 One Thousand Chestnut Trees", 1998), 역사 소설 (테레스 박 Therese Park, "황제의 선물 A Gift of the Emperor", 1997; 이창래 Chang-Rae Lee, "제스쳐 인생 A Gesture Life", 1999; 이 둘 다 일본 군대의 정신대 여인 또는 강요된 성노예들의 얘기를 주축으로 한다), 그리고 미국에 근거한 가정 드라마 (수잔 최 Susan Choi, "외국인 학생 The Foreign Student", 1998; 낸시 김 Nancy Kim, "친호미니의 비밀 Chinhominey's Secret", 1999) 등이다. 한국계 미국인 예술가들은 세대 사이, 문화 사이의 다리나 통역가로서의 역할에 국한되기를 원치 않는다.
이들 작품의 대부분은 중간 매개자, 통역가나 교량역할을 거부한다. 대신 파묻힌 이야기들을 찾아내고, 피부색이며 문화, 성에 대한 뭉뚱그려진 가정을 다양성과 불연속성, 예기치 않는 장소에서 끌어낸 예기치 않은 목소리로 뒤집어엎음으로써, 지배층을 묘사하는 전체적 표현의 평론을 이겨내는 것이다.
한국전쟁이 한국과 미국의 역사에서 차지한 중요성을 감안할 때, 미국 내에서 한국전쟁은 형편없는 무관심 속에 버려져 있었다. 한국전쟁에 대해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아는 것은 미국인들이 한국의 모든 사람들을 공산주의에서 구제할 수는 없었기에 용감하게 노력해서 창녀들을 구하고 고아들을 입양했다는 정도이다.
그 창녀들의 몇몇은 한국계 미국인들의 책을 통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미군과 결혼해서 미국 전역의 소도시에 살고 있는 여자들을 인터뷰한 유지연 Ji-Yeon Yuh 의 "기지촌의 그림자 너머 Beyond the Shadow of Camptown (2002)", 한국 군창에 관한 미국정부의 공적 역할을 추적한 캐서린 문 Katherine Moon 의 "동맹군 사이의 성 Sex Among Allies (1998)" 등이 그것이다. J.T.타카기 Takagi와 박혜정이 감독한 영화, "밖의 여자들 The Women Outside (1996)"은 한국여자들이 어떻게 유혹되어 군창으로 팔렸으며 미군과 결혼한 여자들이 어떻게 마사지 팔러와 술집에 팔렸는가를 탐색한다.
하인즈 인수 펜클 Heinz Insu Fenkl의 "나의 유령 동생의 기억 Memories of My Ghost Brother (1996)"은 한국에 주둔한 미군과 한국여자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들을 중심 인물로 하여, 근거리에서 아시아에서의 미군 주둔 문제와 미국인들의 인종차별주의, 나아가 그로 인한 한국 기지촌의 비틀린 야망과 관계들을 고발한다.
수천의 한국 어린이들이 지난 35년 동안 미국 가정에 입양되었다. 최근까지 입양 이야기는 곧 백인 미국인들의 관대함과 동정, 그리고 아낌없는 부조였다. 그러나 이제 그 입양아들이 자라서 영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타냐 비쇼프 Tonya Bishoff 와 조 랜킨 Jo Rankin 이 편집한 "침묵하는 나무의 씨앗들 Seeds from A Silent Tree(1997)" 같은 선집이나, 글과 시각예술로 표현된 MeK. 안의 "반음조로 살기 Living in Half Tones (1994)", 김 수 태일러 Kim Su Theiler 의 "위대한 소녀 Great Girl (1993)", 네이트 아돌프슨 Nate Adolfson 의 "지나가기 Passing Through (1998)", 그리고 딘 보어세이 Deann Borhsay의 "일인칭 복수 First Person Plural (2000)" 같은 영화들이 그것이다. 이 작품들의 주제는 입양아들이 한국에서 자신들과 피를 나눈 가족을 잃어야했던 상황과 그들을 구제했다고 주장하는 사회에서 겪은 인종차별과 소외, 그리고 실체화된 가정이나 결말의 의미에 대한 비평인 것이다.
미국의 국가적 입장은 세계 제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남한을 군사적, 경제적, 문화적 식민지화한 사실을 부인한다. I.F.스톤은 1950과 1953년 사이의 한국 내의 분쟁을 잊혀진 전쟁이라고 일컬었다. 한국전쟁은 휴전 한참 후에 태어난 사람들이나 먼 대륙에 사는 사람들에게까지도 영향을 미치며, 한국계 미국인들을 포함한 수천만 한국인들의 주거지, 생계, 가족관계, 그리고 개인적인 욕망을 결정짓는 물적 심리적 생활의 가장 사적인 면을 형성했다. 반세기 전 나라가 두 동강이 난 이래 지리적인 이주나 가족과의 생이별은 예외적인 일이 아니라 삶의 법칙이 되어버렸다.
