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이 사라지다

2016.07.07 13:52

김영강 조회 수:326

 지갑이 사라져버렸다. 비상금을 간직해 두는 가죽지갑이 천 달러의 현금과 함께 간데온데없이 자취를 감춰버린 것이다. 오래 전에 코리아타운에 나갔다가 산 지갑이다. 베이지 색 바탕에 한국의 여인 풍속도가 그려져 있고 아기자기하면서도 멋지게 디자인이 돼 있어 내가 아끼는 물건이기도 하다.

분명히 안방 화장대 작은 서랍에 넣어두었었다. 혹시 다른 데에다 두었나 하고 기억을 되살려 볼 필요조차 없다. 티나 짓이기 때문이다. 티나는 지금 고등학생으로 하나밖에 없는 내 딸이다. 무슨 엄마가 딸을 그리 쉽게 도둑 취급을 하느냐고 질책을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분명히 확신한다. 곧 졸업여행 스케줄이 잡혀 있으니 더 분명하다. 어젠 뭔가를 잔뜩 사서 양손에 쇼핑백을 들고 들어왔었다.

티나가 열 살이 되던 해에, 나는 아이가 살짝살짝 돈을 훔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린아이일 적에 호기심으로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서 자연히 바로잡아진다고들 하기에 그럴 줄 알았으나 딸의 도벽엔 가끔씩 발동이 걸렸다. 커가면서 한참은 잠잠했기에 맘을 놓은 적도 있다. 큰돈은 아니었다. 그때마다 티나는 끝까지 발뺌을 하며 억울해 죽겠다는 듯이 울고불고 발악을 부렸다. 어릴 적에 매를 들어서라도 아이를 다스려야 한다는 나의 주장을 무시하고 남편은 엄마가 어찌 아이를 믿지 못하느냐면서 도리어 딸 편을 들었다. 바깥으로부터는 그런 일로 인해 아직 낭패를 당한 일이 없기에 그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의 속마음을 모른다.

어릴 적부터 티나는 아빠하고만 붙어다녔다. 필요한 것이 있어도 엄마랑은 절대로 같이 외출을 안 했다. 퇴근 후 아빠가 집에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좋아라고 같이 나갔다. 워낙에 말이 없고, 자상한 성격이 아닌 남편인데도 딸한테는 아이가 원하는 건 무조건 다 해주었다. 컴퓨터에 매달려 있다가도 아이가 어딜 가자고 하면 두 말 없이 데리고 나갔다. 백화점에 가서 옷을 살 때도 티나는 아빠랑 동행을 했다. 반면에 엄마의 말에는 무조건 ‘노오’였다. 뭐 먹을래, 뭐 사줄까 해도 대답은 항상 부정문으로 일관했다. 부정문을 뛰어넘어 거짓말까지 했다.

어느 날, 백화점에 갔다가 아이가 좋아하는 인형을 사왔었다. 텔레비전 광고를 보면서, 흥분된 얼굴과 말투로 “아--, 나 저 인형 갖고 싶어.” 하고 티나가 말한 적이 있는 바로 그 인형이었다. 분명히 갖고 싶어 못 견뎌하는 그런 표정이었었다. 그런데 아이는 싫다고 하면서 인형을 내던졌다.

“엄마는 어떻게 이딴 걸 사오지? 너무너무 보기 싫어. 엄마 눈은 왜 그래?”

“티나야, 네가 이 인형 갖고 싶다고 그랬잖아.”

“노오--. 내가 언제 그랬어?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바로 저딴 인형이야.”

그러더니 그냥 앙앙 울기 시작했다. 자기가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한다면서 “엄마는 거짓말쟁이, 엄마는 거짓말쟁이” 하고 소리를 질렀다. 커가면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엄마의 말에는 일일이 트집을 잡았다. 큰일도 아닌 아주 소소한 일들이었다. 아니라고 야단을 치면 악을 쓰고 덤벼들었다. 첨엔 맞서서 진실을 진실이라고 주장을 해봤으나 결과는 항상 나의 참패였다. 내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여자로 오인을 받는 것이었다. 그래? 인간은 상대적인 동물이야. 네가 그딴 식으로 엄마한테 굴면 나 역시 마찬가지야. 그리고 침묵했다. 그냥 입을 꽉 다물고 있는 것이 나를 보호하는 최선의 길이었다.

한때는 ‘엄마가 한국 여자라는 자체가 티나에게는 싫은 것일까?’ 하는 심각한 고민 속에 빠진 적도 있다. 그러다가 ‘혹시?’ 하고 가슴이 철커덩 내려앉기도 했다. 그러나 남편도 모르는 나의 과거를 티나가 알 리 만무다. 만일 티나가 알 경우는 암말 안 할 리가 없다. 직격포를 쏴버렸을 것이 분명하니까.

