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김 혜순

2003.01.29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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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詩는 내 胎안의 모성을 깨우고 출산하는 행위"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44) 시인 김혜순


여기 한 여자가 있다. 우리 엄마가 낳은 여자다. 이 세상에 머문 지 일만칠천일이 넘은 어느날 그 여자는 질문을 받았다. ‘왜 문학을 하느냐’고. 그 질문은 그 여자에게 ‘왜 시(詩)를 하느냐’는 질문으로 바뀌어 들렸다.

왜냐하면 서사 장르에 대항해, 서정 장르를 '하는' 운명을 타고 난 여자가 자신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그 여자는 시는 쓰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몸이 ‘시 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곧 그 여자는 자신이 출산해야 할, 어쩌면 평생이라는 기간을 다 써도 모자랄 긴 잉태 기간을 함께 감내하고 있는 자신의 태(胎) 안의 여자를 떠올렸다.

여기 또, 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 엄마는 먼 세월 저편에서 나를 낳았지만 그녀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 엄마는 나를 낳았지만 나는 아직 그녀를 낳지 못했다. 그녀가 사는 곳이 이토록 어둡고, 이토록 숨막히고, 그녀가 이토록 밝은 곳으로 나가고 싶어하는 걸 보니 그녀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녀가 아직 태어나지 못했으므로, 나 또한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고래 뱃속에 갇힌 요나처럼 그녀는 아직 태어나지도 못한 채, 컴컴한 뱃속에서 이제 아이까지 낳고, 그 아이를 기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고래처럼 육중한 내 몸 속에 갇힌 그녀가 울부짖는 소리, 헐떡거리는 소리, 그녀의 아이가 우는 소리 다 들린다. 그런 소리 들리는 날이면 나는 아마도 내 몸으로 ‘시 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녀와 뜨겁게 내통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내 몸 속의 바다처럼 ‘이렇게 있다’. 그녀의 골수는 내 등뼈 속에, 그녀의 뇌는 내 머리 속에, 그녀의 피는 내 핏줄 속에, 그녀의 팔은 내 어깨 속에 있고, 그녀는 내 몸 속에서 내가 글을 쓰는 이 시간을 느낀다. 그녀가 느끼는 것을 내가 또 느낀다.

그러나 아직 내가 그녀를 낳아주지 못했으므로 그녀는 내 안에서 파도친다. 나의 체액과 냄새나는 분비물들로 파도친다. 해변으로 몰려왔다가, 다시 심해로 돌아가기를 반복한다. 거기서 달이 뜨고, 달이 진다. 나는 파도를 낳고 싶다. 나는 ‘속의 바다’를 출산하고 싶다.

나는 내 속의 그녀의 얼굴을 밝은 빛 아래서 대면한 적은 없지만 세세년년토록 씌어지고 씌어진 수많은 서사 텍스트들 속에서 그녀의 얼굴을 읽어낸다. 그녀의 감옥을 본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를 남들이 육안으로 볼 수 있게 온전히 표현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녀는 나만이 느끼고, 듣고, 부를 수 있으니 어찌하랴. 나는 그녀로부터의 도피처도 없다. 그러나 그녀가 내 꿈속의 주인이니 어찌하랴.

이를테면 이런 여자가 있었다. ‘서치라이트처럼 비치는 햇빛에 쫓겨다니다 그 햇빛에 강간 당해 날개가 다 타버린 여자/ 아기를 가졌다고 아버지에게 잡아 뜯겨 한정없이 입술이 풀어진 여자/ 물새같이 가련한 여자/ 감옥에 갇혀 알을 낳은 여자/ 낳은 알을 아버지에게 빼앗기고 돼지우리에 그 알이 던져진 걸 봐야만 하는 여자’(‘유화부인’에서).

이 여자가 누구인가. 해모수에게 겁탈당하고, 아버지 하백에게서 쫓겨났으며, 감옥에 갇혀 주몽을 낳은 유화부인이다. 나는 나의 그녀를 보듯 유화부인을 본다. 말씀에 짓눌린 그녀를 본다. 나는 그녀를 구해주는 상상을 한다. 그 여자를 품에 안는 상상을 한다. 서사 텍스트 속에 사로잡혀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서정시 그 자체인 그녀를 나의 노래로 살려내는, ‘시 하는’ 상상을 한다.

내시경을 받느라 몸 속에 불을 켤 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몸 속은 정말 어둡구나. 한 점의 빛도 들어올 수가 없구나. 이 깜깜한, 구멍 뚫린 항아리, 날이면 날마다 먹을 것을 공양해도 ‘가득 찼다’고 말해주지 않는 콩쥐의 물 항아리 같은 몸을 늘 끌고 다니는구나. 내 속의 그녀는 빛이 무서워 벌벌 떨고 있구나. 그녀는 ‘텅 빔’과 ‘깜깜함’으로 나와 함께 있구나.

나는 그녀를 보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처럼 그녀를 찾아다닌다. 나는 벼랑에 붙은 가랑잎을 주워 그 이파리를 뒤집어 본다. 이파리의 속에서 이파리의 표면을 가득 움켜쥔 잎맥의 모습에서 그녀를 본다. 그녀는 잎맥처럼 나를 움켜쥐고 있다.

나는 포르말린에 담겨진, 평생 독을 마신 간 한 닢을 뒤덮은 검은 핏줄기 속에서 그녀를 본다. 저 언덕 위 나뭇가지 위에서 먹이를 발견하고 마악 날개를 펼치기 시작한 독수리에게서 그녀를 본다. 날개를 편 독수리는 멀리서 보니 검은 나뭇잎 한 닢처럼 보인다. 그것이 나를 낚아채려 한다.

