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 백한 번째 편지

2008.09.15 06:32

김영강 조회 수:1421 추천:143

  초대장과 함께 느닷없이 한통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발신인의 이름을 보고 옥희는 어리둥절했다. 그는 김동추였다.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사십 년 전에 한 맹세를 지키기 위해 이렇게 편지를 띄웁니다. 만 육십, 회갑이 되면 당신을 꼭 만나리라고 굳게 다짐한 그 맹세입니다. 다가오는 3월 5일이 바로 그날입니다. 초대장을 동봉하오니 꼭 참석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몇 줄 안 되는 간단명료한 편지였다. 그리고 편지 끝에는 <101>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근 사십 년 만에 받는 백한 번째 편지였다. 육십 회 생일잔치가 열리는 장소는 엘에이 올림픽가에 있는 한미호텔이었다. 봉투에 명기된 발신처는 이곳에서도 부촌으로 알려진 산 마리노였다. 세 딸을 모두 출가시키고 옥희 역시 회갑인 나이에 생긴 일이다.    
  김동추가 미국에 살고 있다는 말인가?
  
  대학 시절, 옥희에게 백통의 편지를 보낸 김동추, 그는 애인도 아니었고 친구도 아니었다. 만난 적이라고는 서너 번도 안 되었다. 그것도 다시는 편지하지 말라는 그녀의 태도를 분명하게 밝히기 위함이었다. 그냥 혼자서 편지로 시작하여 편지로 끝난 완전히 일방적인 게임이었다. 사랑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집착이었다.
  그런데 당신이라는 호칭으로, 둘이 사랑하다가 헤어지면서 무슨 맹세나 한 것 같은 애매한 표현법을 써 옥희는 기가 찼다. 당신이라는 호칭 자체에도 기분이 나빴다. 편지를 읽는 남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모르는 것이 약이라고 그냥 몰랐더라면 좋았을 것을, 편지가 배달이 됐을 때, 하필이면 옥희는 외출 중이었다.
  토요일 아침이면 항상 골프장으로 향하는 남편인데 그날은 예약이 안 됐다고 집에 있었다. 마침, 서울에서 온 친구를 만나기로 한 날이라 옥희는 아침 열 시쯤에 집을 나섰고, 친구랑 하루종일 같이 돌아다닐 예정이었지만 그녀의 급한 일정 때문에 점심만 먹고 바로 헤어져 집엘 들어서는데 남편이 편지를 내민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생각조차 안 해본 사람인데도 김동추의 얼굴이 금세 떠올랐다. 남편은 그녀에게 바짝 다가서며 빨리 뜯어보라고 재촉했다. 편지를 같이 읽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 있어 어쩔 수가 없었다. 하늘을 봐도 한점 부끄럼 없는 그녀인지라 자신 있게 봉투를 남편에게 건네주었다.
  “김동추? 누구야? 오동추가 아니고 김동추야?”
  남편은 마구잡이로 봉투 한 귀퉁이를 북 찢었다.
  “왜 있잖아요. 옛날 학교 다닐 때 나한테 만날 편지했다는 사람. 언젠가 내가 얘기한 적 있죠?”
  이름도 잊어버린 척하고 모르는 사람이라고 시치미를 뚝 딸 걸, 그만 진실이 툭 튀어나와버렸다.
  “아! 당신 옛날 애인? 그 편지 백 토오옹....”
  편지 백통이라는 뒷말엔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실실 웃었지만 마디마디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속에서 뭐가 부글부글 끓는 소리였다. 갑자기 옥희의 언성이 높아졌다.
  “옛날 애인은 무슨 옛날 애인이야? 그런 식으로 뒤집어씌우지 말아요.”
  
  신혼 초에 남편이 자기 첫사랑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중학교 시절, 등굣길에서 매일 마주치던 한 여학생을 좋아했는데 말도 한번 못 붙여 보고 혼자 가슴을 앓았다는 이야기였다. 남편의 그 마음이 참 아름답고 측은하게 여겨졌다. 동시에 김동추 생각이 났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사이였기에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할 수가 있었다.
  “대학 때 미팅에서 만난 남학생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때 내가 너무 쌀쌀맞게 굴어 미안한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남편은 그녀가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말을 했다.
  “아니, 아무 반응이 없는 여자한테 미쳤다고 편지를 백 통씩이나 보내? 자기가 꼬리를 쳤으니까 그렇지.”  
  그날 밤, 옥희는 울고불고 소동을 벌였다. 옥희는 “날 의심하면 자기랑 살 수가 없으니 이혼하자”고 정말 얼마나 울었는지 나중엔 남편이 싹싹 빌어 무마가 되었다. 사실 그 당시, 옥희는 김동추의 편지를 은근히 엔조이했다. 그의 글솜씨는 혼자 보기 아까운 문학 작품이었다. 그것은 사랑을 읊은 긴 서사시였다. 음률까지 내재된 참말로 아름다운 서사시라 책으로 묶어 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어머니는 무슨 말을 썼는지 도대체 모르겠다면서 “이거 미친놈 아냐” 하고는 뜯지도 말고 없애버리라는 등, 도로 돌려보내라고 성화를 했으나 옥희는 꼬박꼬박 뜯어서 읽었다. 어머니 손에 들어가면 없어지기 일쑤니 식모언니가 받아두었다가 몰래 옥희한테 전해주곤 했다. 한번은 어머니가 그 미친놈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니 경찰에 신고해야겠다고 해 옥희가 펄펄 뛰고 말린 적도 있다.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편지에는 어김없이 일련의 숫자가 적혀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페이지 번호가 아닌 편지의 횟수 번호였다. 날이 가고 달이 가면서 그 번호는 70, 80 그리고 90이 넘었고, 드디어 100을 마지막으로 김동추의 편지는 더 오지 않았다.
  백 통을 채우려고 작심을 했던 것일까?
    
