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꽃밭

2009.04.18 01:11

고대진 조회 수:782 추천:136

 

원예를 무척 좋아하셨던 아버지 때문에 난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꽃 심부름을 힘들게 했다. 아버지는 제라늄, 베고니아, 선인장, 국화, 미모사…등등 그 당시엔 외우기도 힘든 이름을 가진 꽃나무들을 접붙이고 꺾꽂이하며 종자개량을 하고 계셨다.

국화만 하더라도 종류마다 꺾꽂이한 30개 정도의 무거운 화분들을 몇 시간은 간접 광선에 놓았다가 몇 시간은 완전히 그늘진 곳에 옮겨 놓아야 했는데 이 옮기는 일이 내 몫이었다. 아버지가 멀리 출타하셔서 이 일을 생략하기라도 하면 화초가 아버지한테 다 일렀다면서 불호령을 쳤다.

꽃 이름이나 성격도 일일이 외워야 했는데 다른 것은 잘 외우면서 꽃들의 성격은 왜 그렇게 외우기 어려웠던지 나중엔 꽃이 미워지기까지 했다. 그렇게 해서 좋은 꽃이 나오면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거저 나눠주셨다. 물론 무거운 화분들을 배달하는 것은 아들인 나의 몫이었고. 당시 내가 한 맹세는 절대로 꽃을 안 가꾼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철이 든 후에도 꽃이라면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혹시 예쁜 여학생이 무슨 꽃을 좋아하느냐고 물어도 들꽃이라고 얼버무리고 지나갔다.

그러던 내가 꽃밭과 다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아파트에서 살던 아내가 답답하다며 집을 사자고 하면서였다. 투자나 돈 관리에 대해선 문외한인 나에게 집을 사는 것이 얼마나 세금을 절약하는지 설명을 하는 아내를 이길 방법이 없어 결국 집을 샀다.

리치몬드에 이사와서 일년이 지나서였다. 처음 앞뜰과 뒤뜰의 잔디밭이 시원하여 아들 녀석이 뛰어 놀기도 좋고 숨이 트이는 것 같았는데 그 잔디라는 것이 집안의 양탄자와 달랐다. 놔두면 계속 자라고 관리를 잘 해야 잡지에 나오는 것 같이 아름답게 되지 그냥 놔두면 이웃에서 불평을 했다.

이곳 사람들은 정말 잔디 깎는 것이 취미인 것 같았다. 아니면 그렇게 열심히 비료 주고 물주면서 빨리 자라게 하면서 깎는 기회를 자주 만들리 없는데 말이다. 잔디밭에서 항상 시간을 보내는 이웃들에 둘러싸인 나에게 반 에이커의 잔디밭 관리는 엄청난 고통이었다.

거기다가 이곳의 한인들은 텃밭을 만들어 깻잎이나 부추며 상추 등 온갖 채소를 가꾸어 먹는다는 것을 들은 아내가 우리 마당에도 꽃밭과 텃밭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밭만 만들어주면 자기가 일은 다 한다고. 생각하니 화단을 만들면 잔디밭이 그 만큼 줄어들 것 같아 화단과 텃밭 일을 모두 아내가 맡는다는 약속을 서너 번 확인하고 나서 화단과 채소밭을 큼직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런데 내가 얼마나 바보였는지! 아내는 어느 것이 잡초인지 어느 것이 꽃인지 구별을 못하는 도시 여자였다. 더구나 벌레는 모두 자기에게만 달려든다고 확신을 하고 나서는 밖에 나갈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나에게 “밖에 있는 건 모두 자기거야…” 라며 마치 아까운 보물을 넘겨주는 듯 밖에 일을 나에게 맡겨버렸다. 이것이 내가 옛날 했던 굳은 맹세를 깨고 아버지같이 꽃을 가꾸며 마당에 나무를 심기 시작한 사연이다.

17년이 지나니 새로 심었던 나무들이 자라서 우리 집은 숲속의 집이 되었다. 계절 따라 바꿔 심는 꽃 때문에 한해를 꽃 속에서 지내다 보니 아버지같이 되는 것 같다. 도시에서만 자란 아내에게 꽃들의 성격이며 이름들을 가르치면서 내가 어디서 이걸 다 배웠지 라고 생각해보니 어릴 때 아버지에게 야단맞으며 배운 것이었다. 요즘은 마치 내가 우리 아버지라도 된 듯 “흙 냄새가 얼마나 향기로운데. 사람은 역시 흙을 만지며 살아야해…” 라며 아내에게 말하곤 한다.

집을 팔고 나서 임페이션스와 페튜니아를 잔뜩 사다 꽃밭마다 심는 나를 보며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웃들에게는 “이 시간을 놓치면 여름 내내 즐길 수 있는 꽃을 심을 기회를 놓치기 때문에 그리고 어릴 적 아버지가 꽃은 혼자만 즐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라고 웃으며 말했다.

며칠 전 집을 산 사람에게서 엽서가 왔다. 자기들을 위하여 화단에 새로 꽃을 심어주어서 감동했고 고맙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만든 꽃밭을 즐길 사람들을 위하여 메모지에 꽃을 심어야 하는 때와 종류들을 적어두었다. 간단하게 정원에 있는 꽃나무들의 성격도 적어서 남겨두고 이사를 가려고 한다.

성공이란 ‘건강한 아이나 예쁜 꽃밭 하나를 남겨 놓음으로써 세상을 조금 더 좋게 해 놓는 것’ 이라는 에머슨의 시구를 생각하면서 우리 아버지를 생각한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다섯 남매를 남기고 또 우리 마음에 예쁜 꽃밭을 남기신 아버지는 성공하신 분이었다. 나도 아버지만큼 성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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