한국전쟁은 1990년대에조차도 한국계 미국인들의 상상적 글쓰기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우리는 최숙열 Sook Nyul Choi의 "하얀 기린의 메아리 Echoes of the White Giraffe (1993)", 이혜리 Helie Lee의 "할머니가 있는 풍경 Still Life with Rice (1996)", K. 카니 강 K. Connie Kang의 "모국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였다 Home was the Land of the Morning Calm(1995)", 그리고 타이 박 Ty Pak의 "울어라 한국아 울어라 Cry Korea Cry (1999)"를 생각하면 된다. 수잔 최 Susan Choi의 "외국인 학생 The Foreign Student(1998)"은 1940년대 말기, 미군의 지휘 아래 한국군이 2만에서 6만 사이의 젊은 좌익들을 학살했던, 별로 알려지지 않은 제주도의 비극을 투광 조명하면서, 잊혀진 전쟁을 깊고 자세하게 펼쳐 보인다. 그러나 일단 미국 땅에 이식된 후에는 전쟁은 불투명하고 알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남한의 부유하고 교육받은 가정에서 자란 창 안이란 번역가는 알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테네시의 시와니라는 작은 도시에 가게 되고 거기서 무지하지만 선의의 마을 사람들로부터 전쟁에 대해 얘기해 달라는 요구를 받는다. "당신 나라 사람들은 우리가 싸워준 전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요?" 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아주 좋아합니다" (234) 라는 대답밖에는 할 수가 없다. 캐서린이 자신이 전쟁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을 사과했을 때 그는 "별로 알 것도 없지요." (34) 라고 대답한다. 교회 사람들이 한국 얘기를 청했을 때, 안은 "전쟁에 대해 명확한 설명을 해야 한다는 부담으로 항상 절망적인 기분이 되고 만다. 그것은 설명을 불허하기 때문이다."(51) "그가 감춰야 했던 것은 사실 존재하지도 않았음을 그는 깨달았다.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피해를 줄 수 있는 것이었다." (286) 그와 그가 더불어 살고 있는 미국인들 사이의 간격은 메워질 수 없는 것이다. 그는 결코 그것을 해석하거나 번역할 수가 없다. 그 둘은 엄청나게 다를 뿐이다. 남한에서 통역가로 일한 그는 "고의적인 오역의 공간에서... 성공했다."(84) 그리고 이제 그는 그 공간에 머물도록 운명지어진 것이다.
비록 미국인들에게는 불분명하지만 한국이민은 직접적으로 한국전쟁에서 시작되었다. 오늘날 미국의 국가적 서술에서 한국을 개념적으로 지워 버린 것은 미국 인종차별의 또 다른 결과이다. 거주지에서 쫓겨나고 이주 당한 많은 아시아인들은 그들의 삶을 파괴한 바로 그 제국주의의 중심으로 이주하였다. 우리는 새로운 미국적 정체성을 찾기 위한 상상과 변화와 재구성의 가능성을 현대 한국계 미국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볼 수 있다. 그들 중 몇몇은 끊임없이 파묻힌 얘기와 이미지들을 들어내어, 유령들을 감추고 지식을 억압하는 매끈한 침묵을 파괴하며, 국외에서 자애로우며 국내에서는 포괄적이라는 미국의 입장을 반박하는 것이다.
주류 미국 독자들은 한국계 미국인 작가들이 이러한 유령들과 얘기들을 불러내는 것을 방해할지 모른다. 이들은 한국계 미국인 작가들이 차라리 이국적이고 은연중에 열등한 문화를 자신들에게 보여주는 문화적 통역가로 남기를 바라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또한 한국계 미국인 작가들은 한국계 미국 문학에서 조국의 자취를 찾기에 급급한 남한의 독자들과 비평가들에 의해 궁지에 몰리고 있는 듯 싶다. 그들은 전통문화를 고수하고 이민가지 않은 자신들을 축하하기 위한 이유로 한국 이민들의 실패와 한국계 미국인들의 불안을 보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목적으로 이들의 작품을 읽는다면 한국인들의 실패나 한국계 미국인들의 불안을 둘러싼 미국적 상황을 간과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한국계 미국인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한국과 한국계 미국인들의 연결고리가 아니고 또 그것을 주제로 하지도 않는다. 비록 어떤 젊은 세대 한국계 미국인 작가들의 작품은 그들 조부모나 부모세대의 식민지 정책과 내전의 영향 아래 날조된 국가관에 근거하고 있지만, 대부분 작품의 핵심은 인종, 민족, 성별, 성향, 사회계급 그리고 식민적 피지배의 상호작용을 포함한 그들 자신의 미국에서의 경험이다. 예를 들면, 이창래 Chang-Rae Lee의 "네이티브 스피커 Native Speaker (1995)"나, 레오나드 장 Leonard Chang의 "과일과 음식 Fruit'n'Food (1996)", 그리고 패티 김 Patty Kim의 "신용이라 불리는 택시 A Cab Called Reliable (1997)" 등은 한국 이민 상인과 젊은 한국계 미국인들의 동일성과 차이점을 인종적 색채가 짙은 상황관계에서 낱낱이 발려낸다.