대학생이라는 신분에 나는 일류 호스티스로 인기가 대단했다. 거기다 타고난 미모와 몸매가 더 한몫을 했다. 나 하나만을 달랑 남겨두고 일찍 세상을 떠난 부모님이지만. 그래도 남들이 한 번 더 쳐다보는 외모를 유일한 유산으로 남겨주었다. 의지가지 하나 없는 맨몸으로 살기에는 참 힘든 세상이었다. 그 힘든 세상에서 내가 터득한 것은 그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를 그대로 나타내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되도록 포장을 하고 살아야 하는 현실이 세상의 철칙이었다. 포장, 거기에는 또 하나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나는 신장이 하나밖에 없다. 고아원에 있을 때, 신장 하나를 떼어 냈다. 같은 고아원에 있는 생명이 위험한 어느 아이한테 이식을 해준 것이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생활전선에 뛰어 들어봤으나 학비와 생활비 그리고 나의 욕구를 풍족하게 해결해 줄 만큼의 돈을 벌 수 있는 곳은 유흥업소밖에 없었다. 항상 답답하고 불행한 나날이었다. 정말 피곤했다. 그러다가 나는 돈 많은 사장님의 숨겨진 여자 노릇도 한 적이 있다. 좀 편안하게 살고 싶어 택한 인생이었으나 그건 내 오산이었다. 그의 부인과 패거리들로부터 머리를 쥐어뜯기는 곤욕을 치루기도 했으니까. 호스티스라는 내 자리로 도로 돌아온 나는 불면의 밤을 이기지 못해 언제나 수면제를 복용했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무조건 여행을 떠나려고 예약을 하고 보니 시간이 급했다. 부리나케 공항으로 나가 가방을 끌고 뛰다가 그만 어떤 남자와 맞부딪쳐 나뒹굴어졌다. 일어서려고 하는데 발을 디딜 수가 없었다. 왼쪽 발목 복숭아 뼈가 금세 탁구공만 하게 부어올랐다. 남자는 놀라 나를 얼른 공항 의료실로 데려갔고, 우린 이렇게 운명적으로 만났다. 그는 미국인으로 과학기술처에 교환교수로 나온 우주공학 박사였다. 키는 나보다 작았으나 체격은 다부졌다.

그를 내 사랑의 포로로 잡아 구혼을 하게 만드는 데에는 그리 긴 시일이 걸리지 않았다. 마침 내가 자란 고아원이 미국에서 후원을 받고 있던 곳이라 어렸을 적부터 영어를 접할 수 있었기에 말은 웬만큼 통했다.

나는 그에게 고아원 얘기는 입 밖에도 꺼내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교통사고로 부모님이 함께 돌아가셨다고 했다. 물론 내가 유흥업소의 호스티스라는 사실도 숨겼다. 내 신분이 탄로 날까 봐 그를 만날 때마다 나는 불안에 떨었다. 혹시 아는 사람이라도 만날까 봐 두려웠다. 병원 검진을 할 때도 신장이 하나뿐인 것에 무척이나 신경이 씌었다. 신장 하나가 없다는 것을 여느 때는 의식도 못하고 살아왔는데 그를 만나고부터는 그것도 자꾸 마음에 걸렸다. 두겹 세겹 포장을 했지만 신은 내 편에 서 주었다.

하루아침에 신분상승이 되어 나는 한국 땅을 떠나면서 맹세했다. 한국에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태어나서 스물두 해, 좋은 기억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세월이었다. 지긋지긋했다.

나는 나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미국 땅을 밟는 데에 성공을 했다. 그러나 꿈에 부풀었던 나의 희망은 날이 갈수록 암벽에 부딪쳐다. 티나를 낳고 2, 3년 동안은 미국생활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런 대로 시간이 잘 지나갔다. 차라리 모르는 것이 약이었다. 하나 둘 실생활에 접하고 보니 나는 점점 더 어려운 미궁 속을 헤매게 되었다.

교수이지만 연구직에 있는 그는 집에서도 서재에 틀어박혀 컴퓨터만 들여다볼 때가 많고 출장도 잦았다. 도대체 남편이 무슨 생각으로 나랑 결혼을 했는지가 의아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가장 힘든 것은 부부동반 모임이 있을 때였다. 늘 홀로 있다가 사람들을 만나면 즐겁고 좋아야 하는데 나는 그 반대였다. 정말 괴로웠다. 남편의 친구들은 거의가 교수에 박사였다. 부인들 역시 좋은 집안에 좋은 대학을 나온 인텔리 여성들이었다. 하나같이 다 예뻤다. 미리부터 가슴이 떨려 영어를 웬만큼 하는데도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슨 말이라도 물어보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그들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시선 둘 곳을 몰라 허공을 헤맸다. 한 번은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남편이 안쓰럽게 생각하고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집에 일찍 데리고 왔었다.

정말 몸이 아팠다. 두통이 심해지며 배까지 쌀쌀 아팠다. 며칠째 통증이 계속되어 결국은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의사의 진단은 신경이 너무 예민한 탓이라고 했다. 신체적으로는 아무 이상이 발견되지 않은 것이다. 처방약은 신경안정제였다.

외로웠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이 내 집 같지가 않았다. 왠지 불편했다. 해가 질 무렵, 저녁노을이 붉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만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내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내겐 돌아갈 집이 없었다. 이상하게도 그렇게 지긋지긋하던 한국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가끔은 혼자 코리아타운에 나가 돌아다니며 밥도 먹고 잡화상에도 들르며 한국의 문화를 즐겼다. 그러나 사람과는 친해지고 싶지 않아 나는 늘 혼자였다. 한국 사람과 한국말을 막 하며 하소연을 하고 싶을 때가 있었지만 ····.

어느 날, 남편이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말을 했다. 한국 교회에 한 번 나가보라는 것이었다. “신앙을 가지면 당신 생활이 활기차고 지금보다는 더 재미있는 삶을 살 수 있을 거야.”