  남편은 몇 줄 안 되는 편지를 요리조리 훑으며 빈정거렸다.
  “글씨가 개발나발이군.”
  옥희가 보기에도 글씨체가 예전과 같지 않았다. 필체도 나이 따라 변하는 것인지 옛날처럼 반듯반듯하지가 않고 힘없이 구부러져 있었다. 초청장에 분명히 쓰여  있는데도 남편은 달력 한 장을 휙 쳐들고 다시 확인을 했다.
  “3월 5일이라... 아직 보름 남았군”
  그는 보름 동안에 취할 무슨 행동이나 구상하듯이 심각한 표정을 지은 다음, 갑자기 언성을 높이며 거칠게 말했다.
  “도대체 이 새끼가 주소는 어떻게 알았지?”
  어느새 김동추가 이 새끼로 호칭이 되었다. 그런데 옥희는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다.
  “왜 멀쩡한 사람을 새끼라고 해요?”  
  김동추를 두둔해서 한 말은 절대 아니다. 평상시에도 이 새끼 저 새끼라는 말을 함부로 쓰는 남편에게 늘 말버릇 좀 고치라고 했었다. 새끼라는 말에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그녀의 반응이었다. 남편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왜? 옛날 애인보고 이 새끼라고 하니 기분이 쓰라려? 같은 엘에이 바닥인데 만나면 될 걸 무슨 편지질이야.”
  그리고는 “아참! 그 새끼 편지 쓰는 거 좋아하지. 미친놈, 요새 무슨 회갑잔치야?” 하더니 옥희가 말할 새도 없이 초대장과 편지를 주머니에 구겨 넣고는 휭하니 밖으로 나갔다.  “어딜 가요” 하고 따라 나가는데 남편은 차를 타고 붕 떠나버렸다. 편지 뜯고, 읽고, 이 새끼, 저 새끼, 연발하면서 화내고, 남편 혼자서 다 끝내버렸다. 십 분도 채 안 걸린 시간이었다.
  저렇게 달려가 김동추를 만나 내가 누구의 남편이라고 밝히고는 뭘 어째보자는 심보일까? 설마, 봉투에 적혀 있는 발신지로 차를 몰지는 않겠지. 하지만, 한미 호텔에 전화를 걸어 회갑잔치에 대한 것을 알아 볼 수는 있다. 이럴 땐 속에선 화가 솟구치더라고 아내 앞에선 좀 침착한 척하면서 차근차근 대화로 풀어나가야 하는 것이 남편이 취해야 하는 행동이 아닐까?
  보통 남편들은 다 그럴 것만 같았다. 아내 없을 때 배달된 편지이니 그냥 쓱싹 입 씻고 모르는 척할 수도 있고, 허허 웃으며 ‘초대받았으니 우리 같이 가자구’ 하는 남편도 있을 것이다.
  
  집안끼리의 중매로 옥희는 남편을 만난 지 육 개월 만에 결혼을 하고 유학생인 그를 따라 미국 땅을 밟았다. 그는 맞선을 본 다음 날부터 적극성을 띠고 접근을 했다. 평생 찾아 헤맨 배필을 만난 듯이 매일 전화를 걸었고 또 집으로 찾아와 옥희보다도 먼저 부모님으로부터 거의 만점인 점수를 따냈다.  

  사실, 따지고 들면 남편보다는 김동추가 훨씬 더 유리한 결혼 조건들을 가지고 있었다. 김동추를 어릴 적부터 잘 안다는 같은 과 친구인 김동미가 그랬다. 그는 기가 막히게 머리 좋은 수재이고, 대대로 내려오는 땅 부잣집 외아들로 부모는 둘다 대학교수라는 것이었다. 부모님도 아주 좋은 분들이고 김동추 또한 한없이 착하고 순수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했다. 그러나 그의 외모는 너무나 볼품이 없었다.

