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를 쓰고 잠이 드셨네
2010.02.22 12:35
-박영호 시인의 영정 앞에서-
70년 먼 길
얼마나 고단하셨으면
모자를 쓰신 채 잠이 드신 걸까
아픈 싸움이 얼마나 싫었으면
흰 깃발 같은 국화 무수히 내어 걸고
모자도 벗지 않은 채
아예 저토록 깊은 침묵에 빠져 버리신 걸까
많은 날 홀로 울던 외로움의 쌀들을 씻어
슬픔의 밥 지어놓고
마지막 얼굴을 보여 주시는 박선생님.
저마다 만든 눈물반찬 들고 와
아득히 멀어진 거리, 이쪽에서 수저를 든다
저 혼자 이별을 모르는 듯
이마 반짝이며 건강한 영정 사진
바람도 검은 상복을한 채 말이 없고
어리고 여린 손주들의, 슬픔에 씻긴
화환처럼 하얀 고요
시인의 얼굴만큼 익숙한 모습의 저 모자
주인 가시는 곳 따라 가려는 걸까
깊은 상념 같은 머리 맡에서 끝까지
낭만의 자존심 지키려는 걸까
자는 듯 검은 잠 드신 시인의
한 줌 흙으로 돌아 갈 살과
한 권 시집으로 세상에 남을 생의
또 다른 이별 앞에서
가만히 몸 숙여 수저를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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