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곳에 내린다는 함박눈을 생각하며...

2008.12.14 02:00

강학희 조회 수:548 추천:44












 

* * 落花 - 오세영

- 에즈라 파운드에게

처연하게
꽃이 진다고 하지만
꽃이 진다는 것은
항상 슬픈 일만은 아니다.
돌아갈 곳이 확실하게 있는 귀로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제 더 이상
기다림에 속지 않으리라.
이제 더 이상
그리움에 울지 않으리라.
비에 젖어
나른하게 흩날리는 꽃잎같이
뿔뿔이 흩어져 귀가를 서두르는
지하철 역 광장
그 황혼.



 




 

 

* 한 세상 - 오세영


길로 가는 길은 끝났다.
이제는 산에게 물어보랴.
말로 가는 길은 끝났다.
이제는 바람에게 물어보랴.
길 끝나 산이 있고 말 끝나
허공 있는데
19문 반 해어진 신발을 끌고
너를 찾아 한세상
걸어서 왔다.
어디로 가랴.
산방의 하룻밤은 풍설이 찬데
이제는 신발 없이 떠나야 할
길,
말도 길도 없이 나서야 할
맨발의 길.






 

 

 * 꽃불 - 오세영


추락보다는
차라리 파멸을 선택했다.
비상의 절정에서 터지는
꽃불.
지상은 축제로 무르익고
축등은 화려하게 걸려 있는데
그 늘어선 전깃줄 너머
무한으로 사라지는 빛 한 줄기,
소멸은 죽음과 다르다.

해후의 눈물로 글썽이는
이 지상의 축제여,
자유란 회귀를 거부하는 몸짓이다.
부딪치는 술잔 위에서 빛나는
한 줄기 저 찬란한
소멸.



 


 


* 나무처럼 - 오세영


나무가 나무'끼리 어울려 살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가지와 가지가 손목을 잡고
긴 추위를 견디어 내듯

나무가 맑은 하늘을 우러러 살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잎과 잎들이 가슴을 열고
고운 햇살을 받아 안듯

나무가 비바람 속에 크듯
우리도 그렇게
클 일이다.
대지에 깊숙이 내린 뿌리로
사나운 태풍 앞에 당당히 서듯

나무가 스스로 철을 분별할 줄을 알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꽃과 잎이 피고 질 때를
그 스스로 물러설 때를 알듯

 

 


* 五月 - 오세영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부신 초록으로 두 눈 머는데
진한 향기로 숨막히는데
마약처럼 황홀하게 타오르는
육신을 붙들고
나는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아아, 살아 있는 것도 죄스러운
푸르디푸른 이 봄날,
그리움에 지친 장미는 끝내
가시를 품었습니다.
먼 하늘가에 서서 당신은
자꾸만 손짓을 하고

 

 






 

* 원시(遠視) - 오세영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
무지개나 별이나 벼랑에 피는 꽃이나
멀리 있는 것은
손에 닿을 수 없는 까닭에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아
이별을 서러워하지 마라
내 나이의 이별이란
헤어지는 일이 아니라 단지
멀어지는 일일뿐이다
네가 보낸 마지막 편지를 읽기 위해선
이제
돋보기가 필요한 나이,
늙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보낸다는 것이다
머얼리서 바라볼 줄을
안다는 것이다



 




 

* 그 길을 따라 - 오세영


당신은 참 무심도 하군요.
떠나가신 후
어찌 그리 한 통의 편지조차 없으십니까,
당신을 찾아 한번은 무작정
동쪽으로 나섰습니다.
어느 봄날,
당신의 눈동자 같은 샛별이
반짝반짝 새벽하늘을 비추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도가도 희미한 광망뿐
당신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한번은 무작정
서쪽으로 나섰습니다.
어느 여름날,
당신의 분홍 손톱 같은 반달이
서으로 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도가도 망망한 바다뿐
당신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한번은 무작정
남쪽으로 나섰습니다.
어느 가을날,
당신의 하얀 소매깃으로 나래치는 철새떼가
황혼에
남쪽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도가도 쓸쓸한 사막뿐
당신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한번은 무작정
북으로 나섰습니다.
어느 겨울날,
당신의 고운 입술 같은 꽃잎들이
바람에 날려
북으로 북으로 실려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도가도 삭막한 쓴드라뿐
당신은 거기에도 없었습니다.
당신은 참 무심도 하군요,
당신이 계신 곳을
별로도, 꽃으로도 가르쳐주실 수 없다면 차라리
눈물로 가르쳐주세요.
내 눈물이 여울되어 흘러간다면
한없이 한없이
그 길을 따라 걷겠습니다.



 




 

 

* 죽음의 노래 - 오세영


죽은 자라 하지만
너희가 공기로 살듯
나는 흙으로 사는 사람,
아, 이제 바람따라 헤매지 않고
비로소 안식을 얻었나니
흙은 항상 영원하기 때문이니라.
마파람, 샛바람, 돌개바람, 소소리
변하는 바람의 세상은
덧없고
그 덧없음을 숨기려
바람은 변치 않는 하나의 이름을 새기지만
이름이란 날리는 갈잎 같은 것,
갈잎에 흙에 내려 썩듯
이름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바라보는
세상은
확실하구나.
하늘은 흙 속에도 있으니
너희는 닿을 수 없는 허공의 별들을 우러르지만
나는 영롱한 보석들과 함께 산다.