나도 신앙이 없지만 그 역시 마찬가지인데, 어찌 그런 생각을 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꽁꽁 싼 내 포장이 벗겨질까 겁이 나서 나는 즉석에서 거절했다. 그리고 곰곰 생각해봤다.

내 삶의 재미를 교회로 돌려 자기로부터 떨어져나가게 하기 위함일까? 그럼 내가 지금 재미없게 외롭게 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단 말인가?

무심한 그가 한 번은 내 건강을 챙기기도 했다. 특히 신장을 거론하면서, 꼭 정기검진을 받아야 한다고. 사실, 내 한 겹의 포장은 티나를 임신했을 때, 이미 벗겨졌다. 나는 언니한테 신장을 때 주었다고 했다, 그리고 언니는 몇 년 못 살고 죽었다고 또 거짓말을 했다.

가끔 그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볼 적이 있다. 그럴 때 나는 눈 둘 곳을 몰라 그를 똑바로 보지 못한다. 어쩌다 그와 눈이 마주치면 가슴이 철커덩 내려앉으며 심장이 쿵쿵거리기도 한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속 시원히 말이라도 해주었으면 좋으련만.

다 손을 놔버리고 한국으로 도로 돌아가버릴까 하고 생각도 해봤지만, 나는 티나라는 끈을 붙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그 끈은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장해물이 되어 가고 있었다. 요즘 나는 티나가 엄마한테 질투심을 품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티나는 아빠를 판에 박은 붕어빵이다. 바로 그의 분신이다. 나를 닮은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없다. 어떤 이는 내가 애 딸린 남편의 후처로 들어온 것으로 오해를 했었다고 한다. 남편이 나보다 근 10년이나 위이고, 나는 나이보다도 더 앳돼 보이니 그럴 만도 했다. 티나가 어릴 적이었다. 어느 실없는 부인이 한 번은 티나 앞에서 아주 묘한 얼굴로 “엄마는 미인인데 딸은 엄마를 안 닮았어요.”라는 말을 해, 티나는 그날 집에 와서 엉엉 울었다. 그땐 질투심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딸이 커갈수록 느끼게 되는 내 감정, 그것은 분명히 질투였다. 내 자리를 노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어 끔찍하기까지 하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남편이 티나를 바라보는 눈빛, 그 눈빛은 나를 바라보는 혼란스러운 눈빛과는 천지 차이다. 그윽한 사랑이 가득 담겨 찬란한 빛이 난다. 나는 남편의 그 눈빛이 기분 나쁘다. 딸아이한테 엄마가 질투를 하다니·····. 둔기로 한 대 맞는 것 같다. 정신이 아찔하다.

남편한테 어떻게 얘기를 끄집어 내느냐도 문제였다. 티나한테 물어보기 전에 미리 뜸을 들여야 하나, 그것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티나의 유창한 화술에 남편이 넘어갈 확률이 크기에 가슴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예상대로 티나는 자기는 절대로 지갑을 가져가지 않았다고 극구 부인했다. 어찌나 말을 조리 있게 잘하는지 그녀의 전적과 성격을 모르는 사람이면 백프로 믿음성이 가게끔 눈부신 화술을 발휘했다. 기가 찼다. 티나는 능히 그러리라 짐작한 대로였으나 남편이 완전히 딸한테 엎어져버려 나는 더 낭패한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어디 다른 데에 두고 애매한 사람을 잡는다는 것이었다. 정신병자라는 말까지 입에 담았다. ‘정말, 내가 어디에다 두고 깜빡한 것일까?’ 하고 정신이 오락가락할 정도로 그들은 강경했다.

며칠 밤을 한 잠도 잘 수가 없었다. 수면제를 먹었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돈 천 달러가 문제가 아니었다. 정말 내가 다른 데에다 둔 것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그리고 여기저기를 찾아보았다. 먼저 부엌 찬장 서랍부터 열어보았다. 거실 장식장 서랍도 열어보았다. 서랍에 넣어둔 것만은 확실했기 때문이다. 아니 안방 경대 서랍에 넣어둔 것이 확실했지만 티나가 울고불고 죽을 듯이 덤벼들어, 그래도 딸이기에 나를 한 번 의심해보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게스트 룸으로 향했다. 왠지 게스트 룸에 들어가면 썰렁한 기분이 든다. “네가 지금 완전 포장을 하고 살고 있는데, 그 포장이 얼마나 가겠니? 빨리 실토하고 용서를 구해라. 그 포장을 푼다 하더라도 어찌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겠니? 그러다가 가랑이가 찢어져 네가 죽어. 너 생긴 대로, 네 수준에 맞는 사람들하고 어울려 살아야 세상사는 맛이 나지 않겠니? 왜 그러고 사니?” 하고 조소어린 눈빛으로 누가 나를 훔쳐보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지갑이 게스트 룸에 있는 경대 서랍에서 나왔다. 나를 한 번 의심하는 의미에서 여기저기를 뒤져보았으나, 게스트 룸에는 거의 발걸음을 않는 내가 지갑을 거기에 넣어두었을 리가 만무다. 천 달러도 그대로 있었다. 그녀가 갖다 놓은 게 분명했다. 안방 경대 서랍에서 훔쳐가 놓고 게스트 룸 경대 서랍에 도로 갖다 놓은 것도 그녀의 작전이었다. 안방과 게스트 룸을 혼돈했다고 뒤집어씌우기 위해서다. 아빠한테는 자신의 결백을 한 번 더 주장하고, 또한 엄마가 정신병자라는 것을 그에게 확인시키기 위한 수작이기도 하다.

