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 좀 해줄래?

2009.04.18 01:00

고대진 조회 수:523 추천:127

 우리집에선 신문에서 재미있는 글이나 만화를 보면 오려서 냉장고 문에 붙여놓는 버릇이 있다. 혼자 보고 버리기는 너무 아까워서 냉장고에 붙여둔 글은 부엌에 드나드는 사람마다 보게 되고 집을 방문하는 사람들도 가끔 호기심에서 읽어보기 때문이다. 라슨의 만화 ‘Far Side’를 비롯해 ‘디어 애비’나 ‘디어 앤’에서 오려놓는 글이나 ‘마이크 로이코’의 칼럼이 냉장고의 주요 고객이 되곤 했는데 요즘은 내 글도 붙여놓는 마누라 덕택에 냉장고 문에 있는 공간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한다. 아마 자기도 읽고 있으니 마누라 험담은 아예 쓸 생각을 말라는 경고로 그럴 것이지만 눈 높은 독자를 가졌다는 것은 - 키가 커서 눈 위치가 나보다 조금 높다는 말임 - 즐거운 일이다.

 내가 붙여놓는 글은 주로 마누라가 보아야 될, 남편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글이다. 왜 남자는 길을 묻는 것을 싫어하는가, 남자들은 왜 여자 머리가 바뀐 것을 잘 모르는가 등등. 물론 마누라가 붙여놓는 글은 여자를 이해하기 위해 남편이 해야 할 일들이 실린 칼럼들. 최근 중앙일보의 ‘Culture and Life’ 칼럼에 나온 ‘아내 감동시키기’와 같은 글들이다. 사실 결혼하고 20년이 지나면서 어- 하는 소리 하나로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마누라를 어떻게 감동시킬 것인가? 아침밥과 저녁밥을 하는 정도는 시쳇말로 ‘당근’이 되어버렸고 미역국을 끓였는데도 별로 감동하지 않는 아내를 감동시키는 법이라. 흠, 이것만 잘 읽으면 되겠구나….

 사실 난 다른 남편들에게 “당신 미역국 끓일 줄 알아? 그 정도는 알아야지. 부인이 아프면 라면만 끓여 줄 거야?” 라고 해서 남자들의 미움을 받아왔다. 어느 날 당돌한 젊은이가 “그럼 선생님은 미역국을 끓일 줄 아십니까?”라고 되물었다.

 “그 정도는 우습지. 이건 한국에 계신 우리 어머니에겐 비밀이지만 난 아침 커피에서 시작해서 아침밥과 저녁밥을 다 해.”

 “정말요? 힘드시겠네요. 그럼 사모님께선 도대체 무얼 하십니까?”

 “뭐 별로 힘들지 않아. 아침밥은 시리얼을 그릇에 놓고 밀크를 부어주는 거고 또 저녁밥도 쌀 씻고 물 맞춰서 스위치만 올리면 되니까…. 마누라? 뭐 조금은 거들지. 직장 갔다와서 국하고 반찬하고 그릇 씻고 시장보고 김치 담그고 빨래하고 다림질하고 청소하고 빌 정리하고 도시락 싸고 또 뭐더라? 가만있자. 우리 누나만큼이나 일하는구나…” 라고 말하고 보니 정말 동포사회 부인들은 감동시킬만 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에게 부인 모시고 오페라 같은 문화행사에 한번 가 보세요 라면서 ‘아내 감동시키기’ 칼럼 이야기를 해주었다. 미국에 온지 오래된 어느 분이 웃으면서 그것도 사람 나름이지요 라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30년이 넘게 주말도 없이 고생해서 지금은 약간 숨통이 틔었는데 이제 우리도 문화생활을 좀 해야지 라고 생각해서 버지니아 오페라 입장권을 두 장 비싼 돈주고 샀어요. 저녁에 일찍 가게 문을 닫고 정장을 하여 오페라에 갔지요. 주위를 둘러보니 정말 다 백인들 뿐이더군요. 이제 우리도 주류사회에 들어가서 문화생활을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앞으론 좀 무리해서라도 시즌 티켓을 살까 라는 생각도 했어요. 서곡과 함께 오페라가 시작되었지요. 아, 그런데 오페라가 반도 끝나기 전에 자꾸 돈이 아까운 생각이 드는 거예요. 노래를 들으려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자막에 나오는 영어를 읽다보니 무대는 못 보겠고 그것마저 너무 빨리 지나가서 정말 답답하더라구요. 남들이 손뼉 치면 손뼉 치면서 돈이 아까워 끝까지 다 보고 나오면서 마누라 눈치를 봤더니 마누라는 자꾸 하품을 하며 말하는 거예요. 주차비 아까워 미치겠네. 씨- 주차비면 ‘상도’나 빌려다가 재미있게 볼 건데…. 당신 이 표 돈 주고 산 건 아니지?”

 “꼭 오페라를 가라는 말은 아니지요. 그래도 부인을 위해 쓴 돈이니 ‘거룩한 낭비’가 아니겠어요? 이럴 땐 부인들이 감동한 척이라도 해주면 좋을 텐데 너무 솔직하신가보다” 라고 하다보니 갑자기 나도 자신이 없어진다. 학생시절 음악회 표를 사서 데이트를 신청했을 때 클래식 음악을 별로라고 생각하는 마누라에게서 서너 번 퇴짜를 맞아 돈만 날린 적이 있기 때문이다. 가만있자. 오페라는 별로라고 해서 작년에 ‘라트라비아타’도 어머니랑 갔었지…. 흠, 그래도 이번 아버지 날엔 오페라 표를 사서 같이 가자면 감동 좀 안 해줄까?



<미주 중앙일보 2002년 05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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