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40년 후의 101번째 편지 (3)

2003.04.25 13:04

김영강 조회 수:550 추천:66

    초청장에 연락처가 명기되어 있으니 남편은 김동추에 관해 알아보려고 할 것이다.  한미호텔에 전화를 걸어 회갑찬치에 대한 것도 확인을 할 것이다.  원인 제공을 한 것은 옥희이지만 그 일을 처리하는 남편의 행동이 너무나 조잡해 실망감은 시간이 갈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저렇게 달려가 김동추를 만나 내가 누구의 남편이라고 밝히고는 뭘 어째 보자는 심보일까?
    아까 하는 짓을 보니 멱살이라도 잡고 한 대 패줄 기세였다.
    
    이럴 땐 속에서 화가 솟구치더라도 아내 앞에선 좀 침착한 척하면서 차근차근 대화로 풀어나가야 하는 것이 남편이 취해야 하는 행동 아닐까?
    보통 남편들은 다 그럴 것만 같았다.  아내 없을 때 배달된 편지이니 그냥 쓱싹 입 씻고 모르는 척하는 남편도 있을 수 있고, 아무런 감정 없이 허허 웃으며 '초대받았으니 우리 같이 가자구, 하는 남편도 있을 것이다.  아내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말이다.
  
    언젠가 옥희가 서울엘 가기 바로 전날 밤이었다.  큰애가 돌 전이었으니 벌써 삼십 년도 훨씬 더 지난 일이다.  새벽 비행기였기에 짐을 다 챙겨서 차에 실어놓았었다.  잠이 안 오는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던 남편이 갑자기 말했다.
    "자기 서울 가면 그 사람 안 만날 거지?"
    그 사람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잠깐 생각을 한 옥희는 얼른 감이 잡혔다.  꿈에도 상상 못한 남편의 말에 너무나 놀랐으나 모르는 척 시침을 뚝 따고 물었다.
    "그 사람이라니...., 그 사람 누구?"
    '그 사람 누구'하는 뒷말엔 짜증이 잔뜩 묻어 있었다.  남편은 당당하게 말했다.
    "그, 편지 백통 말야."
    옥희는 참말로 기가 찼다.  속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목구멍으로 불끈 치솟았다.  서울 가는 거 다 집어치우고 한바탕 해볼까 하고 잠시 망설였다.  서울 안 간다고 짐을 도로 들여오며 한바탕을 친다 해도 '그래 그럼 서울 가지 마.' 라고 말할 남편은 아니다.  '아냐 아냐. 미안해.  내가 사과할게.  괜히 한번 말해본 것뿐이야.' 그럴 남편이다.
    그러나 그렇게 법석을 떨어놓고 서울을 간다는 것이 좀 낯간지러울 것 같았다.  또 서울에 가서도 마음이 안 편할 것 같았다.  꼭 나가야 할 이유가 없었더라면 그렇게 한판 치고 안 나갔을 것이다.  한데, 부무님도 부모님이지만 친구들에게 철석같이 한 약속이 있었다.  그래서 맘을 고쳐먹고 속을 꾹꾹 누르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남편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고, 그날 밤은 별 소동 없이 잘 넘어갔었다.

    그런데 이번엔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조금 전에 남편이 취한 그 행동, 그리고 지금 밖에 나가 옥희의 얼굴에 똥칠이라도 하는 추태를 부리고 있다면 그건 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면 김동추가 자신을 얼마나 불쌍하게 생각할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남편에 대한 증오가 머리 꼭대기까지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옥희의 남편은 천하가 다 아는 애처가다.  옥희 역시 좋은 남편 만난 것을 감사하며 살고 있다.  아니 좋은 남편이라기보다는 옥희 자신에게는 꼭 적합한 남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데 지금 '내가 저런 사람하고 평생을 살았단 말인가?  삼십오 년이라는 세월을 살고도 아내가 어떤 여자인지를 모른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허무했다.  남자라고는 평생을 남편 하나밖에 모르고 살아온 옥희다.
  
    사실, 김동추 외에도 옥희의 주위에 서성이는 남자들이 더러 있었다.  허나, 옥희는 눈하나 깜짝 안했다.  남자들이 만나자고 그러면 그냥 만나주고, 저녁도 얻어먹고 영화도 보고 등등, 심지어는 옷까지 얻어입고 하는 그런 친구들을 옥희는 아주 추하게 생각했었다.
    "꼭 좋아하고 사랑해야만 만나니?  그냥 재밌잖아.  이런 남자 저런 남자 만나봐야 결혼상대도 잘 고를 수 있는 거야.  머리 좋은 애가 그쪽으론 왜그리 맹탕이니?  참 답답하다. 답답해.  너처럼 그렇게 도도하게 구는 거, 남자들이 좋아하는 줄 아니?  천만의 말씀,  딱 도망가기 안성맞춤이지."
    어느 친구가 한 말이다.  지나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다.  옷까지는 얻어입지 않더라도 밥은 먹을 수 있었다.  
    이왕 의심을 받을 바에얀 옛날에 놀기라도 했더라면 억울하지나 않지.  생각할수록 분하고 원통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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