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쟝뛰유의 눈

2007.01.23 02:38

고대진 조회 수:1071 추천:143

미국은 도시마다 미술관이 있고 거의 돈을 내지 않고 좋은 그림을 감상할 수 있어 좋다. 특별 전시회라도 열릴 때면 보고 싶던 유명한 그림을 직접 대할 수 있어서 더욱 좋지만, 사람들이 밀려오고 밀려가는 속에서 깊은 생각을 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한적한 미술관을 즐겨 찾는다. 그곳에서도 내가 찾는 작품은 훈계하거나 군림하려 드는 작품이 아니라 대화를 나누자고 손짓하는 작품들이다. 그런 작품 앞에서는 시간이 아깝지 않다. 가끔 스케치북을 가지고 가서 그림을 복사하기도 한다. 허락받으면 큰 화판을 펼칠 수도 있지만 그림과 대화를 하면서는 그림을 그릴 수는 없는 일 그냥 스케치로 만족할 일이다.

몇 년 전 버지니아 시골 미술관에서 열린 인상파 특별 전시회에 갔다. 유명한 그림 앞에는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나에게 말을 걸어줄 여유가 있는 그림은 없는 것 같은 날이었다. 사람들을 피해 구석에 전시되었던 작품을 돌아보고 있었는데 한 그림이 나에게 손짓했다. 회색 거리 위로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는 ‘아르장뛰유의 *’ 이었다.

하늘을 가득 채운 눈 속에 X 구도를 따라 담이 그려져 있고 담 옆의 좁은 길 눈을 맞으며 걸어가는 여인의 모습이 작고 희미하게 그려져 있었다. 구석에 밀려있어 사람을 끌지 못한 그림이었는데도 나는 그 그림 앞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그 그림 속에서 눈을 맞으며 걷고 있는 여인은 내가 오래전에 알았던 여인 같았다. 그 여인이 나를 끌어 움직이지 못하게 한 것이다. 뒷모습을 그려 얼굴은 나타나지 않고 뒷머리도 작은 동그라미 하나로 그려졌지만 그녀의 출렁이는 걸음걸이까지 보는 듯했다. 하늘을 가득 덮은 눈발. 사람들은 이미 다 제집으로 들어간 길을 여인 혼자서 걸어가고 있다. 앞만 보면서 혹은 땅을 보면서 뒤로는 눈길도 주지 아니한다발걸음 소리로 내가 뒤따르는 것을 알 터인데 그녀는 눈을 맞으며 앞만 보고 간다. 바쁜 걸음으로 걸어가는 이유가 나를 피하기 위해서인가? 혹시 옆에 있는 대문으로 쏙 들어가면 어쩌지? 말을 걸었다가 화난 얼굴을 보기라도 하면 또 무슨 망신이지? 나는 그림으로 들어갔고 또 그림에서 나왔다. 그림은 날 떠나지 않았다.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나는 미술관에 가서 구석에 있는 그림 속 그녀를 쫓아다녔다. 온종일 펑펑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아르장뛰유의 거리를 돌아다녔던 날 밤 여인이 내게 대답한다.
“제가 들어가야 할 집은 벌써 지났습니다. 제가 뒤를 돌아보지 못한 까닭은 당신을 향한 제 표정을 들킬까 두려워서입니다.
그래서 그녀와의 만남은 시작되고 눈 속을 거닐거나 아르쟝뛰유의 강가, 마을의 다리, 혹 연꽃이 있는 연못가 그녀와 돌아다닌다.** 그리고 이 수익 시인의 <그리운 악마> 떠올렸다.

숨겨 둔 정부(情婦) 하나/ 있으면 좋겠다./ 몰래 나 홀로 찾아드는/ 외진 골목길 끝, 그 집/ 불 밝은 창문(窓門)/ 그리고 우리 둘 사이숨 막히는 암호(暗號) 하나 가졌으면 좋겠다.//아무도 눈치 못 챌/ 비밀 사랑/ 둘만이 나눠 마시는 죄() 달디단/ 축배(祝杯) 끝에/ 싱그러운 젊은 심장의 피가 뛴다면!// 찾아가는 발길의 고통스런 기쁨이/ 만나면 곧 헤어져야 할 아픔으로/ 끝내 우리/ 침묵해야 할지라도// 숨겨 둔 정부(情婦) 하나/ 있으면 좋겠다./ 머언 기다림이 하루종일 전류처럼 흘러/ 끝없이 나를 충전시키는 여자,/ 악마같은 여자.

나는 만남의 기대에 싱그러운 피가 뛰는 젊음으로 돌아간다. 함께라면 말없이 그냥 걷기만 해도 행복하고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마음이 부르다. 그의 말이 모두 내 말이 되고 내 말이 모두 그녀의 말이 된다. 아르쟝뛰유의 , 그녀의 종종걸음, 눈길에 남겨진 발자국, 강가를 따라 눈 온 뒤 펑펑 쏟아지는 햇볕을 맞으며 걷던 날… 가슴 따스한 나의 그림이 새로 그려진다.

전시회가 끝나고 그녀와 헤어져야 했다. 그녀는 이제 다른 마을의 어느 작은 박물관에서 “제가 들어가야 할 집은 벌써 지났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기다리며 펑펑 내리는 눈 속을 걷고 있을 것이다.

*: 모네는 ‘아르쟝뛰유의 눈’ 이란 제목의 작품을 여러 편 남겼지만, 눈이 펑펑 내리는 그림은 하나이다.
** 모두 모네가 그린 아르장뛰유의 풍경에 나오는 장소이다.

(20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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