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1억이 넘는다는데

2009.04.18 01:24

고대진 조회 수:929 추천:201

 

그녀의 피 순결하던 열 몇 살 때 있었다/ 한 이불 속에서 사랑을 속삭이던 때 있었다/ 연(蓮) 잎새 같은 발바닥에 간지럼 먹이며/ 철없이 놀던 때 있었다// 그녀 발바닥을 핥고 싶어 먼저 간지럼 먹이면/ 간지럼 타는 나무처럼 깔깔거려/ 끝내 발바닥은 핥지 못하고 간지럼만 타던/ 그때 있었다./ 이제 그 짓도 그만두자하여 그만두고// 나이 쉰 셋/ 정정한 자작나무, 백혈병을 몸에 부리고/ 여의도 성모병원 1205호실/ 1번 침대에 누워/ 그녀는 깊이 잠들었다// 혈소판이 깨지고 면역체계가 무너져 몇 개월 째/ 마스크를 쓴 채, 남의 피로 연명하며 살아간다// 나는 어느 날 밤/ 그녀의 발이 침상 밖으로 흘러나온 것을 보았다/ 그때처럼 놀라 간지럼을 먹였던 것인데/ 발바닥은 움쩍도 않는다.// 발아 발아 까치마늘 같던 발아!/ 蓮잎새 맑은 이슬에 씻긴 발아/ 지금은 진흙밭 삭은 잎새 다 된 발아!/ 말굽쇠 같은 발, 무쇠솥 같은 발아// 잠든 네 발바닥을 핥으며 이 밤은/ 캄캄한 뻘밭을 내가 헤매며 운다.// 그 蓮잎새 속에서 숨은 민달팽이처럼/ 너의 피를 먹고 자란 詩人, 더는 늙어서/ 피 한 방울 줄 수도 없는 빈 껍데기 언어로/ 부질없는 詩를 쓰는 구나// 오, 하느님/ 이 덧없는 말의 교예/ 짐승의 피!/ 거두어 가소서.  <연엽(蓮葉)에게: 송수권>

유장한 남도의 가락으로 맑고 푸른 우리의 정서를 노래한 송수권 시인이 최근 어느 편지에 함께 보낸 시이다. 이 시는 이미 오마이뉴스와 중앙일보에 보도된 바 같이 평생 시인을 내조하여 오다가 백혈병의 투병생활에 들어간 부인을 향한 시인의 절규이다.


“연잎새 같은 이 시인의 아내는 똥장군을 져서 저를 시인 만들고 교수를 만들어낸 여인입니다. 수박구덩이에 똥장군을 지고 날라서 저는 수박밭을 지키고 아내는 여름 해수욕장이 있는 30리 길을 걸어서 그 수박을 이고 날라 그 수박 팔아 시인을 만들었습니다. 그런가 했더니 보험회사 28년을 빌붙어 하늘에 별 따기 보다 어렵다는 교수까지 만들어 냈습니다. 박사학위는커녕 석사학위도 없이 전문학교 (서라벌 예술대학 문창과)만 나온 저를 오로지 詩만 쓰게 하여 교수 만들고 자기는 쓰러졌습니다…” 라고 그의 아내에게 AB형 피를 헌혈한 18명의 의경에게 감사를 드리는 편지에 적는다.


“그러나 저는 압니다. 몹쓸 '짐승의 피'를 타고난 저는 저의 아내가 어떻게 살아온 것인지를 너무나 잘 압니다. (경찰) 청장님께 말씀드리지만 저의 아내가 죽으면 저는 다시는 시를 쓰지 않겠습니다. 시란 피 한방울보다 값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AB형! 그 의경들이 달려와서 주고 간 피! 그것이 언어로 하는 말장난보다 '진실'이라는 것-그 진실이란 언어 이상이라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강의가 끝나고 내일 다시 서울로 올라가기 전에 저의 집필실 마당; 감나무에 올라가 가을볕에 물든 단감을 따고 있습니다. 햇과일이 나오면 그렇게도 아내가 좋아했던 단감입니다. 아내와 함께 다음에 집을 한 채 사면 감나무부터 심자했는데, 이렇게 비록 남의 집 감나무이긴 하지만 감이 익었기 때문입니다. 이 단감처럼 붉은 피가 아내의 혈소판에서 생성되어 AB형 피를 앞으로는 빌어먹지 말았으면 싶습니다. 골수이식까지는 아직도 피가 필요한데 하느님도 정말 무심하십니다. 이 짐승스러운 시인의 피를 저당잡고 죽게 할 일이지, 왜 하필 아내입니까? 저에겐 죄가 많지만 순결한 아내의 피가 왜 필요하답니까?...” 라고 하면서 피도 돈도 되지 않는 직업으로 살아온 것을 한탄하며 시인은 아내가 죽으면 절필을 하겠다고 선언한다.  


“첫 월급을 받아놓고 <.......시 쓰면 돈이 나와요, 밥이 나와요, 라고 평생 타박했더니 시도 밥 먹여 줄 때가 있군요!>라고 울었습니다. 특별전형을 거쳐 발령통지서를 받고 <여보! 학위 없는 시인으로 국립 대학교 교수가 된 사람은 저밖에 없다는군요. 해방 후 시 써서 국립대학교 교수가 된 1호 시인이라고 남들이 그러는군요!>라고 감격해 하더니, <그게, 어찌 나의 공이예요, 당신 노력 때문이지.......총장님께 인사나 잘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자기는 이렇게 할 일 다 했다는 듯이 쓰러졌습니다. 친구나 친척들에게서 '골수 이식'을 받아야 한다고 말해도 <.......2년 후면 송시인도 정년퇴직인데, 송시인 거러지 되는 꼴 어떻게 봐요, 그게 1억이 넘는다는데.......>라고 생떼를 씁니다….”  


거친 세파를 이겨내며 영롱한 시의 세계를 일궈간 시인들 뒤에는 이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사연의 시인의 아내가 있다는 것을 안다. 아내가 죽는다면 다시는 부질없는 시를 쓰지 않을 것이며 그때도 시를 쓰면 도끼로 손가락을 찍어버릴 것이라는 시인.  그의 간호를 받으며 병과 싸우는 시인의 아내. 이들이 부디 백혈병을 이겨내어 피같이  귀한 진실을 담은 아름다운 시가 다시 나올 수 있길 두 손 모아 빈다.


<위 인용은 송수권 시인이 그 아내가 교통의경들에게 수혈을 받아 고마운 마음으로 경찰청 홈에 올린 글의 일부입니다. 미주 문협의 웹사이트 (www.mijumunhak.com) 의 <자유 게시판>에 ‘눈이 맑아지는 글’이란 제목으로 된 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


<미주중앙일보 11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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