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드를 그리면서

2009.04.18 01:23

고대진 조회 수:795 추천:202

 

몇 년 전 버지니아 미술 박물관 소속 스튜디오 스쿨에서 열리는 ‘인체데생과 초상화’란 전시회에 작품을 몇 점을 출품하게 되었다. 학생 작품전이였지만 필자가 참가하는 첫 전시회라 주위사람들에게 가보라고 초대장을 보냈다. 다녀오신 분이 “아니 그럼 그 그림들 상상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모델을 놓고 그린 것이란 말이죠? 그럼 벗은 모델을 매주 3시간씩 본단 말입니까?” 라면서 야단을 쳤다. 어떤 부인들은 가본 사람들에게 소문을 들었는지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고 물으면서 킥킥 웃는다. “부인이 허락을 하십니까?” 혹은 “어디서 하죠? 저도 하고 싶은데... ” 라는 물음이 대부분이고 내 작품 자체에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은 아주 소수였다. 내가 아무리 “사람의 벗은 몸이 얼마나 아름다운데요...” 라거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대로가 아름답죠” 라고 해봐야 그건 그거고 그런 그림은 미성년자 관람 불가가 아니냐는 눈치다. 졸지에 난 나체 모델을 매주 세시간씩 보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엉큼한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만 것이다.

사실 ‘누드’ 꽃을 그리면서 암술과 수술을 그린다고 야한 그림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니 보기 나름이다. 화가 ’죠지아 오키프‘의 꽃 그림을 보고 선정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야한 생각을 하면서 보면 꽃 그림도 야하다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내게 야한 그림을 그린다고 “고씨 집안에 화가는 없는데 하필이면 왜 같은 클래스인 ‘인체데생 및 초상화‘란 강의만 삼 년이 넘게 계속 듣느냐고. 엉큼하게 누드 모델이 나오니까 이 클래스를 듣는 것이 아니야...” 라고 묻는 친구에게 대답했다. “왜 우리 집안에 화가가 없어. 고씨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를 많이 배출한 것으로 유명해.” “누구?” “고 호, 고 갱, 고 야, 고 우영, 고 바우...”

최근 본국에선 연예인들이 누드집을 내놓으면서 누드가 예술이다 아니다 라는 뜨거운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니 이곳 한인들 중에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 이해된다. 뭐 한인들 뿐이겠는가. 누드에 대한 관심은 미 대륙도 마찬가지. 캐나다의 어느 마을 하이웨이는 차가 너무 빨리 달려서 “근처에 누드촌 있음” 이란 안내판을 내걸었다. 그 뒤 창문을 열고 기웃거리는 운전자들이 많아지고 차들의 속도는 훨씬 줄어들었다. 어느 용감한 변호사가 결국 이 마을을 상대로 (거짓 광고를 해서 운전자들을 속였다고) 고소를 했는데 재판결과 사슴을 비롯한 ‘동물들이 누드로 다니는 (동물) 누드촌’ 이라고 설명한 마을이 이겨 아직도 간판이 붙어있다는 소식.  

사람의 왼쪽 두뇌는 분석하고 논리적으로 따지는 일을 하고 오른쪽 두뇌는 직관하는 일과 종합하는 일을 한다고 한다. 내 그림을 평가하는 아내는 난 왼쪽두뇌만 너무 발달이 되어 그림을 잘 못 그린단다. 내가 사람을 그리면 자꾸 머리를 자르거나 발이나 무릎을 자르기 때문이다. “옷 벗은 사람의 머리를 자르다니 참 엽기적이다 쯧쯧...” 하는 말을 들으면서도 어찌된 영문인지 그림이 자꾸 종이 밖으로 나온다. 주어진 지면에 집어넣으려고 작게 그리기 시작해도 고치다 보면 항상 비례를 맞추기 위해 머리를 자르거나 어떨 땐 목을 자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머리에서 시작하면 무릎을 자르게 되고... 전체를 못 보고 부분에만 치중하는 나의 왼쪽 두뇌의 기형적 발달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럼 가운데서 시작을 해보라는 말을 듣고 시도를 해봤는데 머리와 다리 둘 다 자르고 말았다. 고씨 내력이라는 어느 분의 한마디. “고 재봉이도 고씨였지.”  

사람을 그리려 말고 사람을 뺀 주위를 그려. 분석하지 말고 그냥 그려... 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조금씩 그려졌다. 사람은 이렇게 생겼지... 라고 왼쪽 뇌에 박힌 고정관념을 깨어나가는 것이다. 정말 몰두하다보면 보이는 것은 그림자밖에 없다. 분석하고 논리적으로 따질 시간이 없으니 세시간을 그리고 나서도 머리가 가쁜 하여 푹 쉰 기분이다. 왼쪽 머리가 오랜만에 휴식을 가졌으니 말이다. “어여쁜 누드 모델을 보면 성적인 충동을 느끼지 않느냐” 고 물어오는 사람이 종종 있다. 성적인 충동은 훔쳐볼 때 생긴다고 한다. 아무도 몰래 훔쳐볼 때 탐닉하고자 하는 충동이 생기고 음란한 상상으로 휘말리게 된다는 것이다. 상상할 시간도 필요하고 침침한 분위기도 필요하단 말이다. 당당하게 선 모델들의 모습이나 앉은 모습에서는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진 아름다움만 볼뿐이다. 그림자에 담긴 사람의 벗은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잠깐! 정치가는 빼고 말이다.

(미주 중앙일보 2003년 10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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