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움의 미학 / 김영교

2011.08.13 03:47

김영교 조회 수:542 추천:126

어두움의 미학 어두움의 한 복판에는 정작 어두움은 비어있습니다. 캄캄한 밤 혼자 잠에서 눈을 떴을 때 깊숙한 적요 가운데 편안함에 둘러싸여 있음을 경험 할 때가 많습니다. 눈은 어두움에 익숙해지고 어두움 안에서는 어두움 한 색깔밖에 없기 때문에 마음까지 하늘로 끌어 올려 집니다. 어두움에는 껴안음이 있습니다. 그 껴안음 속에는 쉼이 있어 쌓인 긴장을 벗기고 안식의 옷을 입혀주는 편안한 품이 되기도 하지요. 어두움에는 평등함이 있습니다. 모든 존재의 높이, 깊이, 넓이의 차이를 넘어서는 어두움 하나로 묶어 우주의 광활한 품 하나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도시의 현란한 불빛에 취해 방황하는 현대인의 어리석음, 깨닫지 못하기에 세상 물정에 어둡다 합니다. 어두움 자체는 무서운 게 아니어서 통과 과정에 자신을 저항 없이 맡겨 의미를 끌어 내볼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두움이란 때론 사망이나 죄악, 추함을 상징하기도 하지요. 실족하기 쉬운 일은 어두움을 잘못 해석한 사고의 틀에 인간 스스로를 옭아맨다는 사실입니다. 습관성 고정관념일 때도 많습니다. 어두움의 세력이 판을 치는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고 살아가고 있음에도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게 무척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어두움에는 범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경건함이 있습니다. 눈을 감는 행위는 어두움에의 직행입니다. 어두움은 빛의 실체를 가장 확실하게 나타내 주는 힘이 됩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나면 그 가치를 사랑하게 되고 그 안에서 내 자신이 성장하게 됩니다. 하루가 밤과 낮, 인생이 생과 멸의 두 바퀴라면 밤과 멸의 길목에 잠시 멎었다고 해서 같은 시간의 분량과 길이를 싫다 배척하겠습니까? 삶 전체를 껴안고 보면 이 세상은 온통 소중하고 작고, 낮은 그리고 고마운 것들로 넘실댄다는 사실입니다. 그늘은 어두움 쪽에 속합니다. 인생의 날씨가 몹시 더울 때 빛이 차단된 곳, 그늘을 선호합니다. 왜냐하면 체온이 먼저 알고 쾌적함을 느끼기 때문이지요. 제게 소중한 분이 각막이식 수술 후 시력을 회복, 또 상실을 되풀이 하면서 5번의 수술을 끝내고 서늘한 곳에 머물고 있습니다. 시력 장애는 어두움입니다. 눈이란 인식의 창을 통하여 빛으로 나아갈 수 있는 통로를 상실하게 된것입니다. 생의 한가운데서 만난 여려 겹의 어두운 날들이 그분의 영혼을 맑게 헹구어 내고 있습니다. 젊은 때가 아니고 늙어서 못 보게 된 것을 오히려 고맙게 여기며 곁에서 지켜보는 이들에게 위로가 돼주고 있습니다. 어두움은 ‘감사 콩 같다’란 생각이 듭니다. 어두운 곳에서 물을 주면 <콩나물>이 되고 햇빛을 주면 <콩나무>가 되듯이 말입니다. 이래도 감사, 저래도 감사, 둘다 생명이기에 콩은 소중한 존재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콩 나무가 안되었다고 콩은 불평하지 않습니다. 콩 나물이 되었다고 뽐내지도 않습니다. 감사의 척도는 주어진 생명 안에서 순응하며 제 갈길을 최선으로 갈 줄밖에 모르는데 있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인간도 다를 바 없음을 깨닫게됩니다. 너무 밝음으로 인하여 바삐 움직이다보니 쉼이 없는 삶, 여러 곳으로 산만하게 빼앗기는 마음의 시선이 있습니까? 어두움 가운데 이루어지는 창조주와의 영적 교제는 더욱 선명하여 집중을 불러옵니다. 인격적이 되기도 하며 효과적인 독대의 분위기를 조성하게 되지요. 삶의 밤바다에서 우리는 매순간 위기의 파도에 부딪히며 난파하고 있습니다. 어두움도 삶입니다. 어두움마저 사랑의 대상인 인간을 위해 창조주가 지극한 애정으로 손수 만든 것이므로 선하고 아름답고 꼭 필요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몽땅 껴안을 때 창조주와의 관계가 회복되며 생명의 장(場)에 초빙된다는 말입니다. 어두움을 배척하던 자리에 포용의 자리로 옮겨가기를 원하는 기도가 우리 모두의 기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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