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맣게 탄 박사 농부 / 김영교

2011.08.08 04:08

김영교 조회 수:759 추천:110

닥터 베버 함(Dr. Weber Ham) 그때‘선배님’ 혹은 ‘누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딱 한사람 있었는데 그게 바로 닥터 함이 나를 향해 쓰는 호칭이다. 그렇게 불러 달라고 요구한적도 없는데 자연 발생적으로 된것같다. 느즈막에 후배 아우하나 얻어 정(情) 울타리를 돈독히 쌓아가고 있어 만나면 반갑고 마음이 늘 흐믓하다. 장거리 전화로 문안을 물어 올때는 너무도 정중하고 예의 바르다. 오래전 닥터 함을 하와이에서 열린 뉴스타트 건강 프로그램에서 처음 만났을때 간이 나쁜 사람처럼 얼굴색이 까맣드랬다. 알고보니 농사일을 하느라 햇볕에 그슬린 탓이였다.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성품을 지닌 그의 부인 지나는 대학 후배다. 이래저래 사귐은 깊어갔고 손이 모자란다는 그들의 초청을 받고 하마트면 그냥 다 버릴뻔한 꿀 참외밭에 소풍가서 따서 먹고 하루종일 놀다가 포도랑 한 차 가득 싣고 돌아온 기억은 무척 즐거웠던, 푸짐한 시골 인심이었다. 그후 각가지 무공해 과일을 수도없이 공급받아 나의 친구들과 나누어 먹을 때 마다 닥터 함을 알게된 인연을 감사했었다. 언젠가 심한 중풍에 걸린 목사 친구가 뉴스타트를 다녀오면서 회복된 것을 목격하고 생활변화로 근원치료를 하는 뉴스타트에 닥터 함은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병이 나서 고치기 전에 예방을 더 중시하여 뉴스타트에 참가하게 된것이 동기였다. 컨 카운티(Kern County)에 400여 에이커의 땅을 소유하고 있는 닥터 함은 매사에 그렇듯 농사짓는 일에도 정성과 최선을 다하는 성격이었다. 처음에는 농장을 비우는 것이 어려웠으나 더 좋은 과일을 맺기 위해 조그마한 한 그루의 나무도 쉼을 필요로 하는 과실수의 생태섭리를 터득하고 나서 자신도 건강관리를 위해 떠남이 가능하게 되었다. 직업이 무어냐고 사람들이 물을 때 농부(Farmer)라고 자부심을 가지고 서슴치 않고 대답하는 닥터 함을 주위에서 박사라고 부르니 품종개발 농학박사쯤으로 생각들을 하는 모양이 였다. 공부도 남달리 많이한 과학자가 평범한 일개 농부로 낙향한 그의 의도를 많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부인은 그의 현명한 선택을 지지했었다. Nasa에서 20년간 하던 화이트 칼라(White Collar)일을 하루 아침에 접고 닥터 함은 광활한 들판, 푸른 초원에 발을 뻗고 잠을 자는 평소의 꿈을 실현 시켰다. 흙과의 인연은 독일에 살 때 장미 농원을 가지고 계신 아버지로 부터였다. 어릴적 무척 싫었지만 방과후나 주말이면 장미 농장에 가서 가시에 찔리면서 가위로 불필요한 가지를 짜르고 흙을 일구고 다둑이며 뮬울 주고 키우면서 꽃울 피우는 기쁨을 터득하게 된 것이였다. 흙은 정직했다. 씨 뿌리는대로 돋아났고 씨뿌린 만큼 수확했다. 다마네기에서 다마네기 꽃이 필망정 장미는 피어나지 않는 철칙도 배웠다. 사람의 원소와 흙의 원소가 같기때문에 자연과 더불어 살아갈 때 받는 에너지의 진폭이 배가 된다고 했다. 그리하여 인간에겐 생명적인 생기가 솟고 품성이 선량함과 아름다움쪽으로 기울어 농부들은 욕심부릴줄 모르고 퍽 순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간이 더 편안해지려고 자연을 개발, 오염, 파괴하면 결국 인간 스스로를 죽이는 자살행위라고 막아야 한다고 개탄하였다. 사람은 흙냄새를 맡고 살아야 건강해진다고 말하는 옹달샘같은 맑은 영혼의 소유자 닥터 함은 1942년 일본 고베에서 태여나 독일서 공부하고 미국에서 가정을 꾸몄다. 한국피를 이어 받은 그는 정작 한국에서 살아본 적은 없고 다만 꿈같은 먼 향수가 있을 뿐이었다. 부모를 따라 네살때 일본에서 건너와 한국을 잠간 방문한 것이 아픈 상흔이되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였다. 아버지의 동경유학시절에 만난 일본 여성과의 결혼을 인정받을 수 없는 그런 시절이 였다. 한반도 전체가 다 아는 애국자 할아버지는 일본 며누리를 받아드릴수가 없었다. 일본 여인을 택하던지 장자권을 택하던지의 선택의 기로에서 사랑을 택한 닥터 함 아버지의 결단은 한국에서의 추방이 였고 외아들 상속권의 포기였다. 우리의 가슴을 설레이게 한 세기적 사건 - 사랑을 위하여 왕위를 버린 윈저공의 아름다운 로맨스나 아버지가 택한 원수관계에 있는 일본여성과의 열애는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는 사랑의 개가였다. 