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띄운 편지

2004.09.25 03:48

우연 조회 수:215 추천:17

    가을에 띄운 편지 K형! 문득 바라 본 하늘, 구름 한점도 없이 너무 파래서 꼭 잡으면 푸른 물이 금방 뚝뚝 떨어질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처음보는 하늘인 것 같이 넋을 놓고 파란 하늘, 하얀 햇살을 바라보니 어지러히 펼쳐졌던 지난 여름의 아릿한 가슴이 푸른 물에 담긴 것처럼 편안해집니다. 참 오랫만에 나와 보는 뒷뜰, 그 동안 내가 나오지않아도 저희 들끼리 얼켜서 피고지고, 열매도 제법 알이 굵어지고, 나무들 의 몸통도 우람해졌고, 키도 훌쩍 커버렸습니다. 베란다의 의자에 앉으려다 주인처럼 눅눅한 의자에 예의 그 못된 성깔이 또 쉬지를 못하고 후드득 커버를 벗겨 빱니다. 뽀드득 뽀드득 하얗게 빨아 널으니 빨래가 흰 깃폭을 달고 흘러가는 하늘바다. 묵직한 허리를 빛무리에 담그고 누으니 전신을 간지르며 미끄 럼을 타는 빛살들, 감은 눈 속으로 서서히 열리는 백색공간에 피어난 얼굴, 놀랍게도 바로 형의 얼굴입니다. 유난히 힘들었던 이번 여름, 형과 내 가슴 속엔 참 많은 말들 이 흩어져 있었나봐요. 들려 온 힘든 이야기들을 그냥 넌즈시 가슴에만 묻어두고 생략해도 하나도 서운하지 않은 건 어차피 같은 생각일 거란 느낌때문일 겁니다. 나른히 내려 쪼이는 햇살, 간간히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사각 이는 나뭇잎들의 소리, 반갑게도 어디에선가 나를 보고 잠시 빨랫줄에 앉아 지켜보다 날아간 빨간 잠자리 한마리..,그 외엔 아무 것도 없는 멈춤. 문득 이 평화의 순간이 바로 천국 일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천국은 결코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바로 가까이 몇 분 안되는 이 시간 안에 있었던 가 봅니다. K형! 전 사실 늘 천국은 저 멀리 하늘 끝에 있다고, 언젠가 가는 그 시간 안에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래서 현실의 아픔, 슬픔, 모든 단절들이 주는 고통들을 인내하고 기다려야한다는 것이 참 힘들었었는데.... 이렇게 순간 순간마다, 지금 바로 여기에서 천국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 동안 참 어린 투정을 부렸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시인인가 만약 우주가 작은 모래알이라면 그 안의 지구 는 얼마나 작은 모래알인가?, 그 지구 안의 우리는 또 얼마나 작은 알맹인가?, 우리의 아픔이란 얼마나 작은 것인가? 라고, 모래 알 속의 작은 늪은 비悲가 내려 씻겨주어야만 맑아지는 거라구요. 한참 가슴을 맴도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요. 우리 모두는 한정된 시간 안에서, 지은만큼의 복락을 누리며 사는데, 때론 이 거저 주어진 시간들을 거슬러 가려하 거나 오래 잡고있으려 하는 마음 때문에 힘들었을 거라고... 우리의 의지나 기대와는 달리 우리 곁을 떠나 가는 인연들을 쉬이 놓지 못하고 서글퍼했던 여린 마음을 달래봅니다. K형! 이 여름 행복이란 무엇일까?, 곰곰 다시 생각해보니 또 결국 나는 무엇인가? 하는 그 자리로 다시 돌아와 앉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혼자 왔듯이 또 그렇게 혼자 가야되는 외로운 존재겠지만,나만이 아니라 너를 생각하면 조금씩 조금씩 온기 가 입혀지기도 합니다. 밤 하늘의 별 하나를 보다 거기에서 보이는 그리운 얼굴, 작은 보랏빛 들꽃이 가만히 내보이는 아주 작은 소망..,이런 것들이 살아갈 수록 더 소중하게 보입니다. 어쩜 우리가 지나간 것, 이미 떠나간 것을 껴안고 놓치않으려고 산사람의 시간과 물질 을 더 많이 소모했던 건 아닐는지요? 이젠 살아 있는 것, 산사람을 위해 더 많이 나누며 살아야겠다 는 다짐을 하며 참으로 어리석었던 시간들을 반추해봅니다. 형! 그냥 이 가을이 더 깊어지기 전에 이 말을 하고싶었습니다. 평안히 지내시지 못하는 걸 아는데 평안히라는 말은 차마 하고 싶지 않아 그냥 "그럼.."이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 하고 싶네요. 시간이 되시는 대로, 아니 시간을 내어서라도 꼭 이 가을이 가 기 전에 노란 은행잎이 뒹구는 거리를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한번 걸어보셔요...상념들은 밟아버리구요.그냥 살아서 가을을 걸어 보는 것 자체만 생각하면서요. 이러다보니, 어쩜 그 길을 함께 걷자고 형에게 전화 한통 걸게 될는지도 모르겠네요. 그저 잠시 일상을 밀어놓고 단지 몇 날쯤은 이유 없는 발걸음 으로 가을을 걸어보려고 전화할지도 모릅니다. 갑자기 그렇게 해보고 싶다는 바램 하나가 가슴을 울렁입니다. 형! 그렇지요? 형이나 나나 그냥 가을 몇 날을 누릴 만큼은 열심히 살지않았나요? 아--,바로 이 거였네요..제 가슴에 걸려 있던 가시,"그럼!, 우리 그렇게 열심히 살았지!."이 이야기를 형에게서 듣고 싶을만큼 지쳐있었던 가봅니다. 더 추워지기 전에 가을의 위로가 필요했던 게지요. 후.후.후.. 형! 결국 산다는 건 이렇게 이기적인 거네요.. K형! 답신은 안주어도 되어요. 지금 고개를 끄떡여준다고 믿으니. 대신 노란 은행잎이나 하나 보내줘요. 그 덕수궁 돌담길에 흐드러졌던 그 가을이 엄청 그리워요. 어느 날 우체통 앞의 흩날리는 낙엽 하나에서 기氣찬 형의 가을을 나도 만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2004 가을 샌프란시스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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