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여행 가방에서 나온 것 / 김영교

2011.07.30 09:02

김영교 조회 수:723 추천:129

사업상 남편은 여행을 많이 한다. 아주 간편하게 짐을 싸는 남편은 내 여행 짐을 보고 매번 놀란다. 샘플 뭉치와 세면도구, 옷과 읽을거리 몇 가지가 내용물 전부다. 더러는 마른 멸치와 순창 고추장이 들어가기도 한다. 짐을 핸드 캐리 하기 때문에 비행장에 마중 나가면 제일 먼저 나오는 일진에 남편은 꼭 끼어있다. 지난 가을에 중국을 다녀온 남편의 짐 속에 빨래 감 외에 이상한 게 있어 내 시선을 잡았다. 플라스틱 통 안에 흰 종이에 싸고 또 싼, 조심스레 펴보니 아주 쬐그만 고추들이었다. 더러는 빨강색, 거의 파랑 고추들이 가지런히 누워있는 앙증스런 모습을 본 내 눈이 휘둥그래졌다. 몹시 맵기 때문에 만진 다음 꼭 손을 씻으라고 전화로 남편은 당부까지 해왔다. 새끼손가락 보다 가늘고 작은 몸매가 예쁘기 까지 한데 어떻게 그토록 심하게 쏘는 매콤함을 품고 있는지 놀라울 뿐이었다. 가슴을 두근거리며 짐 속에 꿍쳐 왔을 남편의 모험을 상상만 해도 웃음이 나왔고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귀한 것 버려서는 안되지 싶어 싱싱한 것은 냉장고에 빨갛게 익은 고추는 베이 윈도에 펼쳐 놓았다. 집에 돌아온 남편의 얘기인즉 고추씨를 받아 고추농사를 해보라는 것이었다. 긴가 민가 하면서 하루 이틀 지나는 동안 고추씨는 온실이나 다름없는 베이 윈도 안에서 노랗게 여물어갔다. 고추 심었느냐고 매일 묻는 남편의 성화에 드디어 홈 디포에 가서 모종판 흙에, 채소 키우는 올가닉 흙, 골고루 사와 모종판 침대에 흙을 깔고 위쪽으로 씨를 골고루 뉘였다. ‘너희들 이민 오느라 힘들었지? 싹만 틔워라. 이곳이 네 나라다. 남편의 성의를 봐서라도 꼭 움이 터야 한다. 이렇게 너희들 내가 입양했잖니!‘ 당부까지 하며 물을 살살 뿌려주었다. 늦가을이라 싹이 쉽게 틀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뒤뜰에는 골프 스윙을 연습하러 나가는 것이 고작인 남편이다. 고추씨가 그의 뒷 정원 출입을 잦게 만들었다. 매일 들여다보며 한 달이 넘게 조바심을 내고 있던 어느 날 여린 싹들이 줄을 서서 연두 빛 입을 벌리고 합창을 부르는 듯 흙 속에서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남편이 나보다 더 신이 났다. 더러는 화분에 옮겨 심어 베이 윈도에 두었더니 초록이 없던 부엌이 생명 빛깔을 뛰워 자못 운치감도는 격상된 분위기가 퍽 좋았다. 그런가 하면 더러는 이웃 구역식구들에게 고추모종 시집을 보냈다. 너무 빽빽하게 보여 숨통을 틔워주었다. 볕이 왼 종일 머무는 남쪽 뒤뜰에다 옮겨놓았더니 하루가 다르게 자라 흰 꽃이 맺히더니 끝에 초록 점 같은 고깔모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늘로 꼿꼿하게 목을 세우더니 송알송알 고추알들이 꽂혀 빳빳하게 서있는 모습이 되어갔다. 생명을 움 틔워 키우는 맛, 예사롭지가 않았다. 예사롭지 않은 게 또 있었다. 바로 모든 고추가 하늘을 향해 서있는 그 모습, 너무 신기했다. 통념은 고추란 땅을 향해 달려있어야 제격인데 싶었다. 농부의 기쁨이라고나 할까 희귀품종이다 싶어 신명나는 나는 좋아서 소리 지르며 남편이 이 기쁨에 가담해주기를 바랬다. 아닌게 아니라 더 좋아하는 눈치다. 남편은 그 매운 고추를 쫑쫑 썰어서 간장종지에 넣어 매운 맛 다 우러나도록 기다린 다음 건져 버리고 아주 입맛에 맞는 양념초간장 소스를 만들었다. 이상하리 만치 상큼하고 개운 하였다. 중국음식의 느끼함을 그렇게 달랬다는 후속 담에 남편이 불상하게 느껴졌다. 출장가면 현지 공원들과 산해진미의 중국요리를 즐기는 줄 알았는데 중국고추 반입 사건으로 남편의 고충을 이해하게 되었다. 많은 경우 집을 비우는 그의 부재가 부엌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준다. 편해서 좋은 것도 몇일, 잘 못해주고 톡톡 쏜 말들이 되돌아 와 나를 찌른다. 후회되어 반성의 기간으로 이어진다. 돌아오면 마음 편케 잘해 주어야지 다짐하게 만든다. 이번에는 더더 잘해주어 야지 식탁에 신경을 더더 써야지 하고 작심을 하게 된 용기, 남편의 여행 가방에서 나온 중국 고추 덕택이다. 이게 바로 작은 중국 고추 큰 미국 상륙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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