남편은 대뜸 “그거 봐. 당신이 거기다 둔 게 분명하네.” 하고는 지갑을 찾았다면서 곧바로 딸한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정신을 어디다 빼놓고 다니느냐면서 앞으로는 제발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주의를 주었다. 내 말에는 손톱만큼도 귀를 기울여주지 않았다. 그는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가 지갑을 게스트 룸 경대서랍이 넣어두었어.”

남편에게 악을 쓰고 달려들고 싶었으나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나를 정신병자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서서히 그렇게 길이 들여졌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또 흔들렸다. 이상하게도 안쓰러운 표정이었다. 악을 안 써도 정신병자 취급인가?

어느 소설에서처럼 남편과 딸이 합세를 하여 언젠가는 나를 정신병원에 처넣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섬뜩했다. 그들이 몰아붙이면 진짜로 정신병자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나는 부모도 형제도 의지가지 하나 없는 외톨이다. 혼자라는 사실이 너무 슬프다.

티나의 각본대로 연극은 끝이 났다. 워낙에 할 말을 꽁꽁 싸맨 채 참는 데에 잘 길들여져 있는 나이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누구한테든 하소연을 하고 싶었다. 눈물이 줄줄 흘렀다. 숨통이 막혀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돌파구는 없었다. 차를 타고 정처 없이 달리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코리아타운인 올림픽 가에 와 있었다. 거의 두 시간을 달린 셈이다. 한글 간판들을 보니 콧잔등이 찡해 왔다.

코리아타운에 다 들어섰을 때였다. 암만해도 차의 상태가 보통 때와는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선 눈에 띄는 정비소에 차를 세웠다. 차를 들여다보다가 정비원이 깜짝 놀라 물었다.

“아니 이 차를 어떻게 운전을 하셨습니까?”

큰일 날 뻔했다는 것이다. 우주공학을 전공했으나 차에 관해서도 정비사 못지않게 많이 아는 남편이다. 그 바쁜 중에도 소소한 차 수리는 본인이 직접 한다. 그리고 딜러에 가서도 정기적으로 점검을 한다. 차체에 보일락 말락 한 흠집이 생겨도 못견뎌하는 남편이다. 그런 그가 차 내부에 문제가 있는 것을 몰랐다니····. 그동안에 차가 별 탈 없이 잘 나갔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싶었다.

샌디에이고에서부터 두 시간을 운전하고 왔다는 얘길 듣고 정비사는 더 놀라면서 정말 운이 좋았다고 몇 번이고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차를 더 이상 운전을 해서도 안 되고, 차들이 밀려 고치는 데에 며칠이 걸린다고 하니 정비소에다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티나 편만 드는 서운함에서 언제 벗어났는지 나는 남편에게 차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얼른 전화를 걸었다. 차에는 도사인 남편이니 정비사와 얘길 하면 금방 통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전화를 바꾸겠다고 하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에 이어지는 말에 나는 잠깐 어리둥절했다. 차에 문제가 있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지극히 태연한 어조였다. 나는 세상이 뒤집어지는 듯한 허탈감에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운전을 하면 안 되는 정도로 차에 문제가 있는데, 그걸 알면서도 암말 안 하다니.

눈앞이 노래지며 줄줄이 늘어서 있는 차들이 한데 엉켰다. 정비원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어디 편찮으시냐고.

아, 차라리 이혼을 하자고 그러지····.

남편을 기다리면서 근처 커피숍에 앉아 나는 생각에 잠겼다. 애초에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려고 했지만, 도무지 그럴 기력이 없었다. 남편이 언제 올지 모르니 시간도 충분했다. 그러나 나는 우두커니 커피숍에 넋 나간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누구든 붙들고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었다. 20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런 친구 하나 만들지 못한 내가 한심했고, 남편이라는 끈 하나만 붙들고 살아온 내 자신이 비참했다. 내가 먼저 이혼을 제안하자. 아니 날 위해서다. 생명의 위협을 받고는 살 수가 없지 않은가? 만일 지금 이혼을 하면 재산을 반을 주어야 하는 것이 미국의 법이다. 손가락을 꼽아보니 그가 가진 재산이 꽤 되었다. 결혼 직후,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부동산도 지금은 아주 많이 올랐을 것이다. 갑자기 그가 무서워졌다.

문득 남편에게 여자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는 세미나 관계로 한 달에 두어 번 정도는 집을 비운다. 혹시 나를 만나기 전에 사귀었던 옛 애인일까? 그렇지 서른이 넘어 결혼을 한 남자가 결혼 전에 애인이 없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와이프가 돼 가지고 어찌 그리 눈치를 못 챘단 말인가? 그에게 여자가 있다는 것이 이제는 기정사실이 되어버렸다

실내에는 한국 가곡이 흐르고 있었다.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요.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핑 돌던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다짐을 하며 떠나온 고국이 그리움의 파도가 되어 몰려왔다.

이 노래의 제목이 뭐더라? 이제는 이 유명한 노래 제목도 잊었단 말인가? 내 고향 남쪽 바다? 아냐. 아냐. 그렇지 가고파 가고파야. 아, 가고파. 가고파. 정말 가고프다.

