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40년 후의 101번째 편지 (4)

2003.05.02 08:36

김영강 조회 수:521 추천:71

    버선목을 뒤집듯 싹 뒤집어서 속을 깡그리 보여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꼬.
    분명 남편의 말투에는 옥희가 그간에 김동추와 만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녀에겐 도저히 있을 수도 없는 일이기에 생각만 해도 오물을 뒤집어쓴 더러운 기분이었다.  이판사판 한판 벌여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렇게 날 의심하면 더 이상 살 수가 없으니 이혼을 하자고 그럴 것이다.  편지 백통 얘기를 꺼냈던 그날 밤처럼.
    그러면 남편이 또 싹싹 빌까?
    빌지는 않더라도 기가 폭 죽어 이혼 소리는 제발 좀 하지 말라고 그럴 것이 뻔하다.  옥희는 이길 자신이 있었다.  사실이지, 진짜 이혼을 한다 해도 옥희에겐 아쉬울 것이 하나도 없다.

    갑자기 '박영선'이라는 이름 석자가 머리에 떠올랐다.  그동안 아주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그 여자의 이름이 금세 생각 나 옥희도 의아스러웠다.
    근 삼십오 년을 사는 동안 남편의 입에서는 아직 한번도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기에 옥희도 모르는 척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별 불만 없이 살아오면서 그냥 잊어버리고 있던 일이기도 하다.  남편이 총각 시절에 사랑했던 여자가 있었다는 그런 이야기이다.
    결혼 후, 이십 년도 더 지난 다음에 세 딸이 다 대학에 다닐 때 옥희는 참말로 우연히 그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미국을 방문한 시이모로부터였다.
    
    옥희는 부엌에서 점심 준비를 하고 있었고, 오랜만에 만난 시이모와 시어머니는 거실에 앉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 꽃을 한껏 피우고 있는 중이었다.  깔깔대고 웃는 소리가 집안을 떠나갈 듯했고 목청이 큰 시이모의 음성은 옥희의 귀에도 뚜렷하게 들렸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추며 도란도란 말하는 것도 대충은 귀에 들어왔다.  

    이상하게도 그날 옥희는 자꾸만 그들의 대화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러다가 상민이라는 남편의 이름과 박영선이라는 여자가 그들의 화제에 오른 것을 그만 엿듣게 되었다.  거실을 향해 귀를 쫑긋 세웠다.  위치 상 그들은 옥희의 모습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먼 옛날 일이라 옥희에게 별 신경을 쓰지 않은 탓인지 남편의 과거를 실타래 풀듯 슬슬 풀어내고 있었다.
    "영선이가 며느리가 됐더라도 언니한테 참 잘했을 거야.  근데 언니, 걔도 괜찮았었는데 왜 그렇게 반대를 했수?"
    "영선이가 누구냐?"
    시이모는 소리를 낮춘 듯했으나 시어머니는 정말 모르겠다는 투로 또렷이 말해 옥희는 '영선'이라는 이름을 분명하게 들을 수가 있었다.
    "왜 그 애 이짢아.  내 제자 박영선이.."
    시이모님은 한 때 여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한 적이 있다.  이야기를 종합해 보니 박영선이라는 여자는 시이모님의 제자였고 남편이 그 여자를 알게 된 것도 시이모님 때문인 것 같았다.
    "너는 기억력도 좋다.  그게 언제 적 얘긴데 아직도 그 애 이름을 기억하고 있니?  그건 네가 모르는 소리다.  내가 반대를 한 게 아니고 지네들이 헤어진 거야.  눈치를 보아하니 상민이보다도 걔가 일방적으로 더 좋아한 것 같더라."
    "언니도 차암.., 걔 혼자서 일방적으로 좋아했다면 그렇게 오래 사귈 수가 없지.  걔네들 일은 언니보다 내가 더 잘 알아.  둘이서 얼마나 좋아했는데 그래,  사이도 꽤 깊었었고."
    잠시 얘기가 끊긴 듯하더니 시이모의 음성이 다시 이어졌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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