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40년 후의 101번째 편지 (2)

2003.04.18 23:27

김영강 조회 수:692 추천:66

    아주 옛날 신혼 초에 남편이 자기 첫사랑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중학교 시절, 등교 길에서 매일 마주치던 한 여학생을 좋아했었는데 말도 한번 못 붙여 보고 가슴을 앓았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남편의 마음이 참 아름답고 측은하게 여겨졌다.  동시에 김동추 생각이 났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사이였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할 수가 있었다.
    "대학 때 미팅에서 만난 남학생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내가 너무 쌀쌀맞게 굴어 미안한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남편은 그녀가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말을 했다.
    "아니, 아무 반응도 없는 여자한테 미쳤다고 편지를 백통씩이나 보내?  자기가 꼬리를 쳤으니까 그렇지."
    옥희는 기가 차서 울고불고 소동을 벌였었다.
    
    사실 그때 옥희는 김동추의 편지를 은근히 엔죠이했다.  그의 글솜씨는 혼자 보기 아까운 문학작품이었다.  어머니는 무슨 말을 했는지 통 모르겠다면서 '이거 미친놈 아냐?' 했지만 그것은 사랑을 읊은 긴 서사시였다.  음률까지 내재된 듯한 참으로 아름다운 서사시라 책으로 묶어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어머니는 뜯지도 말고 없애라는 둥, 도로 돌려보내라는 둥하고 성화를 하셨으나 옥희는 꼬박꼬박 뜯어서 읽었다.  어머니 손에 들어가면 없어지기 일수이니 식모언니가 받아두었다가 옥희에게 몰래 전해주곤 했다.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편지에는 어김없이 일련의 숫자가 적혀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페이지 번호가 아닌 편지의 횟수 번호였다.  날이 가고 달이 가면서 그 번호는 <70>, <80> 그리고 <90>이 넘었고 드디어 <100>을 마지막으로 김동추의 편지는 더 오지 않았다.
    <100>통을 채우려고 작심을 했던 것일까?
    
    한번은 어머니가 이 미친놈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도 모르니 경찰에 신고해야겠다고 하기에 옥희가 펄펄 뛰고 말린 적도 있었다.  옥희에겐 그가 지극히 정상으로 보였고, 또한 그녀는 어머니가 염려하는 몸싸움 같은 것은 절대로 발생하지 않으리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신의 감정을 몽땅 배제해놓고 그날 밤 옥희는 '날 의심하면 나는 자기랑 살 수가 없으니 이혼하자'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나중엔 남편이 싹싹 빌고 달래주어 겨우 무마가 됐었다.
    그 때는 젊은 시절이었지만 이제는 육십 고개에 들어선 나이이니 그냥 웃어 넘길 수도 있지 않을까?
    
    한데 남편은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었다.
    "6월 6일이라..., 아직 보름 남았군' 하고 그 보름 동안에 취할 무슨 행동을 구상하듯이 심긱한 표정을 지은 다음, 그는 갑자기 언성을 높이며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이 새끼가 주소는 어떻게 알았지?"
    어느새 김동추가 이 새끼로 호칭이 되었다.  그런데 그만 옥희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왜 멀쩡한 사람을 새끼라고 해요?' 하고.
    김동추를 두둔해서 한 말은 절대 아니다.  보통 때에도 '이새끼 저새끼' 라는 말을 함부로 쓰는 남편에게 옥희는 늘 그 말버릇 좀 고치라고 충고를 했었다.  새끼라는 말에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반응이었다.
    남편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옥희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왜 옛날 애인보고 새끼라고 하니 가슴이 쓰라려?  같은 LA 바닥인데 만나면 될 걸 편진 무슨 편지야?  나 보라고 일부러 그랬나?"
    그리고는 '아참! 그 새끼 편지 쓰는 거 좋아하지.  미친 놈, 요새 무슨 환갑잔치야?' 하더니 편지와 초대장을 주머니에 구겨넣고는 옥희가 말할 새도 없이 휭하니 밖으로 나갔다.
    '어딜 가요?' 하고 따라 나가는데 남편은 차를 타고 붕 떠나버렸다.  편지 뜯고, 읽고, 그리고 육두문자 연발하면서 화내고..., 남편 혼자서 다 끝내버렸다.  채 10분도 안 걸린 시간이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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