정확히 두 시간 후, 남편이 도착했다. 곧바로 내게 달려온 남편이 이상했다. 내가 아니고 차 때문이겠지 하는 생각이 앞섰다. 정비사와 대화를 주고받더니 남편은 그 차로 샌디에이고로 돌아가도 된다고 했다. 나도 놀라고 정비사도 놀랐으나 남편은 지금 현재는 별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라고 태연하게 말했다.

나는 남편 차에는 익숙하지 못하다. 그러니, 문제의 내 차를 나보고 운전하라고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치면서 앞이 캄캄했다. 결국은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작정인가? 그렇다면 나보고 운전하고 오라고 하지 왜 달려왔지? 그랬어도 내가 운전을 안 하리라는 것을 알기에? 순간순간 머리가 획획 돌면서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어쩌나 무서운지 그를 바라보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그가 어쩌나 보자하고 확인이 하고 싶었다. 초조했다.

뜻밖에 그가 이왕 코리아타운에 왔으니 여기저기를 둘러보자고 했다. 온화하고 편안한 표정이었다. 나한테 뒤집어씌우고 나니 미안한 모양인가? 나는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피곤하다는 핑계를 댔으나 정말이지 남편과 같이 다니고 싶지 않았다. 점심을 먹자는 그의 말도 귀에 안 들어왔다. 나는 어서 집으로 가자고 했다. 둘 중 누가 문제의 차를 운전해야 하는지가 빨리 알고 싶었다. 물론 나는 절대로 내 차 운전은 안 할 것이다.

내가 너무 앞서 갔나? 남편은 내게 자기 차를 운전하라고 말한 후, 그는 태연하게 문제의 차로 향했다.

“내가 뒤따라 갈 테니 먼저 떠나. 운전 조심하고.”

순간 나는 걱정이 되기는커녕 ‘아무리 네가 차를 안다고 해도 정비사만 하겠니? 그래 차라리 네가 죽어라.’ 하고 속으로 외쳤다.

운전을 하는 동안 허리가 무겁고 다리가 아팠다. 배까지 쌀쌀 아팠다. 배 아픈 것은 이미 신경성이라는 진단이 내려졌고, 좀 지나면 저절로 나았기에 그러려니 했다. 페달을 밟을 때마다 허리에 시큼시큼 통증이 왔다. 실은, 서너 달 전부터 왼다리가 욱신욱신 저려오고 허리 아래쪽이 묵직했지만 늘 그런 것이 아니어서 이러다가 낫겠지 하고 내버려두었다.

허리 아래쪽이 뜨끔뜨끔해 몸을 좀 움직였더니 갑자기 다리에 쥐가 났다. 엉덩이에서 뭐가 죽 뻗쳐 발가락 끝까지 침범을 했다. 장작개비처럼 뻗친 다리에 온몸의 힘이 다 쏠렸다. 뭐라 표현하기도 힘든 통증이 겹치며 다리가 콕콕 쑤셨다. 다행히 왼다리여서 운전은 할 수가 있었다. 복부의 통증도 더 심해졌다. 여느 때와는 아주 달랐다. 내장이 뒤틀리며 요동을 쳤다. 식은땀이 송송 솟고, 숨쉬기조차도 힘들 정도로 아팠다. 악문 이빨 사이에서 새는 신음과 함께 눈물까지 나왔다. 그래도 집에까지는 가야지 하고 참아봤으나 나중에는 머릿속이 텅 비어 하얗게 돼버렸다. 도저히 운전을 할 수가 없었다.

프리웨이 갓길에 차를 세웠다. 일단 차를 세우니 안도의 숨은 쉬어졌지만 통증은 여전했다. 몸을 뒤로 젖히고 머리를 의자에 기대니 눈이 저절로 감겨졌다. 누가 창문을 두드렸다. 실눈을 뜨고 고개를 돌린 나는 하마터면 외마디 소리를 지를 뻔했다. 웬 낯선 남자가 유리창에 코를 문대면서 나를 향해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남자의 얼굴이 운동장만 했다. 자세히 보니 남편이었다.

얼른 문을 열고 내리려다가 나는 그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왼다리를 칼로 후벼파는 것 같은 통증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남편이 놀라 나를 받아 안았다. 그의 부축을 받았으나 왼다리를 땅에 디딜 수가 없었다. 그는 나를 덥석 들어 안았다.

운전을 하는 동안 나는 내 뒤를 남편이 따라오는지 마는지에 신경을 안 쓰고 그냥 곧장 나의 길에만 정신을 곤두세웠다. 더구나 다리, 허리, 배까지 아파서 눈을 돌릴 겨를이 없었다. 문제가 있는 차이니 천천히 왔을 수도 있는데 진짜 별 문제가 없었던 모양이다. 응급실을 향하는 그 와중에도 내가 물었다. 발음이 똑바로 나오지 않았다.

“왜 그 정비사가 운전을 하면 안 된다고 했어요? 멀쩡한 차를 바가지 씌우려고 거짓말 한 거예요?”

“거짓말을 한 건 아니고, 좀 과장을 한 거겠지.”

대답이 아주 급하게 그리고 떨리기까지 하여, 의아한 마음으로 고개를 돌려 남편의 얼굴을 보니, 앞을 주시하는 그의 표정이 심각했다. 나랑 마찬가지로 얼굴에는 땀이 송송 솟아 있었다.

괜한 오해를 했나? 갈팡질팡 미로를 헤매는 기분이다.

