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맥주와 순대

2009.04.18 00:47

고대진 조회 수:887 추천:139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이십 년 전에 처음 미국에 와 웃음 나오는 실수를 많이 했다. 시애틀에 유학 와서 학생생활을 막 시작한 때였다. 수영을 한시간 넘게 해서 배도 고프고 목도 마르고 내 사무실 옆 기숙사 식당에 저녁을 먹으로 갔다.  식당 문 앞에서부터 고소한 냄새가 나는 것이 오늘메뉴가 좋겠구나 하는 기분이다. 통닭구이였다. 갈색 빛으로 잘 구워진 다리부분 두 쪽을 집고 음료수쪽으로 가니 어떤 미국녀석이 짙은 갈색의 맥주 같은 것을 수도꼭지 같은 것에서 쭈르르 따라 가져간다. 가보니 정말 놀랍게도 생맥주라고 쓰여있다. 수영 후에 통닭에 생맥주라니 한국 무교동에 온 기분이었다. 정말 재수 좋은 날 이었다. 여섯 잔을 한꺼번에 따라 트레이에 놓고 호수가 보이는 창가에 자리잡고 앉아 우선 한잔 쭉 들이키는 대 이건 웬일이냐 맥주에서 치약 냄새가 나고 들큼 찝찝한 것이 맥주가 아니지 않는가? 내가 잘못 봤나 하고 다시 보아도 생맥주가 분명하다. Root Beer 라고 분명히 써 있는 대... 여섯 잔의 루트비어를 다 마시고 나니 통닭이 웃는 것 같았다.  

  몇 달이 지난 뒤다. 한국 모 대학에서 교수단이 단기수련을 위해 내가 있던 대학에 왔다. 나는 통역관으로 임명되어 몇 분을 자주 만나게 되었다. 한두 주 뒤에 보니 좀 나이가 드신 교수님께서(생각하니 지금 내 나이 정도다) 무척 화가 나서 씩씩거리고 있다. 날 보자마자 대뜸 한국사람들은 미국까지 와서도 버릇을 못 버린다고 한다. 보통 때는 무척 온순하신 분이라서 왜 무슨 일이 있었어요 물어보니 옆에 있던 좀 젊은 교수가 이야기한다. 어제 오랜만에 집에서 부쳐온 오징어랑 쥐포를 굽고 먹다가 안주 본 김에 술이라고 맥주 사러 한국 분이 하는 그로서리에 가서 생맥주 두 팩을 샀는데 그만 열 두개가 모두 변질된 맥주였다는 것이다. 너무 오래돼서 달고 치약 같은 냄새도 나더라 면서 여기까지 와서 불량식품을 팔다니 말이나 됩니까 두 분이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인다. 혹시 해서 어떤 맥주였어요 했더니 아니나 달라 Root Beer 라고 하는 거다. 글쎄 두 분만 드시니까 그렇지요 절 불러 같이 먹었으면 신선한 맥주를 골라드렸죠 하면서 웃었다.  나 혼자 바보는 아니었구나 하고 안심도 되었다. 놀부가 박을 타듯이 열두 캔을 하나 하나 따면서 이것도 상했고 이것도 이놈들 나쁜 놈들하며 오징어를 씹었을 모습 생각하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이 루트비어가 한국 사람들에겐 왜 생맥주로 자연스럽게 번역이 되는지 잘 모르지만 이 명칭 때문에 속은 사람들은 정말 한둘이 아닌 것 같다. 이제는 수입상품을 쉽게 볼 수 있는 한국에서도 루트비어가 상륙했으니까. 몇 년 전이다. 한국에 오랜만에 나가서 동생 집에 있을 때다. 냉장고를 열어 마실 것을 찾는데 루트비어 다섯 캔이 있는 것 아닌가? 아이구 내 동생이 국제화가 다 되었군 하고 너 루트비어 좋아해? 했더니 하는 말 미제 생맥주인줄 알고 사왔다가 한 캔을 마시다 뱉어 버리고 버릴 수도 없어 그냥 놔두었단다. 어유 그 형에 그 동생이구나 하면서 내 실수를 이야기해 주었다. 혼자는 아니니 안심해 하면서.