  김동추가 파트너로 지정이 되었을 때, 옥희는 ‘아이구 아니올시다’ 하고 실망이 컸었다. 체격이 왜소하고 키가 아주 작았기 때문이다. 유난히도 하얀 얼굴이 어찌나 창백해 보이는지 어디 요양소에서 갓 나온 환자 같았다. 거기다가 그는 하얀 테 안경을 끼고 있었다. 맨 처음 편지가 계속 학교로 배달이 되었을 때, 오죽하면 친구들이 하얀 멸치라는 별명을 붙였을까?
  거기다가 꾸어다놓은 보릿자루처럼 통 말을 안 해 정말 재미없고 지루했다. 수재만 모인다는 일류공대 학생인데도 옥희의 눈에는 그가 바보처럼 보였다. 한데 어떻게 그런 글귀들이 나오는지 옥희는 편지를 읽을 때마다 감탄을 했다. 외모에서부터 선입감을 가졌기에 그의 진가를 몰라본 것일까?
  지금 생각하니 그 당시, 옥희는 참말로 철이 없었다. 키 작은 남자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도 은근히 외모를 중요시했다. 언젠가 김동추가 집으로 찾아와 대문 밖에서 서성거리다가 공교롭게도 어머니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 때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무슨 남자애가 그리도 비리비리하냐? 바람만 불어도 쓰러질 것 같더라. 걔 어디 아픈 거 아니니? 나가서 돌려보내. 원 세상에, 널 처녀로 늙혔으면 늙혔지 그런 놈은 절대로 안 된다.”
  물론 그는 옥희로부터도 문전박대를 당했다. 지금 생각하니 참 안됐다. 김동미는 키가 작은 것이 당장은 흠이 되겠지만 살아가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으니 잘 생각해 보라면서 옥희를 설득하려고 노력했었다. 우선 한번 사귀어 보라는 것이었다. 그 때는 그녀가 너무 속물 같아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으나 세월이 지난 후, 딸들을 시집보낼 때는 옥희 역시 속물이 되어 있었다.

    어린 나이에 일찍 철이 든 동미가 참 대견스럽다. 대학 졸업 후, 어디 취직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가끔 서울엘 나갔었는데도 그녀의 소식은 바람결에도 들은 적이 없었다. 자그마하고 오동통한 옥희에 비해 그녀는 바짝 마른 몸매에 키가 아주 컸으며 체격 또한 큰 편이었다. 얼굴에는 늘 우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고, 어떤 땐 슬퍼 보이기까지 했던 그 표정이 옥희의 기억에 뚜렷이 남아 있다.  
  김동추와 김동미, 혹시 무슨 인척 관계라도 되나 싶어 한번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우리 엄마가 그 집 찬모였어. 일하는 사람이 여럿 있었는데 우라 엄만 음식 담당이었어. 쉽게 말하면 그냥 식모지 뭐.”하고 말했다. 상상조차 못한 김동미의 대답에 옥희가 도리어 미안해 눈 둘 바를 몰랐었다. 스산한 가을바람에 낙엽이 쓸려가듯 그녀의 표정은 쓸쓸했다.

  혹시 내 주소를 김동미를 통해 안 것이 아닐까? 김동미와는 어떻게 연락이 닿았을까?
  남편에게 복수하고 싶어 김동추 생각을 일부러 떠올렸는데 시간이 갈수록 잡념들만 일어 머리가 혼란했다.  원인 제공을 한 것은 옥희 자신이지만 그 일을 처리하는 남편의 행동이 너무나 조잡해 예전 일까지 겹쳐지며 실망감은 시간이 갈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옥희가 서울엘 가기 바로 전날 밤이었다. 큰애가 한 살 때였으니 벌써 삼십 년도 더 지난 일이다. 새벽 비행기였기에 짐을 다 챙겨서 아예 차에 실어 놓았었다. 잠이 안 오는지 이리뒤척 저리뒤척 하던 남편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자기 서울 가면 그 사람 안 만날 거지?”
  순간적으로 머리가 회전하면서 불쾌감이 전신을 휩쌌다. 남편이 김동추를 대상으로 그런 생각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 못한 일이다. 화가 솟구쳐 올랐으나 감정을 꾹꾹 누르면서 모르는 척 시침을 뚝 따고 물었다.
  “그 사람이라니... 그 사람 누구우--?”
  “그 사람 누구” 하는 끝말엔 짜증이 잔뜩 묻어 있었다. 남편은 당당하게 말했다.
  “그, 편지 백통 말야.”
  참말로 기가 찼다. 속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목구멍으로 불끈 치솟았다. 한국 가는 것 다 집어치우고 한바탕 해볼까 하고 잠시 망설였다. 꼭 나가야 할 이유가 없었다면 그렇게 한판 치고 안 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님이 첫손녀를 눈빠지게 기다리고 있고 친구들에게도 철석같이 한 약속이 있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가슴을 꾹꾹 누르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남편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고, 그날 밤은 별 소동 없이 잘 넘어갔다.