이주일 후에 검진 결과가 나왔다. 배 아픈 것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신경성이었다. 왼다리에 죽을 것 같은 통증이 온 것은 디스크 증세였다. 3번 4번 사이의 연골이 흘러나와 신경을 눌렀기 때문이다. 검진 결과가 나올 즈음에는 배도 깨끗이 다 낫고, 다리 아픈 것도 많이 나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쉬면 나을 병을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든 것 같았다.

그러나 일은 다른 데서 터졌다. 검사를 하다가 신장이 잡혔는데 거기에서 종양이 발견된 것이다. 암이었다. 신장암 때문에 나타난 증상은 아무것도 없었다. 옆구리가 아프냐, 소변에 피가 섞여 나오느냐 하고 의사가 물었으나 내게는 그런 증상이 전혀 없었다. 복부에서 만져지는 멍울은 더더구나 없었다. 또한 발열, 빈혈 등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체중이 좀 줄긴 했다. 그리고 피로하고 식욕부진일 때가 더러 있었으나 그것은 나의 일상이지 암에서 온 것은 아니라고 자신한다.

다행히 초기로 다른 장기에는 전이가 되지 않았기에 최선의 길은 근치적 신적출술을 시행하는 것이었다. 쉽게 말하면 신장을 완전히 제거하는 수술인데 내게는 불가능했다. 나는 신장이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신장을 괜히 떼 주었다.

그 애는 지금 잘 있을까? 이식 수술 후, 고모가 사는 시골로 가게 되어 우린 헤어졌다. 태어날 적부터 신장이 약했는데, 그걸 모르고 아무런 조치를 안 하고 있다가 그만 두 개의 신장이 다 망가져버린 케이스로 2년을 무척 고생하던 중, 생명이 위험한 상태에 가서야 이식 수술을 받게 되었다. 고아원에 있으면서 나랑 가장 친하게 지낸 친구였다. 정말 기적이었다. 나의 신장이 그 애한테 들어맞은 것은 신이 내린 기적이었다. 그 애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기적의 내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신장적출은 불가능한 일이니 현재로는 수술로 암을 제거하는 수밖에 없는데, 큰 문제가 있었다. 종양이 떼어내기가 아주 어려운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나의 경우는 신장암 중에서도 신세포암이라는 것으로 일반적인 방사선 치료나 항암화학요법이 잘 듣지 않는 종류였다. 다행히 다른 장기에 전이는 더디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결정이 내려질까? 다른 데 전이가 되기 전에 일단 종양을 잘라내야 하겠지. 일부를 남겨두더라도. 그리고 신장을 이식받을 때를 기다려야 하겠지. 기다리는 동안 투석을 해야 하는 걸까? 나는 피가 O형이니까 다른 환자들보다 더 오래 기다려야 한다. 5년이 될지 10년이 될지 아무도 모르지만 1년 안에 죽을 수도 있다. 지금 현재 내게 신장을 떼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럴 때 부모형제라도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 간절한 마음이다.

그냥 이대로 내버려둘까? 암이 자라고 다른 데 전이가 되고 등등····. 그러면 얼마나 갈까? 다행히 내 경우는 전이가 더디다고 하니 운이 좋으면 5년? 이럴 때도 투석을 병행해야 하는 걸까? 이래도 5년 저래도 5년, 길어야 5년이 내 남은 인생의 전부다. 그땐 암이 온몸에 퍼지게 되겠지. 뼛속까지. 그러면 통증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해지겠지.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거야.

나는 왜 이리 운이 없을까? 이제 겨우 마흔인데 지금 죽는다는 것은 너무 억울하다. 그리고 무섭다. 아니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남들처럼 내세에 대한 확신이 있어, 천당 간다는 믿음이 굳건하면 억울하지는 않을까? 편안한 마음일까? 그럼 나도 지금부터 노력하며 하나님을 믿어볼까? 천당 간다는 희망을 가지기 위해. 남편의 말대로 한국교회에 나가 봐? 나의 과거를 아는 사람이 있으면 어때? 삶과 죽음이 맞닿은 상태인데 그런 것이 무슨 대수랴····.

만일 하나님이 있다고 믿었더라도 나는 그분을 원망하며 살았을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지지리도 운이 없었던 나이니까. 남편을 만나 미국에 온 것도 지나고 보니 좋은 운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운세가 바뀌어질까? 내세를 위해서보다 현세를 위해서 신에게 매달려보고 싶은 욕망이 갑자기 전신을 엄습했다. 딸과 부딪칠 적마다 짓밟혔던 나의 자존심, 그녀의 발악, 남편의 몰이해···. 이런 것들이 어느새 다 사라져버렸다. 내게는 오직 살아남는 것만이 소망의 전부였다. 원망의 하나님이 희망의 하나님으로 바뀌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이시니 이깟 병 고치시는 것은 아무 문제도 아니잖아요? 제 병만 고쳐주시면·····.”

잠시 망설이던 나는 그 다음 말을 이었다.

“하나님 믿을게요. 교회에도 나가고요. 아주아주 열심히 나갈게요. 나가서 봉사도 하고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뭐든지 다 할게요. 지금 죽기는 너무 억울해요. 실려주세요. 하나님.”

기도를 어떻게 하는지를 몰라 그냥 말하듯이 중얼거리고 있는데 콧잔등이 시큰해지며 눈물이 핑 돌았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그동안 어찌 살아왔는지 잘 아시잖아요. 제가 불쌍하지도 않으세요? 어릴 때 부모 잃고 고아원에서 살다가····.”

