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분재> 중앙일보 이 아침에

2011.11.30 17:56

김인자 조회 수:428 추천:30

생활의 분재(盆栽)
                                                             김인자

    며칠동안 계속 사근사근 봄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오랜만에 하늘이 파란 화창한 날씨가 되었다. 겨울 내내 바쁘게 지낸 끝이라 봄이 됐는데도 왠지 집안의 분위기가 무겁고 추운 기분이다. 하긴 바쁘다는 핑계로 집안 소제를 제대로 하지 않은 까닭도 있을 것이며, 할머니가 되어서도 아직도 집안 일하는 것이 서툰 내 탓도 있으리라.

   뒤뜰에 나갔더니 작년에 화분에 심었던 토마토와 고추가 흠뻑 비를 맞아 길게 자란 줄기가 서로 엉켜있다. 지저분해 보이는 것들을 정리해서 버리고, 근처 화원에 가서 화초들을 둘러보고 핑크 자스민과 베고니아, 제라늄과 욕심대로 복숭아나무를 사왔다. 왠지 고향의 꽃같이 순박하고 화려한 복숭아꽃이 보고싶었다. 뜰이 작은데다 거의 타일이 깔려있어 복숭아나무를 심을 곳이 없는 줄 알지만 이 나무는 포치 용으로 키가 5-6ft의 작은 나무로 화분에서 잘 자란다고 했다.

   화단에 줄을 맞춰 꽃들을 심었다. 복숭아나무의 포장을 벗겨서 뿌리를 깨끗이 씻으면서 보니 나무 가지에는 새순이 돋아있고 작은 봉오리들이 달려있다. 커다란 화분에 복숭아나무를 심은 후 흙 위를 비료로 덮고 뿌리까지 젖게 물을 듬뿍 주었다.

   의자에 앉아 먼 시가지를 보고있으니 꿈결 마냥 지난 시절이 떠오른다. 한국을 떠난 지도 벌써 40년이 지났다. 처음 고국을 떠나서 느껴졌던 귀속감의 상실 때문에 괴로워하던 시절이 한동안 계속되었었다. 이젠 유비쿼터스의 시대로 오히려 40년 전보다 정서적으로 고국이 더 가깝게 느껴진다. 2년 전 20년 동안 살던 라 카냐다의 정든 집에서 이 곳 글랜데일의 작은 집으로 이사왔다. 아이들이 다 독립해서 우리 곁을 떠나가니 학교 때문에 그 곳에 머물 이유도 없고, 넓은 뜰이 더 넓게 느껴지고 세월이 지날수록 정원 일에 많은 시간을 빼앗기는 것이 안타까웠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지는 남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계획해서 헛되지 않게 써야할텐데... 이 집으로 이사온 후 한동안 시간의 여유를 가질 수 있어 편하다 생각했는데 봄이 되니 다시 마음이 초록으로 물들기 시작하고, 흙 냄새가 그리워지며 흙을 만지는 즐거움이 가슴에 일렁인다.

    한데, 화분에 심은 복숭아나무는 잘 자라줄까? 걱정이 된다. 땅에다 심었으면 땅속의 숨결을 받으며 뿌리를 깊이 내려 잘 자랄 것을 화분 안에서 제대로 숨이나 쉴 수 있을까? 멀리까지 뻗으려는 뿌리의 꿈을 아쉽게 접어야할 것이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 한정된 삶을 꾸려가야 하는 복숭아나무를 생각해보니 내 마음이 답답해진다. 하물며 작은 화분에 분재된 나무의 뿌리는 어떻겠는가!

    너무 많이 인간의 손이 가서 잘 자라지 못한 나무들을 종종 본다. 식물인 나무를 억지로 구부려서 인간의 기호에 맞게 인위적으로 가꾼 것을 보면 신기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자연의 섭리에 역류하는 것 같아 연민의 정이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일본사람들이 즐기는 분재(Bonsai)를 좋아하지 않는다. 조그만 사기화분에 뿌리들이 웅크리고 붙어있어 중국여자들의 전족(纏足)처럼 나무를 Miniature로 만들어 놓고 그런 인위적 분재를 보고 어떻게 자연을 감상할 수 있을까 의문이 간다. 그 말라서 뼈만 남은 소나무는 단애의 고통으로 자라기를 거부하고 침묵으로 항의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도 사이버시대에 들어서서 세계의 사건이 순간적으로 한눈에 관찰되고, 우리의 모든 생활이 법규처럼 투명하게 규격화되고, 인간존재 자체도 지구라는 하드웨어의 부품처럼 기능적 조직 속에 가두어져있다. 우리는 바쁜 일상생활에서 다람쥐의 쳇바퀴 속의 시간을 굴리고 있다. CD로 압축된 음악을 듣고, Video로 안방에 앉아서 영화를 보고, 신문과 TV에 퍼즐처럼 모아진 세계를 접하면서 생활한다. 또한 우리 주위를 사정없이 휘돌고 있는 전자파로 매일 매시간이 책크당하며, 우리 모두 전자문명에 지배당하는 생활을 즐기고 있다. 스트라빈스키나 베토벤을, 바하나 모찰트를 할리우드 볼에서 듣는 것과 CD로 듣는 것과는 그 차원이 다를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점점 더 인위적인 분재된 공동생활에 익숙해져 가고있다.

    그러나 우리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은 인위적 생활에 얼어붙었던 가슴을 녹여주며 삶의 기쁨과 아름다움을 안겨준다. 산들바람이 불면 잎들이 살랑대며 흔들리고 비가 오면 다소곳이 비를 맞고 서있는 나무를 보면 바람과 비와 교감하는 자연의 넉넉함을 보게된다.

    사람도 어린 시절 많이 보고 들어서 다양한 문화를 접하면서 성장한 사람은, 한정된 생활을 하며 자란 사람들과는 여러 면에서 다른 점을 볼 수 있다. 어렸을 때 어른들과 함께 삶의 편린들을 같이 경험하고 나누면서 생활의 지혜를 터득한 자녀들은 대인 관계가 부드럽고 이해의 폭이 넓고 새로운 생활에 쉽게 적응하며 독립된 삶을 개척하는데 어려움이 적은 것 같다. 또 그들은 생의 구석구석을 살피고 터득하고 이해해서 인생이란 큰 그림을 더 많이 해독하게된다. 그러기에 분재된 환경은 우리를 분재된 생활로 한정시킬 것이다.

    지나치게 인위적인 것을 경계하는 여러 경구도 많다. 옛날 중국고전 助長에서 곡식이 빨리 자라도록 무리하게 곡식의 싹을 조금씩 뽑아 올리는 것은 성장을 돕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해치는 어리석은 일이며, 그러나 자연대로 자라게 하면서 잡초를 뽑아주는 것은 유익하다 고했다. 즉 자연스럽고 다양하고 자유로운 환경에서 슬기로운 지혜가 우러나오는 삶을 산다면 후회가 적을 것 같다.

    화분에 있는 복숭아나무를 보면서 나의 지난 일들을 돌이켜본다. 살아오면서 남의 눈을 의식해서 체면 때문에 행여 분재된 생활은 하지 않았나, 내 분재된 사고로 가족의 생활을 구속하지는 않았나, 또한 삶의 다양성을 그 아름다움을 생활에 반영했던가, 이민을 왔기에, 바쁘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생략해도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닐 것이다. 가버린 세월은 절대로 되돌릴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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