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40년 후의 101번째 편지 (5)

2003.05.09 14:15

김영강 조회 수:439 추천:68

    "자기네들이 헤어졌다 하더라도 형부랑 언니가 반대한 입심이 상민이한테 작용을 했을 거라고.  어쨌든 상민이가 영선이한테 못할 짓했어.  그후 나한테는 통 연락이 없었으나 소문 들으니 시집을 아주 잘 갔대."
    
    남편에게 그런 과거가 있을 줄은 참말로 상상 밖이라 시이모의 말을 들으면서 옥희는 기분이 묘했다.  '그렇게 오래 사귀었다'는 말에는 얼마나 오래 사귀었을까 하는 의문도 일었다.  황량한 바람이 몰아치듯 가슴이 싸아하게 차가워지며 온몸에 맥이 탁 풀리는 것 같았다.  허지만 그 여자가 시집을 잘 갔다는 말에는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날 밤, 옥희는 곁에서 곤히 자는 남편의 숨소리를 유난히 크게 느끼면서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며칠을 계속해서 그랬다.
    집안끼리의 중매로 옥희는 남편을 만난 지 육 개월만에 결혼을 하고 유학생인 그를 따라 미국 땅을 밟았다.  남편은 옥희가 마음에 꽉 들었는지 맞선을 본 다음 날부터 적극성을 띄고 접근을 했었다.  평생을 찾아 헤매던 배필을 만난 듯이 그는 매일 전화를 걸었고 또 집으로 찾아와 옥희보다도 먼저 부모님으로부터 거의 만점인 점수를 따냈었다.
    
    물론 박영선이라는 여자와는 완전히 청산을 한 다음이었겠지.  아니면 그녀와 헤어진 후, 허전한 마음을 달랠 길 없어 그랬을까?  아니면 결혼을 하고 유학을 떠나라는 부모님 강압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그때 옥희는 남편이 자신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꼈었다.  그리고 그냥 끌려가는 듯했으나 그녀도 그를 점점 좋아하게 되었고, 또 남편의 사랑에 확신을 가지고 결혼을 했다.  이제는 부부라는 인연이 단단히 매듭을 지어 도저히 풀 수 없는 정도가 되어 있다.  남편은 옥희에게 믿음을 심어 주었다.  더구나 여자 관계에 있어서는 더 그렇다.  지극히 단순하고 현실에 충실한 성격이니 과거에 연연할 그런 남편은 절대 아니다.
    
    허지만 옛날에 누굴 사랑한 적이 있노라고, 그런 말은 능히 할 수 있는 남편인데 그 이야기를 일체 입밖에 꺼내지 않은 것이 이상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옥희가 먼저 물어 볼까 하고 생각을 해보기도 했으나 귀를 쫑긋 세우고 엿들었다는 사실도 부끄러웠고, 그후 시간이 흐르면서 옥희의 마음도 잔잔하게 가라앉아 모르는 척하는 것이 낫겠다는 결론을 지어버리고 말았었다.
    
    그리고 잊고 살았다.  아주 가끔은 생각날 때도 있었으나 담담한 마음으로 지나칠 수가 있었고 반면에 무슨 비밀이나 간직한양 남편을 바라보며 혼자 입가에 미소를 띄우는 여유도 가졌다.

    옥희는 혼자 씩 웃었다.  진짜 알맹이는 쏙 빼놓고 중학교 때 한 여학생 때문에 어쩌고 저쩌고 한 남편의 술수에 넘어가 편지 백통 이야기를 한 자신이 우스워서다.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란다더니 바로 그 격이 아닌가?
    예전에는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한 사실들이 갑자기 머리에 떠오르면서 다시금 남편이 괘씸했다.
    자기가 서울 나가면 그 여자를 만나기 때문에 나도 그런 줄 알고 '서울 가면 그 사람 안 만날 거지?'하는 그 따위 소리를 한 것은 아니였을까?
    까마득한 옛날 일까지 시시콜콜 생각이 나 괘씸하고 또 괘씸했다.  또 혼자 위로도 했다.  맺고 끊음이 매정스러우리 만치 분명한 남편이니 그런 일은 없었으리라 하고.
    허나, 날을 세우듯 마음을 갈았다.  남편의 과거를 한번 터뜨려 보리라고 다짐을 한 것이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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