눈물이 줄줄 흘렀다. 나중에는 떼까지 쓰며 소리 내어 울고 있었다.

“하나님, 제가 옛날에 제 친구한테 신장 하나 때어준 것 아시지요. 그러니까 지금 갚아주셔야 해요.”

기도 중이었다. 뭔가가 뇌리를 휙 스치고 지나갔다. 순간, 암이 낫든 안 낫든 간에 믿음을 가지면 평화와 안식을 얻을 수 있고, 내 자신에게 의지와 위안이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이 왔다. 그리고 나는 매일 기도했다. 내 맘에 편안함을 주십사고····.

엄마의 상태를 모를 리가 없건만 티나는 무표정했다. 어떤 땐 조금은 측은한 눈빛으로 엄마를 보는 것 같았다. 남편의 흔들리는 눈빛과도 비슷했다. 그러고 보니 남편의 그 눈빛에도 측은한 감정이 석여 있는 듯했었다. 붕어빵, 눈빛도 붕어빵이었다.

‘매정한 것, 딸이라는 게 어찌 저럴 수가 있을까? 내 속에서 저런 게 나오다니····’

티나는 부산하게 집을 들랑날랑했다. 여행 준비로 많이 바쁜 모양이었다. 그렇지 여행에만 정신 집중이 돼 있는 네가 지금 엄마의 심정이 어떤지를 알기나 하겠니? 이빨 사이에서 “나쁜 년” 하는 소리가 파랗게 갈려나왔다. 지갑 잃고 난리를 겪은 일이 아주 옛날같이 아득하다.

그날 밤, 나는 아주 이상한 꿈을 꾸었다. 형상은 없고 소리만 들렸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누군가가 “엄마, 엄마.” 하고 부르면서 울고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던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는 또 점점 멀어지다가 긴 여운을 남기며 사라졌다. 엄마를 애타게 찾고 있는 슬픈 목소리였다. 이 세상 천지에 나를 엄마라고 부를 사람은 티나밖에 없다. 갑자기 가슴이 쿵쿵 뛰었다. 벌떡 일어나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겨우 가누면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티나 방을 향했다. 방문 틈새로 옅은 불빛이 새 나왔다. 살며시 들여다보니 티나가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책을 보다가 잠이 든 모양이었다. 나는 문밖에 서서 티나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항상 당당하던 어깨에 힘이 빠져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지 않은가? 발이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서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녀를 와락 껴안고 통곡이라도 하고 심정이 치솟아 올랐다. 순간 티나가 머리를 들며 기지개를 켰다.

그럼 그렇지 네가 엄마를 위해 울어줄 딸은 아니지.

나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신장암 때문에 디스크는 뒤로 밀려났다. 처음에는 수술을 해야 한다고 판정이 났으나 뒤로 밀려나서 기다리는 중에 증세가 호전되어 모두들 디스크는 언급도 안 했다. 암의 위력이 크긴 컸다. 요즘은 50%만 맞아도, 그리고 혈액형이 다르더라도 이식이 가능하니 신장이식을 곧 할 수 있으리라고 남편은 나를 위로했다. 그의 진심이 느껴졌다. 고맙고 든든했다. 그리고 미안해서 눈물이 났다. 건강할 때는 항상 불안하고 초조해서 뭔가에 쫒기는 기분이던 것이 건강을 잃고 나니 도리어 마음이 편했다. 남편을 꽉 붙들면 살 것 같았다.

응급실에 도착했을 즈음에 나는 육체의 통증에서 조금씩 벗어났었다. 한데 남편의 얼굴이 나보다 더 땀에 배어 있었고, 나의 통증을 그도 느끼고 있다는 전율이 내게 흘러 들어왔다. 이상했다. 그는 분명히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타니를 임신하고 신장이 하나밖에 없는 것이 탄로가 났을 적에도 그때는 겁부터 앞서 그의 진심도 모르고 얼떨결에 그냥 무사히 넘긴 것에만 안도의 숨을 쉬었었다. 한데 그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내게 관심을 쏟았고, 속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조금도 섭섭해 하지 않았다. 도리어 나를 다독거려 주었다. 거짓말에 또 거짓말이 추가되었으나 그는 내 말을 그대로 믿었었다. 그리고 신장이 하나만 있을 경우는, 그 한쪽이 두쪽의 신장 기능을 하기 위해 더 강해진다고 나를 격려해주었다.

아, 나는 왜 그 당시에는 고마움을 못 느끼고 이렇게 한참 지난 다음에야 깨닫게 되는 것일까? 멀리 있다고 생각했던 남편이 이젠 내 곁에 있다는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검사를 받기 위해 다시 입원을 했다. 그간에 별의 별 상상을 다 하는 동안 마음은 점점 편해졌다. 이제는 병원에 모든 것을 맡기는 수밖에. 내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리고 이제 남편이 내 곁이 있다는 확신이 생기고 보니 무서울 게 없었다.

이튿날 아침이었다. 내게 맞는 신장이 나타났다는 기적의 기별이 병실로 날아들었다. 아, 이럴 수가····. 5년이고 10년이고 기다려야 될 일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졌다. 이건 진실로진실로 기적이 아닐 수 없다. 50%만 맞아도 이식이 가능한데 거의 100%가 들어맞는다고 했다. 당장에 이식 수술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꿈인지 생시인지 구별이 안 돼 실감이 안 났다. 그러나 꿈은 아니었다. 그 애가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지금은 40대의 아줌마가 되어 있을 터인데도 옛날 모습 그대로였다.