자식과 부모와의 순종이라는 관계성에 반기를 든 일대 반란이었다. 이들의 심각한 사랑은 일본 명문가 출신인 여자쪽에서도 인정받지못해 결국 제 3국 독일에 가서야 겨우 꽃 피울수 있었다. 동경대학에서 의상 디자인을 전공한 지금 87세의 어머니는 90세 남편과 금슬 좋기로 소문나 있다고 했다. 이 노부부는 딸을 가까이 두고 손주 손녀 만나기를 즐기며 현제 독일 Reinbach에 생존해 있다고 했다. 얼마나 눈물나는 얘기 인가. 죄없는 가족을 빈곤가운데 남겨 놓고 늘 집을 비운 그 애국자의 외아들인 닥터 함의 아버지는 늘 배가 고팠다고 했다. 가족을 기아선상에 놓아 두고 본인만 큰 애국을 소리치는 부친의 애국을 회의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남들처럼 애국 않해도 좋으니 자신은 절대로 가족을 굶기지 않으리라고 결심하게 이르렀다. 의사로의 생활기반을 잡았던 것이 그 사상을 뒷받힘 해주고 있다. 아버지한테 버림받으면서, 고향에서 쫒겨나면서 까지 원수의 나라 여성과의 결혼이 과연 잘한 일인가 닥터 함이 철들면서 나름대로 의문을 품기도 했다. 가족을 사랑하는 것이 애국의 첫번째 소임이라고 하는 아버지 말에 공감하는 나이가 되고나서 아버지를 더 존경하게 되었고 아버지의 결정이 옳았다고 회고하면서 대를 위하여 소를 희생시킨, 나라를 너무 사랑한 할아버지 입장도 이해하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머리가 비상한 분석공학 박사 닥터 함 집안은 머리 좋은 것이 내력이였다. 히틀러의 생체실험 의과대학 그 유명한 그 Elangen 대학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65년도에 획득했다. 21세에 퀠론대학에서 사회학과 고고미술학 박사학위를 둘 다 받은 천재 여동생만 봐도 그랬다. 그 옛날 동경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후 독일에 건너가 내과 의사가 된 그런 아버지의 자녀들이니 천재 유전인자의 대물림은 너무도 당연했다. 내가 닥터 함을 아끼는 이유중의 하나가 그는 자유인이다. 바람처럼 유연(flexible)한 그의 사고의 틀을 나는 좋아한다. 자연과 더불어 살다 보니 제도(System)나 고정관념을 넘어 훨훨 날아다닌다. 닥터 함은 자연을 무척 사랑하고 창조주를 믿는 참 신앙인이다. 출석하는 교회는 정해져있지 않지만 이웃사랑을 현실생활에 직접 적용하여 연결시키는 놀라운 포용력 소유자다. 우리가 만나면 생명으로 가는 건강을 연마하는데 마음을 같이 한다. 주위에 중병이나 성인병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들에게 뉴스타트를 전하는데 적극적인 게 우리의 태도다. 제일 아름다운 것이 생명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이 자연의 섭리를 믿기 어렵겠지만 삭아드는 여린 볕에 과실이 맺힌다는 사실은 생명법칙의 다른 측면이기도 하다. 대낮 땡볕에 꽃은 피울수 있으나 지는 석양의 잔열에 열매가 맺힌다면서 사람으로 비하면 우리의 지금이 바로 그때 라고 했다. 최고의 활동기 혹은 전성기(Prime Time)가 50대라며 할 일이 너무 많음에 비해 제한된 시간을 아쉬워 했다. 좋고 바람직한 의견을 교환 수용하면서 삶을 논하곤 하는 우리는 생명관리 차원에서 동역자의 관계임을 자랑으로 여긴다. 마음속 갈채를 보낸적이 있는데 그 한 예로 부인의 모교인 이화여대에 의롸하여 2명을 선발받아 UCLA에 유학시켜 3년째 학비, 생활비전액의 장학금을 부담해주고 있는 사례다. 추수 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명절이 오면 집으로 초대하여 손수 요리한 음식을 대접하면서 이국에서의 외로움을 달래주고 남은 음심을 봉지 봉지 싸주면서 힘내라고 격려도 잊지않는 닥터 함 내외다. 이것은 돈이 있다고 다 할수 있는 성질의 일이 아니다. 교회 장로나 집사같은 직분을 가졌다고 베풀 수 있는 쉬운 일이 아님을 고려할 때 아무도 모르게 이웃 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그 마음 바탕이 한없이 이타적이라 느껴졌다. 이런 닥터 함을 지켜보면서 나 역시 도전을 받아 규모는 작지만 귀영 장학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작은 등불의 따뜻한 사역은 가난하고 기회가 오지 않는 어두운 계층에 놓인 사람들을 비추일 것을 믿게 된것이다. 저소득층이 먹고 자고 갈 수 있는 두레 공동체와 뉴스타트 생명운동에 큰 관심자인 그는 다람쥐처럼 경쾌하게 헌신하고 있다. 