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40년 후의 101번째 편지 (1)

2003.04.13 11:00

김영강 조회 수:574 추천:69

    초대장과 함께 느닷없이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발신인의 이름을 보고 옥희는 어리둥절했다.  그는 김동추였기 때문이다.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40년 전에 한 맹세를 지키기 위해 이렇게 편지를 띄웁니다.    만 육십, 회갑이 되면 당신을 꼭 만나리라고 굳게 다짐한 그 맹세입니다.        다가오는 6월 6일이 바로 그날입니다.    초대장을 동봉하오니 꼭 참석해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몇 줄 안되는 간단 명료한 편지였다.  그리고 편지 끝에는 <101>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손바닥만한 초대장은 컴퓨터로 집에서 만든 것 같았다.  시간은 오후 7시, 장소는 이곳 로스안젤레스의 올림픽 가에 있는 한미호텔이었다. 봉투에 쓰인 발신처는 이곳에서도 부촌으로 알려진 신 마리노였다.
     그렇다면 김동추가 미국에 살고 있었단 말인가?
     세 딸을 다 출가시키고 옥희 역시 올해가 회갑인 나이에 생긴 일이다.

     옛날 대학 시절 옥희에게 백 통의 편지를 보낸 김동추, 그는 애인도 아니었고 친구도 아니었다.  만난 적이라고는 서너 번도 안되었다.  그것도 다시는 편지하지 말라는 그녀의 태도를 분명하게 밝히기 위함이었다.  그냥 혼자서 편지로 시작하여 편지로 끝난 완전히 일방적인 게임이었다.  사랑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집착이었다.  그런데 당신이라는 호칭으로 둘이 사랑을 하다가 헤어지면서 무슨 맹세나 한 것 같은 애매한 표현법을 써, 옥희는 기가 찼다.  당신이라는 호칭 자체에도 기분이 나빴다.  김동추가 이런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도 자신을 무시한 처사 같아 불쾌했다.  옛날에 어머니가 말한 대로 정말 미친놈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지를 읽는 남편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모르는 것이 약이라고, 그냥 몰랐더라면 좋았을 것을, 편지는 토요일에 배달이 되었고 하필이면 옥희는 외출 중이었다.  토요일 아침이면 항상 골프장으로 향하는 남편인데 그 날은 예약이 안 됐다고 집에 있었다.
  마침, 서울에서 온 친구를 만나기로 한 날이라 옥희는 아침 열시 경에 집을 나섰고, 친구랑 하루종일 같이 돌아다닐 예정이었지만 그녀의 급한 일정 때문에 접심만 먹고 바로 헤어져 집엘 들어서는데 남편이 편지를 내민 것이다. 편지를 받아드는 순간 옥희는 약간 당황했다.  오랜 세월 동안 생각조차 안 해본 사람인데도 그의 얼굴이 금세 떠올랐기 때문이다.

    남편은 그녀에게 다짝 다가서며 빨리 뜯어 보라고 재촉했다.  편지를 같이 읽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어 어쩔 수가 없었다.  하늘을 봐도 한점 부끄럼 없는 그녀인지라 봉투를 자신있게 남편에게 건네주었다.  직접 뜯어서 읽어보라고 한 것이다.  무슨 예감이 들었는지 남편이 더 흥분하고 있었다.
     "김동추? 누구야? 오동추가 아니고 김동추야?"
     "왜 있잖아요. 옛날 학교 다닐 때 나한테 맨날 편지했다는 사람. 언젠가 내가 얘기한 적 있죠?"
     이름도 잊어버린 척하고 모르는 사람이라고 시치미를 뚝 뗄 걸, 그만 진실이 툭 튀어나와 버렸다.
     "아아! 당신 옛날 애인? 그어 편지 백토오옹---"
     편지 백통이라는 뒷말엔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실실 웃었지만 속에서는 뭐가 부글부글 끓는 소리였다. 갑자기 옥희의 언성이 높아졌다.
     "옛날 애인은 무슨 옛날 애인이야? 그런 식으로 뒤집어씌우지 말아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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