  그러나 이번엔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조금 전에 남편이 취한 행동, 그리고 지금 밖에 나가 옥희의 얼굴에 똥칠이라도 하는 추태를 부리고 있다면 그건 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김동추의 멱살을 잡고 한 대 패주기라도 할 것 같은 기세로 휭 나가버린 남편의 표정이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면 김동추가 자신을 얼마나 불쌍하게 생각할까? 내가 저런 사람하고 평생을 살았단 말인가? 삼십오 년이라는 세월을 살고도 아내가 어떤 여자인지를 모른단 말인가? 허무했다. 평생을 남자라고는 남편 하나밖에 모르고 살아온 옥희다. 사실, 김동추 외에도 옥희의 주위에서 서성이는 남자들이 더러 있었다. 허나 옥희는 눈하나 깜짝 안 했다. 남자들이 만나자고 하면 그냥 만나주고, 저녁도 얻어먹고 영화도 보고 등등, 심지어는 옷까지 얻어 입고하는 그런 친구들을 옥희는 아주 추하게 생각했다.
  “꼭 좋아하고 사랑해야만 만나니? 그냥 재밌잖아. 이런 남자 저런 남자 만나봐야 결혼상대도 잘 고를 수가 있는 거야. 머리 좋은 애가 왜 그쪽으론 그렇게 맹탕이니? 참 답답하다 답답해. 너처럼 그렇게 도도하게 구는 거, 남자들이 좋아하는 줄 아니? 천만에 말씀. 도망가기 딱 안성맞춤이지.”
  어느 친구가 한 말이다. 지나고 보니 그 친구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이왕 의심을 받을 바에는 놀기라도 했더라면 억울하지나 않지. 생각할수록 분하고 원통했다.
  버선목을 뒤집듯 싹 뒤집어서 속을 깡그리 보여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꼬. 분명 남편의 말투에는 옥희가 그간에 김동추랑 만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내포되어 있었다. 이판사판 한판 벌여야겠는 쪽으로 생각이 굳어졌다. 그렇게 날 의심한다면 더 이상 살 수가 없으니 이혼을 하자고 그럴 것이다. 편지 백통 이야기를 꺼냈던 그날 밤처럼. 그러면 남편이 또 싹싹 빌까?

  갑자기 ‘박영선’이라는 이름 석 자가 머리에 떠올랐다. 그 동안 아주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그 여자의 이름이 금세 생각나 옥희 자신도 의아스러웠다. 근 삼십오 년을 사는 동안 남편의 입에서는 아직 한번도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기에 옥희도 모르는 척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별 불만 없이 살아오면서 그냥 잊어버리고 있었던 일이기도 하다.    
  결혼한 후, 이십 년도 더 지난 다음에 옥희는 총각시절에 있었던 남편의 연애사건을 알게 되었다. 미국을 방문한 시이모로부터였다. 옥희는 부엌에서 점심 준비를 하고 있었고, 오랜 만에 만난 시이모와 시어머니는 거실에 앉아 웃음꽃과 이야기꽃을 한껏 피우고 있는 중이었다. 목청이 큰 시이모의 음성은 옥희의 귀에도 뚜렷하게 들렸다. 그리고 음성을 낮추며 두런두런 말하는 소리도 대충은 귀에 들어왔다. 이상하게도 그날 옥희는 자꾸만 그들의 대화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러다가 상민이라는 남편의 이름과 박영선이라는 여자가 그들의 화제에 오른 것을 그만 엿듣게 된 것이다. 거실을 향해 귀를 쫑긋 세웠다. 위치 상 그들은 옥희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먼 옛날 일이라 옥희에게 별 신경을 쓰지 않았는지 남편의 과거를 실타래 풀 듯 술술 풀어내고 있었다.
   “영선이가 며느리가 됐더라도 언니한테 잘 했을 거야. 근데 언니, 걔도 괜찮았는데 왜 그렇게 반대를 했어?”
  “영선이가 누구냐?”
  시이모는 소리를 낮춘 듯했으나 시어머니는 정말 모르겠다는 투로 또렷이 말해 옥희는 ‘영선’이라는 이름을 분명하게 들을 수가 있었다.  
  “왜 그 애 있잖아. 내 제자 박영선이......”
  시이모님은 한때 여학교 교편생활을 한 적이 있다. 이야기를 종합해보니 박영선이라는 여자는 시이모님의 제자였고 남편은 시이모님을 통해서 그 여자를 알게 된 것 같았다.
  “너는 기억력도 좋다. 그게 언제 적 얘긴데 아직 그 애 이름을 기억하고 있니? 그건 네가 모르는 소리다. 내가 반대를 한 게 아니고 지네들이 헤어진 거야. 눈치를 보아하니 상민이보다도 걔가 일방적으로 더 좋아한 것 같더라.”
  “언니도 참... 걔가 일방적으로 좋아했다면 그렇게 오래 사귈 수가 없지. 걔네들 일은 언니보다 내가 더 잘 알아. 둘이서 얼마나 좋아했는데 그래. 사이도 꽤 깊었었고.”
  잠시 얘기가 끊긴 듯하더니 시이모의 음성이 다시 이어졌다.
  “자기네들이 헤어졌다 하더라도 형부랑 언니가 반대한 입심이 상민이한테 작용을 했을 거라고. 어쨌든 상민이가 영선이한테 못할 짓 했어. 그 후 나한테는 통 연락이 없었으나 소문 들으니 시집을 아주 잘 갔대.”  
  남편에게 그런 과거가 있을 줄은 참말로 상상 밖이라 시이모의 말을 들으면서 옥희는 기분이 묘했다. 그렇게 오래 사귀었다는 말에는 얼마나 오래 사귀었을까 하는 의문도 일었다. 황량한 바람이 몰아치는 허허 벌판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온몸에 맥이 다 풀려버리는 것 같았다. 허지만 그 여자가 시집을 잘 갔다는 말에는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날 밤, 옥희는 곁에서 곤히 자는 남편의 숨소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져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며칠을 계속해서 그랬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옥희가 먼저 물어볼까 하고 생각을 해보기도 했으나 귀를 쫑긋 세우고 엿들었다는 사실도 부끄러웠고, 그 후 시간이 흐르면서 옥희의 마음도 잔잔하게 가라앉아 모르는 척하는 것이 낫겠다는 쪽으로 결론을 짓고 말았다.

