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 시인

2004.04.02 0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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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은 내 고향 제주도를 비롯한 남쪽 도서 지방에 12월이나 1월에 꽃망울을 터트리는 꽃이다. 다른 꽃들이 눈 속에 숨어 봄을 기다리고 있을 때 피처럼 붉은 꽃잎과 샛노란 수술을 가진 꽃이 초록 잎 속에서 숨막히게 아름답게 피어난다. 추운 겨울 동안 벌, 나비와 같은 곤충들이 날아다니지 않기 때문에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꽃 같지만 동백꽃의 꿀을 좋아하는 귀여운 동박새가 꽃가루를 옮겨주어 열매를 맺게 해준다. 새가 꽃가루받이를 해주는 동백같은 꽃을 조매화라 한다. 동백은 또한 가장 아름답게 꽃핀 상태에서 마치 목이 부러지듯 뚝 하고 송이채 떨어진다. 떨어진 꽃 치고 이렇게 아름다운 꽃은 아직 본 적이 없다. 진달래나 철쭉같이 지고 나서도 한참을 나무에 말라붙어서 손으로 털어 내야 하는 꽃나무와는 아주 대조적이다. 이런 모습 때문인지 아니면 그 꽃말 때문인지 -동백의 꽃말은 ‘그대를 누구보다도 사랑한다‘ 이다- 동백을 노래한 시가 많은 것을 보면 동백꽃은 지면서도 사랑을 생각하게 하는 모양이다. 동백꽃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시는 뭐니뭐니해도 한산도님이 지은 동백아가씨일 것이다. 백영호님의 곡에 이미자님이 부른 이 노래는 아직도 내 가슴에 생생하다. 동백꽃잎에 새겨진 사연/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젖어/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가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이미자님의 애달픈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를 들으면 듣는 사람의 가슴 또한 빨갛게 멍이 든다. 특히 술이라도 한잔 마시고 들으면 더욱 생각나는 그 사람.... 그런데 난 이 동백아가씨 때문에 여학생에게 버림받은 일이 있었다. 대학 일학년 때 미팅에서 음악을 전공하는 파트너와 음악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스트라빈스키가 어쩌고 하더니 갑자기 그쪽은 어떤 곡을 좋아하세요? 라고 물어왔다. 예 저는 ‘동백 아가씨’를 제일 좋아합니다 라고 했더니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 그 클라식 음악을 전공하던 아가씨.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난 중얼거렸다. 장난도 못해보나...라고. 실은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에 나오는 주인공 비올레타가 들고 나오는 꽃이 동백인대 그 번역 <춘희>의 ‘춘’이 동백꽃을 뜻하는 고로 <춘희>는 <동백 아가씨>가 되어야 하는 셈이다. 좀 유식한 척 하려다 그만 설명할 시간도 없이 그렇게 되고 말았다. 동백에 대한 좀 오래된 시로 미당 서정주 시인의 <선운사 동구> 가 있다. 선운사 골짜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니다. 미당은 아직 피지 않아 보지 못한 꽃에서 작년에 보았던 동백을 생각하고 있다. 사실 선운사 동백은 남도의 동백보다 늦게 피어 4월 5월에야 핀다. 다른 곳에서 동백의 소식을 듣고 갔다가는 작년 것만 보기가 십상이다. 백제 때 세운 선운사의 동백이 미당의 노래로 많이 알려지면서 -그의 시비가 선운사 입구에 있다 - 다른 시인들도 선운사 동백을 노래한다. 김용택 시인의 <선운사 동백꽃>을 보자. 여자에게 버림받고/ 얼음 낀 선운사 도랑물을/ 발로 건너며/ 이 아리는 시린 물에 / 이 악물고/ 그까짓 사랑 때문에/ 그까짓 여자 때문에/ 다시는 울지 말자/ 다시는 울지 말자/ 눈물을 감추다가/ 동백꽃 붉게 터지는/ 선운사 뒤안에 가서/ 엉엉 울었다 동백꽃이 붉게 터지듯 갈라지는 가슴 그 안에서 선지피가 흐르는 듯한 애처로움을 살짝 감추고 숨어서 아이같이 엉엉 우는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울고 나면 그래도 가슴이 후련해지리라. <선운사에서> 라는 최영미의 시가 주는 느낌은 또 다르다. 현대화된 겉으로는 당당한 듯한 여성의 모습을 아주 잘 나타내고 있다. 꽃이 /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최영미 시인은 힘들게 피었다 쉽게 져 버리는 안타까움 속에서 피어있는 꽃의 모습 (혹은 이별한 님의 모습)을 오랫동안 기억코자 한다. 그 기억이 얼마나 아프면 ‘잊는 것 또한 순간이었으면 좋겠네’ 라고 노래할까? 봉오리를 맺고도 다섯 달 정도 기다리다 어렵게 피어나는 동백의 모습을 더 잘 그린 시는 강은교 시인의 <동백>이다. 만약/ 내가 네게로 가서/ 문 두드리면, // 내 몸에 숨은/ 봉오리 전부로/ 흐느끼면, // 또는 어느 날/ 꿈 끝에/ 네가 내게로 와서 // 마른 이 살을/ 비추고/ 활활 우리 피어나면, // 끝나기 전에/ 아, 모두/ 잠이기 전에. 이런 기다림으로 문 두드릴 너는 누구인가? 정말 가슴 깊은 곳에 간직하는 그 사람? 이 시를 처음 읽던 해 어느 봄날 밤 펑펑 눈이 쏟아졌다. 모든 것이 하얗게 변한 아침 눈 위에 떨어져있던 빨간 동백꽃 몇 송이. 잠이 도통 오지않았던 전날 밤 까맣게 막혀버린 생각...흑, 백, 적의 세가지 색갈만 존재하고 있었다. 나도 시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했을 했다. 유안진 시인의 <선운사 동백꽃> 또한 핏빛의 꽃을 사랑으로 노래한다. 무너지고 싶습니다/ 녹아지고 싶습니다// 여우바람으로/ 자맥질치는 불길// 미친 이 불길 잡아 달라고/ 눈 비를 맞아 봅니다만// 밤마다 고개 드는/ 죄를 죽입니다만// 눈서리가 매울수록/ 오히려 뜨거워만 집니다// 마침내는 왈칵/ 각혈 쏟고 말았습니다 부처님. // 아마 이 시의 화자는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앉은 누님’같은 나이의 여인인 것 같다. 사랑하는 것이 죄가 되는 나이. 그러나 막으면 각혈을 하듯이 쏟아질 수밖에 없는 사랑. 하얀 눈 위에 떨어진 빨간 동백꽃을 보며 이런 하소연을 한다면 누가 감히 눈 비도 식히지 못하는 이 동백아줌마의 사랑에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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