장화신고 시멘트를 섞어 장독대도 만들고 휠췌어도 번쩍 들고 하반신 마비 환자도 거뜬히 안아 목욕탕에 옮기는등 민첩하게 봉사하곤 하는 모습을 지켜볼때면 그의 침묵에 고개가 숙여졌다. 없는 듯 있어 주로 듣는 쪽이지만 어쩌다 한마디씩의 발설은 금쪽같은 말 뿐이었다. 닥터 함은 웃기를 잘 한다. 노래 하기를 즐긴다. 노루처럼 잘 걷는다. 건강식을 잘 지키며 물도 잘 마시는 초등학생 같지만 불평이 없고 매사가 낙관적이다. 만나서 이보다 더 편한 친구가 또 어디 있을꼬! 나의 투병이 이런 소중한 만남으로 나를 접부쳐 준것, 축복이란 생각에는 변동이 없다. 농사를 하면서 많은 것을 배운다고 했다. 사람만큼이나 식물도 사랑을 원하고 사랑에 반응하는 예민한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성부 성자 성신의 삼위일체가 필요하듯이 모든 식물에는 인산, 질소, 카리움 등의 3M의 필수 요소가 흙에 있어야 식물이 잘 성장될수 있다고 했다. 특히 인간을 향해 맛잇는 과일을 생산하는 과실수는 그 이듬해 과일을 맺기위해 충분한 휴식을 필요로 한다고 했다. 과실의 당도를 높이기 위해 50도 이하의 겨울 기온에서는 400-1000 시간의 잠을 자야 그 이듬해 충실한 과일을 잘 맺는다고 했다. 이렇듯 식물도 인간도 휴식이 필요한 것은 생명법칙인데 이를 역행하면 병이 날 수밖에 없는 이치를 설파하였다. 식물도 인간처럼 의식이 있고 사랑에 반응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경이로움을 느꼈다. 그후 나는 대화하면서 화초들의 잎을 닦아주고 음악을 잔잔하게 들려주면서 자주 들여다 보기를 즐기게 되었는데 신기한 현상은 병던 나의 세포가 싱싱하게 물끼를 머금게 된 점이였다. 집 안팍의 화초들과 사랑의 교감이 일어난 것이였다. 생육 번성하는데 필요한 사랑을 하고, 필요한 쉼을 쉬도록 조물된 생명체이기 때문이 였다. 창조주를 신뢰하는 믿음 안에서의 휴식은 생명 그 자체이다. 어느것 하나 항의하는 목소리도 없고 자기 욕심만 챙기는 법도 없이 심겨진 장소에서 묵묵히 자연법칙에 순응하는 식물세계에서 나 역시 배운 게 많았다. 겸허히 옷을 벗는 희생과 양보와 사랑으로 생명의 젖줄 뿌리근원을 잎으로 푹 덮어 과다한 수분증발을 막아주기도 하는 우애는 얼마나 아름답고 평화로운 생명질서인가. 나무야 말로 진정 인간을 위해 헌신하는 작은 예수님 같았다. 낮에는 인간이 필요로 하는 산소를 내 뿜어 주고 밤이면 인체에 해로운 탄산까스를 다 가셔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몸이 고단한 적도 많았지만 생명식물과 함께 살아온 10년이 하루 같았다고 말하는 닥터 함의 고백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니깐 드디어 행복하다는 표정이였다. 금년에는 배만 해도 4가지, 싱고(Sinko) 호수이(Hosui) 20쎈츄리(Century), 21쎈츄리(Century)를 심었고 로얄티를 한 그루당 많이 내고 사서 심은 신 품종 핑크 슈가 레이디(Pink Sugar Lady)의 베일을 쓴 모습이 벌써부터 내 가슴을 부풀리고 있다. 맛도 있고 상품가치도 있기를 기도한다. 무엇보다도 키우시는 분은 오직 한분 여호와이심을 기억해야 할 일이다. 과목 하나 하나 자식 키우듯 하는 닥터 함의 태도에 창조주도 기뻐하리라 믿는다. 끝으로 닥터 함의 할아버지가 쓴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선각자로서 깊은 통찰력과 세계관을 조명해주어 세월이 많이 변한 지금에도 독자로 하여금 감탄하게 만든다. ...역사를 낳는 것이 아가페라면 세계는 한 말로 사랑하는 사람찾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역사가 무엇이냐?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 찾는 기록이요. 하나님이 그 아들을 찾는 기록이다. 이 사랑 찾이의 여행을 위하여 양식 준비를 하는 것이 경제며 문명이요, 이 따금 날카로운 느낌을 가진자가 자연속에 혹은 인생속에 하나님의 그 모습의 번쩍하는 한 그림자를 본 것이 예술이다. 그 벅찬 느낌을 말로 나타내면 시가 되고 그 즐거움은 소리에 나타내면 음악이 되고...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고향의 노래 (김재호 詩, 최현수 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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