   물론 그 땐 박영선이와는 완전히 청산을 한 다음이었겠지. 옥희는 남편이 자신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꼈고 그의 사랑에 확신을 가지고 결혼을 했다. 이제는 부부라는 인연이 단단히 매듭을 지어 도저히 풀 수가 없게 되었다.    
  하지만, 옛날에 누굴 사랑한 적이 있노라고, 그런 말은 능히 할 수 있는 남편인데 그 이야기를 일체 입밖에 꺼내지 않은 것이 이상했다. 그러나 잊고 살았다. 아주 가끔은 생각날 때도 있었으나 담담한 마음으로 지나칠 수가 있었고 반면에 무슨 비밀이나 간직한 양 남편을 바라보며 혼자 입가에 미소를 띄우는 여유도 생겼다.
  옥희는 씩 웃었다. 진짜 알맹이는 쏙 빼놓고 중학교 때 한 여학생 때문에 어쩌고저쩌고 한 남편의 술수에 넘어가 편지 백통 이야기를 한 자신이 우스워서다.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란다더니 바로 그 격이 아닌가? 예전에는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한 사실들이 갑자기 머리에 떠오르며 다시금 남편이 괘씸했다. 혹시 자기가 서울 나가면 그 여자를 만나기 때문에 나도 그런 줄 알고 “서울 가면 그 사람 안 만날 거지?” 하는 그따위 소릴 한 것은 아니였을까?
  까마득한 옛날 일까지 시시콜콜 생각이 나 괘씸하고 또 괘씸했다. 그리고 날을 세우듯 마음을 갈았다. 남편의 과거를 한번 터뜨려 보리라 하고. 당신 옛날에 죽자사자하고 연애한 여자 있었다며? 꽤나 깊은 사이였다면서. 당신이 그러니까 나도 그런 줄 알아? 나하고 삼십오 년이나 살았는데도 아직도 내가 어떤 여자인지 모르겠어? 난 아냐. 난 차원이 다르다고. 그래도 그 여자 시집만 잘 갔다 그러더라. 그 여자 이름이 박영선이라며? 이렇게 이름까지 정확히 들이대고 몰아세우면 남편은 어떤 얼굴을 할까? 깜짝 놀라겠지. 너무 놀라 아마 뒤로 나자빠질 거야.
  
  벼르고 벼르며 남편을 기다리고 앉았는데 시간은 왜 그리 더디 가는지. 가만히 앉았자니 별의별 생각이 다 났다. 남편이 박영선이한테 달콤한 말로 살랑거리는 장면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옥희를 향해 적극적으로 다가온 것과 마찬가지로 박영선이한테도 그랬을 것이다. 중학생 때는 좋아하는 여학생한테 말 한마디 못 붙여보고 가슴을 앓았다는 남편이었으나 옥희에겐 그 반대였다. 지나친 표현이 될지 모르겠으나 그는 여자 다루는 솜씨가 능수능란했다. ‘예쁘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사랑한다’는 말도 자연스럽게 할 줄 아는 남자였다. 사소한 일에도 일일이 신경을 써주며 아주 자상하게 옥희를 대해 주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자상한 성격이 가끔은 쪼잔하게 변모를 해버려 탈이지만 말이다. 또한 그의 해박한 지식과 풍부한 유머는 옥희를 아주 재미있게 해주었다. 정말 다방면으로 아는 것이 많아, 만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옥희는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어찌나 웃기는지 웃기도 많이 웃었다. 그러다가 둘 사이가 급속도로 진전되어 옥희는 연애 한번 못 해보고 처음 선본 남자를 남편으로 맞았다.
  그런데 남편은 어떤가? 박영선이 말고도 아마 여러 명의 여자하고 사귀었을 것이다. 박영선이와는 오래 사귀고 괘 깊은 관계였었다고? 옥희는 자신을 만나기 전의 남편 나이를 거꾸로 세면서 손가락을 꼽아 보았다. 불쾌감에 가슴이 답답했다. 맘속으로라도 남편에게 복수하고 싶어 다른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애를 써보았다. 그러나 아무런 추억 거리가 없는 옥희다. 있다면 그것은 김동추의 편지 백 통뿐이다.
    