  기숙사에선 한 학기에 한 두어 번 스태잌이 나왔다. 촛불까지 켜놓고 제법 분위길 살려준다. 물리학과에서 공부하던 내 대학동창이 하는 말 “야 대진아 미국에서도 순대가 다 있더라.” “농담하지마.” “진짜야. 오늘 저녁 메뉴 보니까 순대라고 나왔더라.” “진짜? 그러면 우리 깨소금 좀 준비해서 가자.” 양념 병에다 한국에서 가져온 깨소금을 준비하고 가니 냄새가 과연 좋다. 스태잌이군. 우린 순대나 실컷 먹지 뭐 하고 아무리 찾아도 순대는 안 보인다. 야 너 잘못 본 것 아냐? 아냐 저기 써있잖아 순대라고. 가서보니 왠 아이스크림만 잔뜩 있다. 친구녀석이 가리키는 메뉴를 보니 Sundae 라고 크게 쓰여 있었다. 얼마나 고국 음식이 그리웠으면 선대가 순대로 보였을까만 그 녀석 너무했지. 지금은 아이까지 있는데 그 녀석 혹시 주일날마다 자기 아이들을 순대스쿨(Sunday School)에 보내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결혼을 하면서 한국말을 더 많이 쓰게되어 영어가 불편해진다. 어느 날인가 지도를 들고 집을 찾는데 아무래도 찾을 수가 없다. 그래서 차를 멈추고 앞에 있는 미국 사람에게 다가가서 지도를 펴면서 물었다. 내가 뭘 도와드릴까요? “Can I help you?" 라고. 그 미국사람이 좀 당황해 하다가 웃는다. 나도 그때서야 절 좀 도와 주시겠습니까 ”Can you help me?" 대신 내가 뭘 도와준다고 한 것을 알았다. 둘이 한참 웃다가보니 한국말로 웃었는지 영어로 웃었는지 기억이 없다. 웃음은 말의 차이가 없는 모양이다.

  그렇게 해도 졸업은 해서 리치몬드에 직장을 얻어 왔다. 내가 있는 대학에는 한국에서 방문교수들이 많이 와서 자주 어울려 지낸다. 이분들도 나와 같은 실수를 많이 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다음은 어느 한 방문 교수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미국에 와보니 한국에서 영어 공부한 것이 말짱 헛것이었다. 말은 그럭저럭 하겠는대 상대방의 영어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보통 웃으면서 고개나 끄떡이며 알아듣는 체 했는대 도저히  안되겠어 교수들이 있는 데서 심각하게 고백을 했다. "I have hearing problem." (나  잘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그랬더니 모두 이제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떡이는데 그 다음부터는 그에게 말할 땐 크게 고함을 지르며 이야기하더란 다. 한국에서 항상 ‘히어링’이라고 써오던 것을 생각해 말한 것이  내 귀가 잘 안 들린다고 말해버린 것이다.

  한 달이 뒤 과장이랑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같이 걸어오는대 과장 사무실 앞에서 조금 있다가 보자 그러면서 자기 방으로 들어가더란다. 뭐 더 말할 것이 있나보다 하고 문 앞에서 한시간을 넘게 기다려도 안 나온다. 금방 보자고 그러더니 말이다. 두 시간을 넘게 기다리니 그제야 나오면서 문 앞에 서있는 이 교수를 보고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아니 당신이 "See you soon" 이라고 하지 않았냐고 “soon” 이라고 해서 금방 나올 줄 알고 기다렸노라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다음부터 과장이  “So long” 이라고 인사를 하더란 다. “long”을 강조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자꾸 실수를 하면서 말을 배우고 문화를 배우고 사는 것을 배운다. 공부를 많이 했던 적게 했던 상관도 없이 말이다. 어디 가든지 다 사람 사는 곳이니 다 살게 마련이라는 말을 요즘 더욱 피부로 느낀다.

<미주문학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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