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방향

2008.07.23 23:21

김인자 조회 수:774 추천:120

김인자

    요즈음 결혼조건의 패턴도 인터넷시대임을 일깨워 주는 듯 하다. 불과 몇 년 전 만해도 '돈이나 능력 없는 것은 봐줘도 못생긴 것은 못 봐 준다'는 말이 유행하더니 최근에는 77%의 남성이 돈 많은 여자나 능력 있는 여자가 이상형이며 미모의 여성보다 더 선호한다고 한다. 또 자신의 아내가 직장생활을 했으면 좋겠다는 사람이 전업주부를 원하는 사람보다 훨씬 앞섰다는 것이 인터넷 조사결과 나왔다.

    요즘 TV에 나오는 드라마의 내용도 재벌그룹의 황태자와 결혼하게되는 신데렐라의 스토리나 최고의 사치생활을 하는 탑 1%의 분망하고 화려한 생활이 선망의 대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오늘의 사회는 오직 '마이다스'신의 찬란한 황금의 미소만이 숭배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오늘의 현대인들은 눈에 $사인을 달고 달리는 듯하다. 이러한 대중문화는 사회바이러스가 되어 황폐한 정신문화를 만들고 있다.

    행복한 삶이 무엇이냐 하는데 대하여 객관적으로 합일하기는 어렵다. 어떤 사람은 생의 목적을 오직 물질적 행복추구에만 두고 삶의 의미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데 있다는 쾌락주의자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들은 필요조건은 되지만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은 오히려 정신적 빈곤과 마음이 공허한 경우가 많다.

    행복하다는 것은 일률적 기준이 없다. 행복을 측정하는데는 눈금도 없고 기준도 없다. 다만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각자의 인생관에 따라 다르다.

  초고속 시대인 요즈음은 객관적 행복의 조건을 갖추었다는 것 자체를 행복으로 착각하기 쉬우므로 내 가치는 존재하지 않고 시대와 유행의 바이러스에 침식된 복사된 가치만 판을 치게 되므로 잠시 숨을 고르고 자신의 존재적 가치를 되새김질해봐야 할 것 같다.

    서구문명의 최첨단을 걷고있는 미국사회는 어느 나라보다 심리학자와 변호사들 숫자가 많다고 한다. 왜냐하면 변호사는 사회적 갈등을, 심리학자는 인간 내재적인 심리적 갈등을 풀기 위해서라 한다.

  한 때는 이런 인간적 충돌은 교회의 성직자나 가족의 호주가 개입해서 풀어주었지만 이제는 빠르게 회전하는 시사적 가치관에 따라가지 못하는 전통적 종교문화와 핵가족제도로는 이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이러한 현황의 사회 속에서 노엄 촘스키 교수는 신자유주의에 대항할 지식인의 유대를 호소하면서 "건전한 양식과 더불어 이웃과 연대하며 평화스럽게 살며 인간의 존엄을 보장하는 좋은 사회건설을 추구해야한다"고 주장하지만 이 또한 지나가는 바람 소리에 그치고 마는 듯하다.

    최근 S공대 교수의 치졸한 수단으로 학생에 돌아갈 돈 16억 원을 챙기는 사건을 보면 신자유주의의 병폐에 대항할 지식인마저 사라지는 것인지 두렵기도 하다.

    오늘의 세계화 속에서 일등과 승자만이 숭배되는 사회 페러다임에서 젊은 여성들은 유행에 질세라 브랜드만 ㅉㅗㅈ고 얼굴이나 몸맵시가 비슷비슷해가며 진실한 생의 가치나 개성의 아름다움은 사라져 가고 자기도취에 빠져 막다른 골목을 향해 달리고있다.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 행복을 원한다는 것은 나를 사랑하는 것일 것이다. 스스로에게 내재적 가치와 존귀함과 아름다움이 있는 것을 재발견하고 그리고 한계를 인정하며 주어진 가능성을 찾아 관심을 두고 노력하는 것이 행복의 첫 스탭이 아닐까...

8-06-2005
    

    

회원:
0
새 글:
0
등록일:
2015.06.19

오늘:
0
어제:
0
전체:
1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