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금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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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꽃배 나무

2007.01.23 00:45

윤금숙 조회 수:778 추천:104

직장의 주차장이 빌딩 앞쪽에서 뒤쪽으로 바뀌어졌다. 기존에서 조금이라도 바뀐다는 것은 일단 부담이 되는 일이기에 내게도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정문 입구에서 멀어져 전보다 일찍 집에서 떠나야 한다. 말이 그렇지 타임 카드를 꼬박꼬박 찍어야 하기 때문에 아침시간 일 이분은 금쪽 같은 시간인 것이다.

  얼마 동안은 불평으로 투덜대느라 주위를 둘러 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내 마음이 불편하니 앞만 보고 입구를 향해 가기에 급급했다. 두어 달이 지난 후에야 조금씩 주위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전에는 전혀 눈에 띄지 않았던 수 십 그루의 꽃배나무가 빌딩과 주차장 사이에 줄지어 서 있는 것이었다. 언제 부터 이곳에 꽃배나무가 있었던가 싶다.

  그동안 눈길 한번 주지 않았던 꽃배나무 가지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어느덧 하얀 꽃망울이 눈을 반짝이며 가지마다 촘촘히 매달려 있었다. 추위를 이겨내고 첫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의 순리대로 나무들도 때가 되면 묵묵히 자기 할일을 해내고 있는 것일 게다. 생명의 생동감이 가슴에 싸하게 와 닿았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 보았다. 아름다운 산이 병원 뒤로 병풍처럼 펼쳐저 있었다. 2년 여 동안 출근을 하면서 이런 아름다움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바쁘게 일에 얽매여 있었던 것이다.

  오솔길도 눈에 들어왔다. 그 길을 걸어보고 싶은 충동에 가슴이 벅찼다. 여기저기에서 봄이 오는 소리가 두런두런 들리는 것 같았다. 쉬는 시간에 밖에 나와 잠깐이라도 꽃배나무와 대화를 하고 싶어졌다.

날마다 답답한 책상 앞에서 일만 할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내 보기로 했다. 하루는 쉬는 시간을 틈타 따끗한 찻잔을 들고 꽃배나무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꽃내음, 풀향기가 어우러져 코끝을 싱그럽게 했다. 머리 속이 맑아지며 기분이 상쾌해졌다.

  꽃배나무 하얀 꽃이 눈부시게 피어있는 어느 화창한 날, 점심시간을 이용해 미리 준비해 온 김밥과 보리차를 가지고 호화로운 산책에 나섰다. 신선한 공기를 맘껏 들여 마시니 마음도 몸도 날아갈 것 같았다. 연초록의 파릇파릇한 풀잎들이 다투어 일어나는 듯 속삭이고, 여러 종류의 야생화들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사이를 벌새가 분주하게 날다가는 한 곳에 머물러 파르르 날개를 떨고 있기도  했다.

  이렇게 봄의 잔치가 열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나는 지루하고 탁한 사물실에 갇혀 8시간을 힘들게 지냈구나 하고 잠시 후회를 했다. 정오의 해가 싱싱한 나뭇잎 사이로 어슷어슷 비치는 그늘 아래 나무 벤치가 놓여 있었다. 오랫동안 방치된 거무튀튀한 벤치는 많은 추억을 안고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이 벤치는 한때 어느 외로운 이의 벗이 되었을 수도 있고 또 폐를 앓고 있던 젊고 아리따운 여인의 애인이 앉았던 자리였을 수도 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나는 잠시 낭만에 젖어보기도 했다.

  아름다운 산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이 병원은 전에는 페병환자들의 요양소였다고 한다. 어쩐지 뛰어난 주위환경이 여느 병원과 달랐다. 폐병은 특히 공기가 좋은 곳에서 요양을 해야하는 병이라 산이 좋은 이곳이 적격이었을 것이다. 상념에 젖어 있다보니 평생을 이 병원에서 일을 하다가 은퇴한 어느 간호사가 들려 준 이야기가 문득 생각났다.

  28세 된 남미계통의 아름다운 폐병환자가 있었다. 그녀는 세 아이와 남편을 둔 여자였다. 폐병 말기로 접어들어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혼자 있는 병실의 커튼은 언제나 닫혀 있었고 그녀는 담요를 얼굴까지 뒤집어쓰고 늘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병실은 음산했고 방문하는 사람도 없었다. 남편은 직장에 다니며 세 아이들 뒷바라지에 분주한 탓이었는지 어쩌다 방문을 했다가도 금세 병실을 떠나버리곤 했었다.  

  간호사들은 그 환자의 방을 피하고 싶어했다. 그 까다로운 성격에 모두가 진절머리를 내고 있었다. 자기의 병을 고칠 수 없다는 것이 마치 의사나 간호사들의 탓인양 불평 불만을 해댔기 때문이다. 간호사들은 희망이 없는 환자들에게서 나타나는 거부반응으로 알고 적당히 회피하곤 했다.

  어느 날 그녀의 병실에 들어간 간호사는 깜짝 놀랐다. 커튼이 열려진 방은 환했고 환자의 얼굴은 근래 없이 밝았다. 열려진 창 틈으로 스며 들어온 꽃배나무 꽃향기가 은은하게 방안을 감돌고 있다. 창 밖의  봄잔치를 꿈울 꾸듯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환상적이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그녀의 눈동자는 촉촉하게 젖어 반짝이고 있었다. 폐병환자 특유의 증상으로 오후가 되면 미열이 올라 홍조를 띤 얼굴이 더 예뻐 보였다.

모두들 누가 나타날 것인가 하고 관심들을 갖고 있었다. 오후가 되자 얼마 전에 이 병원의 환자였던  한 남자가 꽃다발을 들고 찾아왔다. 그는 젊은 나이에 전립선암을 앓고 있는 대학교수였다. 그의 눈동자는 깊고 우수에 차 일찍 타계한 고독했던 어느 배우를 연상할 만큼 인상적이었다.

  그는 그녀의 휠체어를 밀고 꽃배나무 꽃이 눈송이처럼 흩날리는 오솔길을 말없이 산책했고 나란히 벤치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도 했었다. 그녀의 모습은 마치 꽃면사포를 쓰고 있는 신부의 모습같이 아름다웠다.

  그날 후 그는 이 병원에 키모를 받으러 올 때마다 그녀를 방문했다. 점점 그녀의 표정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가 오는 날은 아침부터 커튼이 열려 병실은 밝고 활기 찼으며 그녀의 얼굴엔 생기가 돌았다. 기다림이 그녀에게 희망을 가져다 준 것이다. 완전히 바뀐 그녀의 분위기는 주위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었고 신선한 자극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의 데이트를 아무도 뭐라고 말하지 않았고 동병상련의 아픔을 안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오히려 보는 이들의 마음에 연민을 자아내게 했다.

  가을이 되어 꽃배나무 이파리가 한 잎 두 잎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금방 낙엽으로 떨어지지 않고 마지막 열정으로 불태우고 있는 꽃배나무, 열매 맺지 못한 한을 온몸으로 붉게 태우고 있는 나무는 그들의 사연을 담아 더 붉게 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그렇게 이파리로 맥없이 떨어지기보다는 무언가 순수한 사랑을 건강한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육체의 고통을 넘어 영혼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보여준 그들은 꽃배나무의 진리를 알고 있었던 것일까.

  건강한 우리들은 상처받고 싶지 않아 사랑하기를 망설이며 차라리 낙엽으로 뒹굴기를 자청하는 것은 아닐까.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가장 예쁜 색깔로 물든 이파리 하나가 반짝하고 그녀의 미소로 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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