빈틈없이 두 몸을 밀착시키고, 스무개의 손가락을 스무개의 갈고리처럼 얽은 연인의 자태에서 나는 그녀와 나를 본다. 그 손가락들은 칼로 내리치기 전엔 떨어지지 않으리. 나는 바다에서 쫓겨나 몸 밖을 뛰쳐나오려는 듯 바짝 말라버린 살을 움켜쥔, 완강하고 미세한 생선의 뼈와 가시들 속에서 그녀의 손가락들을 본다(시, ‘detective poem’에서 몇 줄 인용). 나는 ‘속의 그녀’를 볼 수 없어 내 밖에서 그녀를 찾아다닌다. 돋보기를 든 추리소설의 탐정처럼 그녀와 나의 얽힌 구조를 읽어내려 한다.



한 여자가 수술대에 누워 있다. 때로는 그녀의 등이, 때로는 그녀의 얼굴이 외과의의 매스에 의해 지퍼처럼 주욱 열리고 있다. 그녀는 피를 줄줄 흘리면서 큰 소리로 아르토를 읽고 있다. 수술이 끝나자 그녀의 얼굴 양쪽엔 징그러운 뿔이 달려 있다.

나는 오를랑의 수술 퍼포먼스를 텅 빈 미술관에서 혼자 보다 말고, 무릎이 탁 꺾이는 경험을 한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송했다. 그러나 그녀는 찬양의 말이 싫었다. 그녀는 밥 먹고 잠자고 화장하고, 그렇고 그런 일에 바치는 시간을 뺀 일생, 50페이지 짜리 시로 남을 수 있을지 말지 한 일생을 남의 기준에 맞춰 사는 것이 참을 수가 없었다.

문화적 상징들이 새겨지고 연출되는 무대가 된 여자의 몸, 의미 부여를 통해 박제가 되어버린 여자의 몸, 그녀는 의미가 가득 새겨진 몸이 되기를 거부했다. 그녀는 자신의 껍질이 실망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그녀는 끊임없이 그 껍질, 가면을 수술과 분장 퍼포먼스로 바꾼다. 나는 그녀의 수술 퍼포먼스와 작업 사진들을 보면서 오를랑이 오를랑 속에서 오를랑을 꺼내기를 바랬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내 몸으로 시를 쓴다는 것은, ‘시 한다’는 것은 내가 내 안에서 내 몸인 그녀를 찾아 헤매고, 꺼내놓으려는 지난한 출산 행위와 다름이 없다. 나에겐 신화시대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이야기와 시들을 통해 의미를 주던 아버지들로부터 도망쳐 너를 사랑하면 할수록 더욱 더 내 몸 속에서 나오고 싶어 안달인 그녀가 있다.

사랑의 욕망으로 꿈틀거리는 그녀와 내 몸이 쌍둥이처럼 맞붙어 다시 태어나려는 몸짓, 그 자가 출산이 ‘몸 하는’ 시다. 그리하여 ‘시’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 이 껍질인, 이 외부적으로 관계를 맺는 자아인, 시적 화자인 내가 아니라 내 속의 그녀가 나로 하여금 그녀를 낳도록 독려하는 것이다. 내가 아기를 낳는 것이 아니라 아기가 스스로 산도를 따라 내려오고, 내 몸이 반응하여 열리는 것이리라.

나의 엄마는 먼 세월 저편에서 나를 낳았다. 어머니를 담뿍 받아들여 나는 의미의 때가 하나도 붙지 않은 생명이 되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자신의 몸을 주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내 몸 안에 없다. 그녀는 ‘없음’으로 내 안에 존재한다. 태어나지 않은 아기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어머니는 나에게 전부 있지만, 그러나 몸 속에 불을 켜고 살펴보면 거기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 그녀는 없다. 나에겐 시적 대상도 없다.

나는 ‘시 함’으로 내 속에 들어찬 그녀, ‘텅 빈 신성함’을 낳으려 한다. 어쩌면 내가 낳으려는 ‘깜깜한 신성함’인 그녀는 폴리뇨의 성 안젤라가 환영 속에서 본 ‘텅 빔’ ‘하나의 심연’ ‘이름 붙일 수 없는 것’, 빙엔의 힐데가르트가 본 ‘정오의 하늘 한가운데 나타난 가슴속의 수레바퀴’ ‘달걀 모양의 영상’ 같은 것과 통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삼국유사의 노힐부득은 밤중에 아이 낳은 여자를 목욕시키고 나서 그 붉은 물이 황금으로 변하는 것을 본다. 그리고 곧 도망가버린 달달박박이 보지 못한 관음보살의 현신을 그녀에게서 발견한다. 원효는 갈증난 그에게 월경대를 빨던 물 한 바가지를 건방지게 건네주던 여자에게서 관음보살의 현현을 본다.

아아, 나는 언제 내 속의 그녀를 출산하게 될까. 그리고 내가 낳은 신령스러우나 텅 빈, 깜깜하고 ‘더러운’ 어머니를 목욕시키는 영광을 갖게 될까. 그리고 과연 언제 그 분이 관음이란 걸 스스로 알아보게 될까.

아마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내가 내 속의 어머니를 낳으려고, 그녀인 나를 낳으려고, 나는 문학을 하는가 보다.


김혜순 연보

▦1955년 경북 울진 출생
▦1977년 건국대 국문과 졸업
▦197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 ‘시와 회화의 미학적 교류’ 입선
▦1979년 계간 ‘문학과지성’에 시 ‘담배를 피우는 시체’ 등 5편 발표 등단
▦1988년~현재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
▦시집 ‘또 다른 별에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어느 별의 지옥’ ‘우리들의 陰畵(음화)’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불쌍한 사랑기계’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시론집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등
▦김수영문학상(1997) 소월시문학상(2000) 현대시작품상(2000)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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