어떻게 한국계 미국인이 한국과 미국에 대해 이해하는가? 패티 김의 "신용이라 불리는 택시"의 주인공 안주는 세계 백과 사전에 묘사된, 현대의 정치, 사회적 변화와 무관하게 정지된 시간 속의 농업한국의 가치에 의존한다. 언뜻 보기에 독자들은 이 한국계 미국인 소녀의 급우들이 백인이라고 가정하게 된다. 그러나 차츰, 어린이들의 미묘한 묘사를 통해 우리는 그들이 아프리칸 아메리칸(흑인)임을 알게 된다. 안주는 집단으로서의 흑인들에게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세계에서는, 그들은 그녀와 달리 미국생활의 핵심에 있는 것이다. 그녀는 그들처럼 되고 싶은 것이다.
"신용이라 불리는 택시"는 "모범 소수민족"으로서의 아시안 아메리칸의 의미를 헤쳐 보이고, 미국의 동양관을 풍자하며, 공정, 인종평등, 그리고 다문화 화해라는 국가적 신화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한-흑 갈등을 표현하는 대신, "신용이라 불리는 택시"는 열심히 일하는 이민들이 성공하는 다인종 안식처라는 미국의 의미를 파헤친다. 김씨의 소설은 아무런 결론도 화해도, 외국이민의 승리한 미국시민으로의 행복한 변화도 보여주지 않는다. 이 책은 안주가 병들고 지치고 할 얘기도 없어진 상태로 아버지를 떠나는 것으로 끝난다. 비록 그녀의 이민의 그림자로부터의 탈출은 통렬한 비극이지만, 그녀가 한번도 가보지 않은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듯이 그녀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한국 독자들이나 비평가들은 한국계 미국인들의 작품에서 한국에 대한 언급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는 시각예술가 마이클 주 Michael Joo가 말하는 사슴뿔가루의 정력을 위한 한국적 사용을 미국 사회에서의 아시안 남성의 인종적 거세라는 문맥에서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Y. 데이비드 정 Y. David Chung은 한국의 전통적인 가면무의 요소를 한국 이민 상인들의 변경 거주자 의식과 그들이 그들의 상점이 자리한 지역사회에서 흑인들에게 어떻게 보여지는가를 주제로 하는 랩 오페라에 담아냈다. 낭송시인 데니스 김 Dennis Kim은 미국 내의 인종정의에의 헌신을 표현하는데 판소리를 이용한다. 다른 한편으로 바이런 김 Byron Kim의 "고려 청자" 라는 제목의 단색 녹색 그림들은 표면상으로 12세기 한국 도기에 쓰여졌다가 유실되어 다시는 만들어 내지 못하는 비밀의 색깔, 즉 비색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그림들에서 우리는 한국계 미국인들은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읽게 된다. 더욱이 김씨의 작품들은 미국 추상화가들의 작품과 대화하며 그 범위를 확장시킨다. 그는 추상과 리얼리즘의 한계를 흔들어서, 텔마 골든 Thelma Golden이 관찰했듯이 ("무엇이 흰가....?" 1993 Whitney Biennial,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1993, p. 28), 그의 피부색 초상화는 묘사적이며 동시에 상징적이기도 한 것이다. 새로이 정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크레욜라 색깔의 크레용을 녹여서 사용함으로써, 김씨는 전통적 추상 단색 그림들을, 이 세계를 흑, 백, 홍, 황, 그리고 갈색으로 나누어 놓은 인종 얘기로 만들었다. 흔히 서구 추상화에 따라붙는 상투적인 의미를 뒤집어엎으면서, 김씨는 미국 추상예술이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문제, 한국출신 작가들은 인권 내지 거대 자본주의 등의 중요한 "정치적 문제"나 한국 미술사에 관련된 미술사적 관심에 초점을 두지 않는, 단지 "제 배꼽 들여다보기" 식의 "개인적 정체성 문제"라고 넘겨왔던 문제에 일격을 가한 것이다.
한국계 미국인 작가들이나 예술가들은 계속 경계를 넘어서기도 하고 경계를 지키기도 하며 뒤섞인 미국과 한국적 삶의 요소들로부터 새롭게 접목된 문화를 창조해 낼 것이다. 몇 달 후면 아마 필자와 로라 현이 강 Laura Hyun Yi Kang이 함께 편집한 한국계 미국인 작가들의 새 선집, "메아리의 메아리 Echoes Upon Echoes"가 출판될 것이다. 흔히 대하는 로스앤젤레스나 뉴욕, 시카고의 한인타운이 아니라 이 새로운 작품들은 기대치 않았던 장소 - 체중감소 스파, 여름 캠프, 버스, 눈 속의 오두막, 북한, 노르웨이, 케냐 등등을 무대로 하고 있다. 이 작품들 속의 소외와 집착, 갈등과 소속감을 다룬 황량하고 색다른 외적 내적 풍경들은 낯선 땅, 지역 사회, 언어의 안팎에서 살고 이주하는 긴장감을 증언한다. 다수의 작품들은 우리를 묶어주는 끈이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어떻게 닳아서 해체되며 다시 묶여지는가를 극화한다. 어쩌면 이것이 한국계 미국인들의 표현이 지향해야 할 또 하나의 방향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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