  옥희는 컴퓨터를 켰다. 잡념을 끊어버리는 데는 컴퓨터가 최고다. 이미 끝을 낸 번역이지만 문장을 더 다듬어야 할 곳이 없나 하고 다시 검토를 했다. 한데 정신 집중은 안 되고 컴퓨터 화면엔 밉살스런 남편의 얼굴만 자꾸 부각되었다. 근 이십 년 동안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을 하다가 오 년 전에 회사를 그만둔 후, 옥희는 지금 번역 일을 맡아 아주 즐기며 돈을 벌고 있다.
  회사가 합병을 해 타주로 이전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그만두게 되었을 때, 남편은 당장 굶어죽기라도 할 것처럼 얼굴이 사색이 되어 안절부절못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내색이 심했다. “아이구 어떡하지, 아이구 어떡하지”를 연발하면서 이리 돌아눕고 저리 돌아누우며 한숨을 푹푹 쉬어대곤 했다. 사실 그간에 남편 못지않게 월급을 받던 옥희다. 그렇지만 그 월급이 끊어진다 하더라도 생활에는 별 지장이 없는 상황이었다. 살림의 규모를 늘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딸은 이미 출가를 한 후였고 막내도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시기였기에 옥희는 차라리 잘된 것 같았다. 나이가 들수록 능력의 한계를 느껴 가끔은 이제 그만둘 때가 됐나 보다 하고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다. 딸들도 적절한 시기에 잘 그만두게 된 것이라고 엄마를 위로했다. 회사가 계속 그대로 있었더라면 본인의 의사로는 그만두지 못했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 동안 엄마 고생했는데 이제는 자기네들이 생활비를 보태겠다고 해 말만 들어도 흐뭇했다. 그런데 남편은 밉살스런 소리를 하며 옥희 속을 긁었다.  
  “왜 애들보고 생활비 얘기하고 그래?”  

  남편은 참 이상한 면이 있다. 무슨 때에 아이들이 큰 선물이라도 하면 그것을 마음 아파하는 것이다. 다음엔 이렇게 비싼 것 하지 말라고 아주 정색을 하고 말을 한다. 카드에 금일봉이라도 들어있으면 카드만으로도 족하니 돈은 도로 돌려주려 한다. 아이들이 청소를 열심히 하고 있어도 청소하는 사람이 다 하는데 왜 애들 고생시키느냐고 안쓰러워하던 남편이다. 그래서 부부싸움도 했으나 결국 남편은 옥희에게 모든 것을 다 맡겼다. 이제 딸들은 다 반듯하게 잘 컸고 셋 다 엄마와는 친구처럼 친하다. 옥희는 남편에게 한바탕 난리를 쳤다.
  “애들 힘든 것만 가슴 아프고 와이프는 평생 힘들어도 돈만 벌어오면 된다 그거야? 내가 돈 잘 벌어 오니까 그 동안 나하고 산 거야? 이제 직장 떨어졌으니 이혼이라도 하고 싶어? 당장 생활의 위협을 받는다 하더라도 남자가 어떻게 그딴 식으로 안달을 해? 내가 얘기했잖아. 앞으로 당신 혼자 벌어도 생활에는 지장이 없다고 말야. 왜, 나는 집에서 놀면 안 돼?”
  말을 한껏 불려 과장을 해 쏟아내면서 옥희는 남편을 다잡았다. ‘그래, 내가 몸이라도 팔아서 돈만 벌어오면 좋겠지?’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넘어왔으니 그건 잘 참아냈다. 그런데 남편이 그녀가 번역 일을 맡게 됐다고 하니 어찌나 좋아하는지 옥희는 또한번 씁쓸한 기분을 맛보아야만 했다.
  그 동안 직장생활하느라 힘들었는데 또 금세 일거리가 생겨 어떡하지? 좀 쉬었다가 일을 맡지 그래. 이렇게 말을 했다 하더라도 번역 일을 안 맡을 옥희는 아니다. 한바탕 난리를 치며 교육을 시켰는데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만큼 남편은 솔직하고 단순하다. 매사에 너무 신경을 쓰고, 완전주의를 고집하는 자신의 복잡한 성격보다는 오히려 더 좋은 성격이라는 것을 옥희는 가끔 깨닫는다. 그런데 ‘박영선’ 이야기는 평생을 입 다물고 있으니 이상하지 않은가? 정말 잊어버렸나?