 




 

 * 사랑의 묘약 - 오세영


비누는
스스로 풀어질 줄 안다.
자신을 허물어야 결국 남도
허물어짐을 아는 까닭에

오래될수록 굳는
옷의 때,
세탁이든 세수든
굳어버린 이념은
유액질의 부드러운 애무로써만
풀어진다.

섬세한 감정의 올을 하나씩 붙들고
전신으로 애무하는 비누,
그 사랑의 묘약.

비누는 결코
자신을 고집하지 않는 까닭에
이념보다 큰 사랑을 안는다



 




 

* 기다림 - 오세영


화로에 불을 지핀다
빈방 섣달 하순 어두운 밤,
기다려도 그대는 오지를 않고
뒷문 밖에는 눈 오는 소리
뒷문 밖에는 갈잎소리
눈이 되어 오랴
바람 되어 오랴
얼어붙은 이승의 차가운 육신
귀멀고 눈멀어서 밤은 길다
빈방 섣달 하순 어두운 밤
그대의 찬손 녹여주려고
빈 가슴에 지피는 외로운





 




 

 

* 그리운 이 그리워 - 오세영


그리운 이 그리워
마음 둘 곳 없는 봄날엔
홀로 어디론가 떠나 버리자.
사람들은
행선지가 확실한 티겟을 들고
부지런히 역구를 빠져 나가고
또 들어오고
이별과 만남의 격정으로
눈물짓는데
방금 도착한 저 열차는
먼 남쪽 푸른 바닷가에서 온
완행,
실어 온 동백꽃잎들을
축제처럼 역두에 뿌리고 떠난다.
나도 과거로 가는 차표를 끊고
저 열차를 타면
어제의 어제를 달려서
잃어버린 사랑을 만날 수 있을까.
그리운 이 그리워
문득 타 보는 완행열차
그 차창에 어리는 봄날의
우수



 




 

 

* 편지 - 오세영


나무가
꽃눈을 피운다는 것은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찬란한 봄날 그 뒤안길에서
홀로 서 있던 수국
그러나 시방 수국은 시나브로
지고있다

찢어진 편지지처럼
바람에 날리는 꽃잎
꽃이 진다는 것은
기다림에 지친 나무가 마지막
연서를 띄운다는 것이다

이 꽃잎 우표대신, 봉투에 부쳐 보내면
배달될 수 있을까
그리운이여,
봄이 저무는 꽃그늘 아래서
오늘은 이제 나도 너에게
마지막 편지를 쓴다








 

 * 막다른 곳에서 - 오세영


그렇게 그냥 서 있었다.
한 곳에
기다림의 막다른 곳에
걸어서 걸어서
이제 서 있어도 걷는 것이 된
그것을 나무라 할까.
그것을 꽃이라 할까.
산마루가 멍청히 서 있는 측백 혹은 소철 한 그루
걷다가 걷다가 지쳐
짓누르는 어깨의 세상 짐들을 부리고
너의 이름을 부리고
너를 부리고
마침내 막다른 그곳에 와서
나무는
세상에 늘어뜰린 제 그림자를 걷으려
스스로 꽃과 잎을 벗어버린 채
홀로 하늘로 진다.
산이 된다.



 




 

 

* 봄 - 오세영


봄은
성숙해 가는 소녀의 눈빛
속으로 온다.

흩날리는 목련꽃 그늘 아래서
봄은
피곤에 지친 청춘이
낮잠을 든 사이에 온다.

눈 뜬 저 우수의 이마와
그 아래 부서지는 푸른 해안선

봄은
봄이라고 발음하는 사람의
가장 낮은 목소리로 온다








 

* 문 밖에서 - 오세영


당신은
어디에 숨어 계십니까,
당신이 계신 곳을 찾으려고
나는
꽃의 문 앞에서 서성거렸습니다.
당신은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ㅡ꽃의 문을 열자 향기가 있었습니다. 향기의 문을 열자 바람
이 있었습니다. 바람의 문을 열자 하늘이 있었습니다.하늘의 문
을 열자 빛이 있었습니다. 빛의 문을 열자 무지개가 있었습니다.
무지개의 문을 열자 비가 내렸습니다.비의 문을 열자 나무가 있
었습니다. 나무의 문을 열자 다시 꽃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어디에 숨어 계십니까,
나는 항상 당신의
문 밖에 서 있습니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언제나 문 밖에
서 있습니다



 




 

 

* 지상의 양식 - 오세영


너희들의 비상은
추락을 위해 있는 것이다
새여
알에서 깨어나
막, 은빛 날개를 퍼덕일 때
너희는 하늘만이 진실이라 믿지만
하늘만이 자유라고 믿지만
자유가 얼마나 큰 절망인가를
비상을 해보지 않고는 모른다



 




 

 

* 겨우살이 - 오세영


하늘아래 生은 별보다 아름답다
凍土에 내리지 못한 뿌리는
남의 피를 빨아먹고
눈보라에 얼어붙은 육신은
남의 체온으로 덥히었나니
가혹하게 견디어낸 지옥의 한 철,
묻지 마,
어찌해서 부지한 목숨인가를,
믿는 것은 다만 네 앞에 서있다는
그 자체,
어두울수록 빛나는 生은
아름답다.
처연하게 아름답다



 




 

 

* 보석 - 오세영


화석 속엔 한 마리
새가 난다.
결코 지상으로 내려 오지 않는 새.

