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삿짐을 꾸리면서

2009.04.18 01:13

고대진 조회 수:763 추천:145

집을 팔고 나서 18년의 리치몬드 생활을 마감하고 이사준비를 하면서 정말 내가 얼마나 많은 허섭스레기를 만들고 살았는지 알았다.

얼마나 필요 없는 것들에 시간을 낭비했으며 버려야 할 것들까지 곱게 보관하면서 살았는지 증거들이 구석구석에서 나타났다.

십 년이 넘은 세금 보고서, 몇 해 지난 달력 그리고 거기 적힌 계획표, 언젠가 보려고 복사해두었던 수많은 논문들, 심지어 언젠가 프랑스에 여행가서 미술 박물관들을 볼 때 필요할 것 같아서 배우려고 사 두었던 불어 회화 책들까지 수도 없었다.

보관할 당시에는 역사를 간직한다고 했던 수많은 문서들과 심지어 쓰다만 부치지 못한 편지들까지 종이의 빛갈까지 노랗게 변한 채로 책상 서랍 구석에 쌓여있었다. 쓰는 사람의 마음이 바뀌었으니 받을 사람의 주소는 벌써 변했을 것이다.

어찌 종이만 쓰레기가 되었다고 하겠는가 책상 구석 깊숙이 감추어 두어 잊어버렸던 꽤 오래된 포도주 한 병을 발견하게 되었다. 와인공부를 자기 전공 만큼이나 많이 한 와인을 좋아하는 동생이 왔을 때 마시려고 감추어둔 십 년이 넘은 빈티지 ‘멀롯’이었다.

기분을 내서 와인 잔을 꺼내 조금 따라서 냄새를 맡고 맛을 보았더니 이건 요리용 싸구려 와인보다 맛이 없게 되어버렸다. 결국 입 속에 있는 것 모두를 뱉어버리고 입안을 씻느라 법석을 떨고 말았다. 숨겨놓았던 와인이 그 사이에 변해버린 것이 분명했다. 콜크로 막고 양초로 밀랍을 한 상태지만 지난 17년 동안 에어컨이 고장난 날이 몇 번이나 있었으니 그 때 변한 것이 분명했다.

얼마 전 미주 중앙일보에서 ‘친구와 와인은 오래 될 수록 좋다’라는 기사를 본 일이 있는데 이 말도 다 옳은 것은 아닌 것 같다. 필자같이 간수를 잘못하면 좋은 와인도 변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친구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오래 된 친구가 좋기는 하지만 가끔 잘못 간수하면 내가 보관했던 포도주같이 맛이 가버린 친구로 변해버릴 수도 있다. 물론 원래 성품이 별로 좋지 않은 사람이라면 아무리 오래 묵혀도 좋은 친구로 변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사실 사람의 성품이란 병에 들은 포도주 같아서 꺼낼 수 없는 것이니까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좋은 사람을 아는 방법은 있다. 주위의 친구들을 보는 것이다. 오랜 친구를 간직하지 못하고 자꾸 새로운 사람만 친구로 만들려는 사람이나 별로인 사람을 친구로 가진 사람을 보면 타이틀에 관계없이 좀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멀지 않은 곳에 산이 있고 강이 도시 한가운데를 흐르고 바다가 두 시간 거리에 있으니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는가 라고 자랑하는 리치몬드.

허지만 습기가 전혀 없는 서부의 쾌적한 여름에서 이곳으로 처음 이사왔을 때 나는 끈적끈적한 리치몬드의 여름에 적응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산만 하더라도 캐스캐이드 산맥이나 캐내디안 록키를 따라 있는 배이커산이나 레니어산 같은 험하고 아름다운 산들만 보았던 나에겐 이곳 산은 조그만 언덕 정도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리치몬드가 좋아지기 시작한 것은 좋은 친구들을 만나면서부터이다. 학교에서, 테니스장에서, 교회에서, 한인회에서, 또 문학 세미나에서 재주가 많고 성품도 맑은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형이라고 부르는 친구들 또 동생이라고 부르는 친구들은 나에게 리치몬드가 정말 살만한 곳이라고 생각하게 해주었다.

이곳에 사는 동안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난 것은 나에게 커다란 축복이었다. 오래된 포도주를 간직하듯 이런 사람들과의 만남은 오래 기억하며 간직하게 되리라. 결코 변해버린 포도주같이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내일 올 이삿짐 차를 기다리며 짐 싸기를 계속한다. 접어버린 유럽여행의 꿈에 연연하거나 변해버린 포도주를 아까워할 시간은 없다. 가지고 갈 것과 버릴 것을 가려야 할 시간이다. 이 삶의 구석마다 엉켜있는 쓰레기를 정리하고 나면 정말 멀리까지 가져가야 할 것들은 나의 삶에서 얼마나 되며 정말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은 사람들은 또 몇이나 될까 생각한다.

떠나야 할 시간은 자꾸 다가오는데 점점 커지는 쓰레기더미를 보며 이를 만들기 위해 버려버린 나의 시간을 아까워하는 것은 텍사스로 향하는 차안에서 하기로 다짐한다.

차안에서는 별 보기가 부끄러울 것 같다.


<2003년 7월 14일 미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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