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남편의 가보 1호

2008.08.12 22:33

김영강 조회 수:1141 추천:149

  십여 년 전, 허릿병으로 꼼짝을 못 하고 누워 지내던 적이 있었다. 디스크라는 의사의 진단 아래 당장 수술을 받아야만 하는 상태였다. 그러니 한동안 부엌 출입을 못한 건 기정사실이 아니겠는가?
  팔팔 뛰어다닐 때도 나는 그리 부엌을 즐겨 찾는 편은 아니었다. 요리하는 시간보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훨씬 더 행복하기 때문이다. 남편은 이미 사먹는 반찬에 길들여져 있었고, 또 본인이 요것조것 입맛대로 골라 사오기에 반찬 걱정은 안 해도 되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동네 친구들이 부지런히 음식을 해서 날라다 주고, 멀리 있는 친구들까지 프리웨이를 달려왔기에 여느 때보다 반찬들은 푸짐했다.

  남편이 사오는 밑반찬 중에 멸치볶음은 필수다. 그런데 한번은 서울엘 갔다가 숙모님으로부터 멸치 한 박스를 선물로 받았다. 꽤 많은 양이었기에 여러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고도 냉동칸에 보관해서 오랫동안 먹었다. 물론 멸치볶음은 내가 만들었다. 요리 선수인 한 친구가 옛날 궁중에서 하는 식이라며 어찌어찌 하라고 강습을 해주었으나 나는 내 식대로 한다. 내 식은 보통 멸치볶음보다는 훨씬 달고 약간 바삭거리는 것이 특징이다. 볶은 멸치가 바삭바삭하면 일단 "실패"로 간주하는 분이 많으나, 우리 집은 그 반대다. 또한 너무 달다고 타박을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집에서는 이래야 성공작이다.      
    
    볶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먼저 간장과 설탕을 배합해서 숟가락으로 잘 젓는다. 설탕이 다 녹을 때까지 저어 꿀처럼 걸직하게 되면, 거기다가 멸치를 넣어 버무린다. 비율은 보통 여자 손으로 멸치 한웅큼(멸치가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올 정도로 덥썩)에, 큰수푼으로 간장 두 숟갈, 설탕 수북하게 세 숟갈 정도면 된다. 그리고 후라이펜에 올리브오일을 약간 두르고 펜이 좀 데워지면 버무려놓은 멸치를 넣고 볶는다. 멸치들은 사랑이 찐해서 서로 들러붙을 염려가 있으니 젓가락으로 살살 떼 주면서 볶아야 한다. 다 됐다 싶으면 깨소금을 좀 뿌려서 얼른 접시에 담는다. 멸치가 식으면 또 들러붙기 마련이니 식기 전에 다시 한번더 서로를 분리시킨다. 몇 개씩은 더러 붙어 있어도 좋다.
    그런데 제일 중요한 것은 불 조절과 볶는 시간이다. 멸치에서 탄내가 나면 그건 완전 실패작이니 요리사의 센스가 절대 필요하다. 간장과 설탕을 배합할 때 파, 마늘, 후추 등 갖은 양념을 가미하는 분들도 많지만 나는 그냥 조금이라도 쉽고 편한 조리법을 선호한다.  

  요리 전문가들께서는 “하하하”하고 웃으시겠지만, 어쨌든 남편이 이때까지 먹어본 멸치볶음 중에 이렇게 맛있는 것은 처음이라면서 우리 집 가보 1호라는 농담까지 덧붙였다. 나는 남편의 이 한 마디에 홀랑 넘어가 그 다음부터 멸치는 늘 내가 볶는다.  

  그 때, 요리 선수인 친구가 궁중식으로 멸치를 볶아서 공수를 해왔었다. 멸치가 빤딱빤딱하니 윤기가 자르르 흐르면서 색깔이 노리끼리했다. 내가 볶은 거무티티한 멸치볶음에 비하니 참으로 궁전과 어울리는 명품 멸치볶음이었다. 맛도 좋았다. 그런데 남편의 입맛에는 맞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너무 싱겁고 입에 들어가니 누굴누굴해서 감촉이 영 글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가 다시 볶아 보겠다고 했다. 내 바통을 이어받을 테니 그 비법을 전수해달라는 기특한 말까지 덧붙여 농담인지 뻔히 알지만 기분은 괜찮았다.  
  "간장이랑 설탕만 더 넣으면 돼요. 근데 설탕을 좀 많이 넣어야 돼요."
  "아니, 비법이 뭐이 그리 간단해."
  하지만 아깝게시리 명품을 변질시킬 수는 없으니 이건 이대로 먹자고 결정을 보았다.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탕탕탕 하고 뭘 깨부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도대체 뭘 저리 깨부수고 있을까? 그 날은 살살 움직일 만해 벽을 짚고 겨우 발걸음을 떼 부엌엘 당도하니 남편이 주먹보다 좀 큰 시커먼 덩어리를 도마 위에다 놓고, 드라이버를 곧추 세우고는 망치로 탕탕 내려치고 있었다. 영락없는 석탄 덩어리였다. 저게 뭘까? 나는 눈으로 보고도 그게 뭔지 몰랐다. 내가 뭐라고 하기 전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멸치가 달라붙어 돌덩이가 됐네. 설탕을 너무 많이 넣었나봐.”
  비법의 배합이 잘못되면 멸치볶음이 돌덩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미처 몰랐다. 명품 멸치볶음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데, 그가 멸치를 사서 직접 볶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한 일이었다.        
  "그러게, 가보 1호를 아무나 만들면 그게 뭐 가본가? 버려요. 버려. 그걸 깨서 뭐하려고 그래요?"
  "깨서 먹지. 이걸 아깝게 왜 버려."
  처음엔 칼로 팍팍 내려찍어 봤는데 잘 깨지지가 않아 드라이버에 망치까지 동원을 했다고 한다. 절구에다 탕탕 깨부수어 다시다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언뜻 들어 깨진 조각 하나를 입에 넣었다가 나는 그만 뱉어버렸다.  

  뭐든지 지나치면 이렇게 낭패를 불러온다. 허릿병에 걸린 것도 이일 저일 너무 무리해서 체력이 무너진 탓이었다.
  그 당시, 난 현실을 둘러보며 모든 것에 감사했다. 심지어는 나를 쉬게 해줌에 아픈 것까지 고마웠다. 다른 치료를 먼저 받아보고 이것도 저것도 다 소용이 없으면 그때 가서 수술을 받으라고 한, 주위의 만류도 더없이 고마웠다. 한 자루의 촛불이 온 방안을 밝혀주듯 한줌한줌의 사랑이 세상을 밝혀준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아프고 나니 햇빛에 빛나는 이파리 하나도 아름다워 보였다. 눈을 뜨면 콧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먼저, 한방치료를 받아보겠다고 했다가 주치의로부터 무식하다는 소리까지 들었지만 나는 지금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 그리고 남편의 가보 1호인 멸치볶음도 여전히 건재하다.

  한데 이런 경우는 멸치볶음이 아닌 멸치를 볶은 사람이 가보가 돼야 하는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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