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40년 후의 101번째 편지 (7)

2003.05.23 10:47

김영강 조회 수:582 추천:82

    그 친구의 모습이 머리에 떠올랐다.  가늘가늘한 몸매에 하얗고 예쁜 옥희에 비해 그녀는 키도 크고 체격도 컸다.  눈코입이 큼직큼직해 뚜렷한 인상을 주는 친구였다.  그리고 얼굴 표정이 항상 어두웠던 것이 기억에 남아 있다.  친구의 모습에 겹쳐져 또다시 김동추의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편지를 받았을 때의 불쾌했던 감정이 점점 누그러지면서 철없고 교만했던 자신을 되돌아보고 있는 것이다.
    
    끄덕도 안하는 옥희에게 백통의 편지를 보낸 그 자체는 사랑이 아닌 집녑일 수도 있다.  만일 그가 옥희를 진정 사랑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때의 감정에 불과하다.  사랑은 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그는 괜찮은 여자를 만나 아주 잘 살고 있을 것이다.  쌀쌀하기 그지없고 도도하고 교만한 옥희에게 차인 것이 정말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만일 기적이 일어나 옥희라는 여자와 결혼을 했더라면 어떡할 뻔했지?  아휴, 생각만해도 스트레스다.  초조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면서  맨날 아내 눈치만 보다가 바짝바짝 말라 비틀어졌을 거야.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하며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괜히 쓸데없는 잡념만 일어 머리가 혼란했다.  달력을 한 장 쳐들고 '6월 6일 금요일'을 확인한 자신이 가소로웠다.
    옥희는 컴퓨터를 켰다.  잡념을 끊어버리는 데는 컴퓨터가 최고다.  이미 끝을 낸 번역이지만 문장을 더 다듬어야 할 곳이 없나 하고 다시 검토를 했다.  한데, 정신 집중이 안되고 컴퓨터 화면에는 남편의 밉살스러운 얼굴만 자꾸 부각되었다.
    
    근 이십 년 동안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을 하다가 오 년 전에 회사를 그만둔 후, 옥희는 지금 번역 일을 맡아 아주 즐기며 돈을 벌고 있다.  회사가 합병이 되어 타주로 이전해 어쩔 수 없이 그만두게 되었을 때, 남편은 당장 굶어 죽기라도 할 것처럼 사색이 되어 안절부절못했다.  그녀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내색이 심했다.  '아이구 어떡허지, 아이구 어떡허지'를 연발하면서 이리 돌아눕고 또 저리 돌아누우며 한숨을 푹푹 쉬어대곤 했다.
    
    사실 그간에 남편 못지 않게 봉급을 받던 옥희다.  그렇지만 그 돈이 끊어진다 하더라도 생활은 꾸려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살림의 규모를 늘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두 딸은 이미 출가를 한 후였고 막내도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시기였기에 옥희는 차라리 잘 된 것 같았다.  나이가 들수록 능력의 한계를 느껴 가끔은 이제 그만둘 때가 됐나보다하고 생각을 하고 있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시스템이 바뀔 때마다 옥희는 몸살을 앓았다.  딸들도 적절한 시기에 잘 그만두게 된 것이라고 하면서 그동안 엄마 고생했는데 이제는 자기네들이 생활비를 보태겠다고 했다.  말만 들어도 흐뭇했다.
    그런데 남편은 또 밉살스런 소리를 하며 옥희를 긁었다.
    왜 애들보고 생활비 얘기했냐고.
    
    남편은 참 이상한 면이 있다.  무슨 때에 아이들이 큰선물이라도 하면 그것을 마음 아파한다.  다음엔 이렇게 비싼 것 하지 말라고 정색을 하고 말한다.  카드에 현금이라도 들어 있으면 카드만으로도 족하다면서 돈은 도로 돌려 주려고 한다.  그러나 옥희의 의견은 다르다.  받는다는 것보다 먼저, 그것은 자식을 바로 가르치는 교육이라고 생각하기에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어주 기쁘게 받는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집안 청소를 열심히 하고 있어도 청소하는 사람이 다하는데 왜 애들 고생시키느냐고 안쓰러워하던 남편이다.  그래서 그들은 부부싸움도 하였으나 옥희는 옥희 식대로 아이들을 길렀다.  어쨌든 이제 딸들은 다 반듯하게 잘 컸고 셋 다 엄마와는 친구처럼 친하다.
    
    옥희는 그때 남편에게 한바탕했다.
    "애들은 힘들면 안되고,  와이프는 평생 힘 들어도 돈만 벌어오면 된다 그거야?  내가 돈 잘 벌어 오니까 나하고 산 거야?  이제 직장 떨어졌으니 이혼이라도 하고 싶어?  당장 생활에 위협을 받는다 하더라도 남자가 어떻게 그런 식으로 안달을 해?  내가 얘기했잖아.  앞으로 자기 혼자 벌어도 생활에는 별 지장이 없다고 말야.  왜, 내가 집에서 노는 꼴이 그렇게도 보기 싫어.  아무리 맘이 그렇다 해도 내 앞에서 그러면 안 되는 거야.  내가 이러면 와이프 맘이 어떨까 하고 좀 생각을 해야지 사람이 어쩜 그래요?"
    
    말을 한껏 불려 쏟아내면서 옥희는 남편을 다잡았다.  그제서야 남편은 아차했는지 자기 본심은 그게 아니었다고 얼렁뚱땅 얼버무렸다.  그러던 남편이 그녀가 번역일을 맡게 됐다고 하니 어찌나 좋아하는지 옥희는 또한번 씁쓸한 기분을 맛보아야만 했다.
    그동안 직장생활하느라 힘들었는데 금세 또 일거리가 생겨 어떡하지?  좀 쉬었다가 맡지 그래.
    이렇게 말을 했다 하더라도 번역일을 안 맡을 옥희가 아니다.  남편도 아내의 그런 점을 잘 알고 있을 텐데 말이다.  한바탕 난리를 치며 교육을 시켰는데도 역시 마찬 가지였다.  그 만큼 남편은 솔직하고 단순하다.  매사에 너무 신경을 쓰고, 완전주의를 고집하는 자신의 복잡한 성격보다는 오히려  더 좋은 성격이라는 것을 옥희는 가끔 깨닫는다.

    그런데 '박영선' 이야기는 평생을 입다물고 있으니 이상하지 않은가?  정말로 잊어버렸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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