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규

2007.03.23 02:23

고대진 조회 수:1271 추천:160

 

다빈치의 작품 ‘모나리자’가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미술 작품이라면 현대 미술의 아이콘(icon)이 되는 작품은 무엇일까? 아마도 노르웨이 화가 뭉크* (Edvard Munch, 1863-1944 )의 ‘절규(scream, 1893년 작)’라는 작품이 아닐까 한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를 비뚤어지고 생김이 완성되지 않은 괴물 같은 사람이 다리 위에서 두 손으로 귀를 막은 채 눈과 입을 크게 열고 있는 모습의 그림을 누구나 한 번쯤 보았을 것이다. 사람 뒤에는 다리를 따라오는 듯한 두 사람의 검은 모습이 보이고 핏빛 노을이 마치 그 사람이 지르는 소리에 울리는 듯 하늘을 흐르며 드리워져 있다. 다리 아래로 검푸른 바다가 어지럽게 흐르고 부분적으로 노을빛을 노랗게 반사하고 있다.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르네상스 시대의 이상인 평온함과 안정을 느끼게 해준다면 뭉크의 ‘절규’는 공포와 불안이 드리워진 이 시대를 느끼게 한다. 귀를 막은 채 눈과 입을 크게 열고 있는 모습을 보면 공포를 참지 못하고 절규하는 것 같기도 하고 슬픔이 너무 커서 소리조차 못 내는 상태를 표현한 것 같기도 하다. 도대체 어떤 공포이고 어떤 슬픔이길래 얼굴의 형태조차 문드러지고 소리조차 낼 수 없을까?


어디서 우 울음소리가  들려/ 겨 겨 견딜 수가 없어 나 난 말야/ 토 토하고 싶어 울음소리가 끊어질 듯  끊이지 않고 들려와 … 이렇게 시작되는 이승하 시인의 <畵家 뭉크와 함께>는 폭력과 광기로 얼룩진 80년대의 우리 사회를 보며 절규하고 있다. 거대한 권력의 학살극을 지켜보며 대항할 힘도 없는 시인의 무력한 입은 결국 말더듬증으로 변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소 소름 끼쳐 터 텅 빈 도시/ 아니 우 웃는 소리야 끝내는/ 끝내는 미 미쳐버릴지 모른다/ 우우 보트 피플이여 텅 빈 세계여/ 나는 부 부 부인할 것이다… 라며 시인은 이 그림을 시대의 광기 때문에 미치기 직전까지 가 더듬으며 절규하는 자신의 모습으로 보고 있다.


하나 얼굴이 이렇게 문드러지는 절규를 지를 수밖에 없는 슬픔이라면 말더듬이 정도로 멈추지 못할 것이다. 이유 없는 전쟁에서 떨어진 포탄으로 일가가 몰살되고 혼자 남겨졌을 때, 아침에 인사하고 나간 아이가 갑자기 교통사고로 죽어서 병원에 있으니 시체를 확인하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세상에서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이럴 땐 울음도 나올 수 없을 것. 그저 텅 비어버린 세상에 죽음만이 내 가까이에서 손짓하고 있다는 생각뿐일 것이다. 외마디 절규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가슴 안으로 울려서 그 울림으로 얼굴이 형태가 일그러지고 만 것이 아닐까반벙어리가 아니라 아예 말을 잊게 되는 슬픔소리 지르며 울 수 있는 슬픔이 얼마나 부러운지… 차라리 미쳐버리면 얼마나 행복할 것인지… 글로 쓸 수 있는 고통은 또 얼마나 가벼운 것인지… 그래서 손으로 두 귀를 막고 초점 없는 눈으로 죽음을 보며 소리 없는 절규를 토하고 있는 것 같다.


뭉크의 <절규> 2004년 여름 오슬로 국립미술관 전시실에서 2인조 도둑에게 절도를 당했다. 범인들은 잡혀 법정에 섰지만 도난 낭한 작품 ‘절규’의 행방은 아직도 묘연하다. 어디서 절규하고 있는지…


*: 뭉크는 다섯 살에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돌아가시고, 그 후 동생과 누나가 같은 병으로 죽어 가까이서 죽음의 공포를 경험했다. 그런 경험이 그의 내면에 스며들어 이런 유의 인간의 내면의 세계를 표현한 그림을 많이 그릴 수 있었으리라. 그 뒤 노르웨이의 국민 미술가로 추앙되면서도 홀로 살았으며 인간의 내면을 표현한 몇천 점의 훌륭한 그림을 남겼다.


(2007 3)

 


회원:
1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1
어제:
0
전체:
37,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