“어떤 사람이에요?”

남편은 모른다고 했다. 기뻐서 상기되었던 그의 얼굴에 언뜻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는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뇌사자일까?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수술 날짜가 티나의 졸업여행과 맞물렸다. 기적적으로 거의 100% 맞는 신장을 이식받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티나는 남편처럼 흥분하지 않았다. ‘매정 한 것’ 하고 나는 또다시 되뇌었다. 여행을 떠날 때도 별 말이 없었고 수술하는 날 아침에도 전화 한 통 없었다.

여기가 어딜까? 완전히 암흑 속인데도 뭔가 허여스럼한 물체가 내 주위를 빙빙 돌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백까마귀다. 새끼새가 먹이를 날라 와 아픈 어미새의 주둥이에 넣어준다는 전설의 백까마귀였다. 아무것도 분간이 안 되는 상태인데도 새의 형체는 분명히 잡혔다. 훨훨 나르며 내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사라졌다가 무슨 소리와 함께 다시 나타났다. 귀가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게 무슨 소리지? 어디에서 들리는지 방향을 잡을 수도 없고 무슨 소리인지 감을 잡을 수도 없었다. 나는 어둠 속을 헤치며 전신의 힘을 귀에다 모았다. 그리고 소리를 찾으려고 애쓰며 한참을 헤매면서 백까마귀 날개에 매달렸다. 미세했던 소리가 조금씩 분명해졌다. 그 소리는 눈물을 흥건히 머금고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소리는 점점 더 뚜렷해졌다. 누군가가 “엄마, 엄마.” 하고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얼마 전에 꿈속에서 들었던 티나의 바로 그 목소리였다. 티나는 지금 여행 중일 터인데 어떻게 그녀의 음성이 바로 옆에서 들리지? 또 꿈인가?

“티나야, 어딨니? 엄마 여기 있어. 엄마 여기 있다고.”

일어나 앉으려고 하는데 몸이 꼼짝을 안 했다. 입을 열었는데도 소리가 안 나왔다. 눈을 뜨려고 애를 써도 뜰 수가 없었다. 그러나 티나의 음성은 분명하게 들렸다.

“엄마. 벌써 일주일이 지났어요. 왜 아직도 안 깨나는 거예요. 초조해 죽겠어요. 제발 이제 그만 벌떡 일어나세요. 엄마, 눈 뜨세요. 눈 좀 떠 보라고요. 못된 딸이 엄마를 너무 힘들게 해, 나 보기 싫어서 눈을 못 뜨는 거예요? 이제는 더 이상 못된 딸 아니예요. 엄마. 마음 놓고 눈 뜨세요.”

아참, 내가 신장이식 수술을 받았지. 그러니까 수술 후, 일주일이 지나도 못 깨나고 있다는 얘기네. 그럼 수술이 잘못된 것일까? 아, 티나가 엄마 걱정을 하고 있구나. 안 돼, 안 돼, 이렇게 누워 있으면 안 돼. 어서 일어나야 해.

“엄마, 제가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제가 엄마 속을 너무 썩여서 엄마가 암에 걸렸어요. 이 죄를 다 어떻게 해요. 엄마한테 잘못했다고 꼭 용서를 빌어야 하니 엄마, 빨리 깨어나요. 앞으로는 제가 잘할게요 정말 잘할 거예요. 맹세할게. 엄마····. 엄마····.”

티나가 흐느끼고 있었다. 티나가 티나가, 엄마한테 잘못했다고 빌다니····.

아니다. 아니다. 엄마가 잘못한 게 더 많다. 엄마라는 사람이 인간은 상대적이라는 지침 아래 어린 너랑 똑같이 굴었으니 말이다. 티나야, 엄마는 말야. 어릴 적부터 고아원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자랐단다. 누구로부터도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어. 물론 엄마의 사랑도····. 변명 같지만, 그래서 사랑을 어떻게 줘야 하는지를 몰랐나 봐. 나를 지키기에만 바빴으니까. 티나야, 미안하다. 눈에 보이는 사실만 인정하고 맘속에 있는 내 새끼를 보지 못했으니 그게 무슨 엄마냐?

흐느끼던 티나의 음성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엄마, 수술도 잘 되었어요. 엄만 이제 새 생명을 얻었어요. 저도 거듭 났어요. 우린 이제 한 생명이 되었다고요. 엄마, 저 정말 기뻐요. 이제 엄마와 한 몸이 되었고, 마음도 하나가 됐어요.”

티나와 내가 한 생명이 되었다고? 한 몸이 되고 한 마음이 되었다고? 그러면 티나가, 티나가·····.

갑자기 온몸이 더워왔다. 생명의 불꽃이 서서히 내 몸에 피기 시작한 것이다. 뜨거운 눈물이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온몸을 타고 흐르는 희열에 손끝이 찌릿찌릿했다. 그 순간이었다. 티나가 자지러지듯이 소리를 질렀다.

“엄마! 엄마! 이제 정신이 드세요?”

나는 “티나야, 티나야.” 하고 계속 불렀다. 입이 조금씩 열렸다. 목청이 터져라 불러대는 그 소리가 작은 신음처럼 겨우 새 나왔다.

멀리서부터 한 줄기 빛이 가슴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어둠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주위가 점점 환해지면서 티나의 얼굴이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직도 나는 백까마귀의 날개에 매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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