  점심도 안 먹고 훌쩍 나간 사람이 해가 서산에 걸렸는데도 소식이 없었다. 남편을 기다리고 있는 자신이 처량해졌다. 옥희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큰딸 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집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마누라 없는 텅 빈 캄캄한 집에 들어서는 남편을 그려보고는 아주 고소해 했었는데 이상하게도 이십여 분 드라이브를 하는 동안에 치밀던 울화가 점점 가라앉았다. 그리고 ‘박영선’ 운운하며 잔뜩 벼룬 자신이 가소로워 웃음까지 터져나왔다. 남편으로 하여금 지난 추억을 돌이키게 해서 이로울 게 뭐 있겠는가?
  
  “할머니이--” 하고 좋아 날뛰는 손자들을 품속에 안으니, 이게 바로 행복이구나 싶었다. 큰딸은 옥희에게 친구 만나고 오는 길이냐면서 아빠 들어오실 시간 다 됐다고 뜻밖의 말을 했다. 남편은 사위랑 같이 골프를 치러 간 것이었다.    
  “아까 낮에 이 서방이 아빠랑 통화했거든요. 친구 만나 엄마 늦게 들어오신다고 했는데 어떻게 일찍 끝났네요.”
  옥희가 집구석에 앉아 혼자 지지고 볶고 하는 동안에 남편은 탁 트인 푸른 초원을 훨훨 날아다녔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이런저런 망상으로 복잡했던 머리가 이제야 정리가 되었다. 사위의 전화를 받고 ‘얼씨구 좋구나’ 하면서 골프채를 차에 싣고 막 떠나려는 차에 우체부를 만났을 것이다. 그리고 편지들을 갖고 들어와 겉봉을 훑어보는 중에 옥희가 들어온 것일 게다.
  드디어 차가 멎으며 남편과 사위의 모습이 거실 창밖을 통해 시야에 들어왔다. 멀찌감치서 보니 장인과 사위가 같은 또래의 친구 같다. 사위보다는 머리 하나가 더 있는 남편의 큰 키도 오늘 따라 왠지 멀대같이 보여 꼴불견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 아버님이 싱글 쳤어요. 싱글”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인사도 생략하고 사위가 한 첫마디였다. 싱글이란 남편이 아직 한번도 못 쳐본 점수 아닌가? 옥희의 출현이 뜻밖이라는 듯 남편은 잠깐 주춤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말했다.
  “요게 김동추 머리통이다 하고, 때리니까 딱 딱 하고 어찌나 공이 잘 맞던지... 어허어 쏙 씨언해.”  
  큰 소리로 목청을 돋우고는, 신이 나서 죽겠다는 듯이 그는 골프 치는 시늉을 했다. 큰딸과 사위는 김동추가 누구냐고 물었다. 남편은 “그런 사람이 있다아아—” 하고 노래를 부르듯 뒷말을 길게 늘어뜨리고는 두 팔을 쭉 뻗어 휘두르면서 계속 골프 치는 시늉을 했다. 있는 힘을 다해 진짜 김동추의 머리통을 갈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더니 갑자기 행동을 딱 멈추고 옥희의 눈에 시선을 꽂고는 마디마디를 꼭꼭 누르면서 힘주어 말했다.
  “어쩔 거야? 갈 거야? 말 거야. 가고 싶으면 가라구. 얼마든지 가라구. 3월 5일이면 아직 보름 남았으니 그 안에 만나봐도 되겠네.”
  남편의 끝말에 다시금 화가 치솟았다. 웬만큼 잔잔해진 옥희의 감정에 남편이 돌멩이를 던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사위 앞이라 어쩔 수 없어 꾹 참았다. 남편을 잠깐 꼬나보고는 맘속으로 소리를 지르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구, 덩치 값도 못하는 양반아. 당신 나한테 열등의식 있어? 아니면 개 눈엔 똥만 보인다더니 당신이 옛날에 박영선이 이하 여러 여자들하고 놀아난 결과, 얻은 결론이 겨우 그거야?
  큰딸과 사위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둘이서 눈빛으로만 표정을 주고받고 있었다. 옥희는 사위를 향해 지극히 부드러운 어조로 말머리를 돌렸다.
  “이 서방 배고프지? 저녁 다 됐으니 어서 씻고 와.”        
부엌을 향하면서 옥희는 한번 더 속으로 말했다. 이번에는 조용히. 그래. 갈 거야. 왜 못 가. 당신이 간다면야 같이 갈 수도 있어. 가서 멋지게 연극 한번 하자구. 아마 지금 그 사람 부동산 재벌이 됐을 걸. 그리고 S공대에서도 손꼽히는 수재였으니 분명히 여기 칼텍 정도는 나왔을 거고, 또 박사학위도 받아 대학교수가 됐을 거야. 그 부모도 둘다 대학교수였거든.
  만일 입장이 바뀌어 박영선이가 그런 편지를 보냈다 하더라도, 아니 남편 눈앞에 나타났다 하더라도 옥희는 저렇게 채신머리없이 굴지는 않을 것이다. 정말 편안한 감정으로 여유 있게 대할 자신이 있었다.  