내가 흘린 눈물도
쥬라기 지층 어느 하늘 아래
하나의 보석으로 반짝거릴까
가령 죽음이라든가
죽음 앞에서 초롱초롱 빛나던 눈.

스스로 불에 타서 소멸을 선택하는
지상의 별들이여,
묻혀라 화석에
영원히 죽는 것은 이미
죽음이 아니다



 




 

 

 * 불 2 - 오세영


잊어버려, 잊어버려라고 그가
속삭인다
나는 누워서 눈을 감았다.

에테르로 풀리는 어둠을 붙들고
톱니, 저 관절에 긴 시간을 닦아낸다.
엔진에 타오르는 한 잔의 불,

끝끝내 벨 것인가,
떨어져나간 팔과 다리, 내 심장에서
우는 벌레, 영혼의 살 한 점,
결국 들춰낼 것인가,

나는 내려간다
회랑의 층계를 돌아
스물아홉의 육의 밑바닥에
선박들이 침몰하고,

전주에서 본 여자가 메스를 들고
차갑게 웃고있다.
염려없다면서, 염려없다면서
빼앗는 내 눈의 불

박제된 유년의 깊은 밑바닥에
알콜에 적신 내가 누워있다.







 

 

 * 오세영씨 시집 '아메리카 시편' 출간 - 문화일보


대다수의 사람은 미국으로 떠나며 자유와 풍요로움을 꿈꾼다. 그러나 미국
에서 그들이 보게 되는 것은 자유와 풍요로움뿐일까. 시인 오세영씨는 95년
10월부터 1년간 미국에 체류하며 살펴본 미국의 겉과 속을 시로 써서 시집
‘아메리카 시편’(문학동네·사진)을 펴냈다.
“아메리카는 거대한 하나의 디즈니랜드/감각의 믿음밖에 없는 그 실용주
의”(‘시뮬레이션’에서)라고 정의 내린 미국에서 그가 만난 것은 현대문
명을 만들어내는 자본주의의 화려함과 고독이었다. 다양한 듯하면서 획일적
이고, 풍요로운 듯하면서 애정결핍에 몸부림치는 현장에 시인의 눈길은 머
문다.
“언어가 무슨 소용이 있나요/몸으로 접촉하면 되죠/행복을 사시려면 전화
를 주세요/1-800-411-9111/아메리카는/밤에도 거대한 사냥터인가/이메일로
인터넷으로 전화로/티브이로 공략해오는 ‘행복’의 판매작전.”(‘러브 콜
’에서) “나는 지금/햄과 치즈와 토막난 토마토와 빵과 방부제와 일률적으
로 배합된/아메리카의 사료를 먹고 있다/재료를 넣고 뺄 수도/젓가락을 댈
수도/마음대로 선택할 수도 없이/맨손으로 한입 덥석 물어야 하는 저/음식
의 독재/자본의 길들이기.”(‘햄버거를 먹으며’에서) 랩송 힙합 샐러드
종이컵 콜라 마리화나 등 그가 미국에서 건져낸 자본의 표상은 다양하다.

그러나 ‘아메리카의 이미지’에서 시작된 그의 문명비판은 미국만을 표적
으로 삼은 것은 아니다. 투명한 시의 끝자락을 살짝 들추면 그것은 곧 우리
의 삶이자 현대의 모습이 되는 것이다.
“혼자 사는 것이 쓸쓸해/옛모습대로 간직한 아들의 사진첩을 들고 쓰다듬
으며/세월을 보내는 산드라 할머니… 저 옆 행길가 섹스숍에선 하나둘 네온
등이/반짝이기 시작하는데/혼자가는 길이 결국 외롭다면 그건 리얼리즘…”
(‘왜 시가 망했는지 알겠다’에서) 오씨는 시집의 서문에서 “산업사회인
아메리카이자 한국에서 얻은 것은 과학의 힘, 잃은 것은 삶의 여유”라며
“시인은 얻은 것보다 잃은 것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는 선언으로 시집
의 내용을 요약했다

 

 

* 오세영


1942년 전남 영광 출생.
서울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68년 현대문학에 등단.
한국시인협회상('83) 제4회 녹원문학상('84) 제1회 소월문학상('86)수상.
시집 <반란하는 빛>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불타는 물>등

이동업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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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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