  날짜는 하루하루 잘 넘어가고 있었다. 김동추 생각이 자꾸 났다. 옥희는 자신이 김동추에게는 편지를 쓰는 대상에 불과했지, 그가 자기를 사랑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끄덕도 안하는 옥희에게 백 통의 편지를 보낸 그 자체는 사랑이 아닌 집념일 수도 있다. 만일 그가 옥희를 진정 사랑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한때의 감정에 불과하다. 지금 그는 괜찮은 여자를 만나 아주 잘 살고 있을 것이다.
  하얀 멸치 같던 비리비리한 모습도 이제는 지위와 부에 이력이 붙어 중후하고 듬직하게 변해 있을 것이다. 쌀쌀하기 그지없고 도도하고 교만한 옥희에게 차인 것이 정말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만일 기적이 일어나 옥희라는 여자와 결혼을 했더라면 어떡할 뻔했지? 아휴, 생각만해도 스트레스다. 초조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면서 만날 아내 눈치만 보다가 바짝바짝 말라 비틀어졌겠지.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하며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것이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매일매일 이어졌다. ‘내가 뭐 잘났다고 김동추를 그리도 무시했을까?’ 하고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만일 만나게 되면 ‘그때는 참 미안했다’는 말을 하고 싶어졌다. 초대장을 받을 때의 불쾌했던 감정이 많이 누그러지고 있었다.  

  3월 5일이 코앞에 닥친 어느 날, 옥희는 뜻밖의 편지를 또 한 통 받았다. 발신인은 김동미였다. 아니, 김동미가 웬일로? 동시에 발신처로 눈길을 주니 김동추가 보낸 편지와 같은 주소였다. 순간, 강한 의문 하나가 번개처럼 번쩍하며 뇌리를 스쳐갔다. 초대장을 받은 후부터 무슨 까닭인지 김동미가 김동추의 얼굴에 겹쳐져 자꾸만 머리에 떠올랐었다.
  봉투를 뜯는 옥희의 손이 떨렸다. 회갑연이 사정이 여의치 않아 취소되었다는 간단한 공문 편지와 함께 김동미가 친필로 쓴 편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사십 년이라는 세월의 벽은 이미 다 무너져 내렸으나 그녀의 글씨가 흔들린 흔적은 있었다.      
  
  옥희야, 동추 씨의 건강이 갑자기 악화돼 회갑연이 취소됐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태가 아주 좋아 의사의 허락 하에 추진한 일이었는데 말야. 그이는 지금 병원에 있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할게. 할 얘기가 정말로 너무너무 많아.
  
  저 만치서 스무 살 적의 김동추가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허약해 손가락으로 톡 건드리기만 해도 쓰러질 것 같았다. 김동미가 슬픈 얼굴로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
  고요한 집안 분위기가 갑자기 무거운 침묵으로 변해 옥희의 가슴을 짓눌렀다. 그녀는 큰 숨을 한번 들이쉬었다가 휴우하고 내쉰 다음, 마음을 가다듬고 수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편지 끝에 적혀있는 전화번호를 조심스럽게 눌렀다.

  <2009 년 미주문학 봄호>



* 작가 노트

   편지 한 장의 사건으로 벌어진 60대 부부의 감정과 그로 인한 갈등, 이해, 그리고 끈끈한 정과 연민 등에 중점을 두고 이 소설은 쓰여졌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너무나 상반되는 그들의 성격, 사고방식, 또한 세상을 살아가는 자세 같은 것을 묘사하기 위해 김동추와 박영선은 그냥 맛배기로 등장시킨 인물에 불과합니다.
소설의 맛을 더해주기 위해 두 사람을 등장시킨 것인데, 도리어 그들과의 관계에 더 흥미를 유발한 점, 다음부터는 작가가 필히 유념하겠습니다.

   김동미가 김동추와 결혼을 한 사실은 독자 여러분이 다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면서 오랜 세월 동안 소식 한자 전하지 않은 김동미의 심정도 감지를 하셨겠지요?
마지막에 옥희가 전화를 건 점은, 이제 곧 세 사람이 만난다는 뜻입니다. 김동추가 위독하지만 옥희를 알아보는 상황에서입니다. 그리고 세 사람의 마음이 융화되어 아름다움으로 승화되는 결말을 맺는 거지요. 그 다음에 김동추는 이 세상을 하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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