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금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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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시어머니의 마음

2007.01.31 09:31

윤금숙 조회 수:669 추천:100

“어머니! 안녕하셨어요? 다음 주 금요일에 내려갈게요.”

  며느리의 전화였다. 결혼후, 처음 맞는 어머니날을 위해 산호세에서 이곳 LA까지 운전을 하고 오겠다는 것이었다. 한 달에 두어 번 안부 전화 받는 것 아니면 며느리의 목소리를 들을 기회가 없다. 특별한 일이 있기 전에는 김여사도 방해가 될까봐 전화하기를 아끼는 편이다.

  전화를 받고 나니, 마른 나무가지에 물이 오르듯 변화 없는 김여사의 생활에 갑자기 생기가 돌았다. 기다림이란 삶을 풍요롭고 희망차게 하는 것 같다.

  김여사는 아들 하나 달랑 두어 잔 재미를 모르고 지냈기에 해마다 어머니날이라고 해야 건조하기 이를 데 없었다. 딸 있는 친구를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그래서 어머니날 뒤끝은 항상 허전했었는데 이번에는 은근히 기대가 되는 것이다. 상상을 할수록 그 기대는 자꾸만 커졌다. 며느리의 마음을 알아 볼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시어머니의 응큼한 속셈인지도 모른다.  

  “금요일에 내려갈게요.”

  며느리의 상냥한 목소리로 인해 절속 같던 집안은 갑자기 분주해지고 화기가 돌기 시작했다. 김여사는 틈틈이 집안 이곳저곳을 치우고, 남편도 표현은 않지만 기분이 좋은지 그동안 뜨악했던 정원 손질을 하느라고 바빴다.

  아들은 서른이 넘도록 사귀는 여자가 없어 부모 마음을 태우더니, 어느 날 결혼할 여자라며 환한 복사꽃 같은 모습의 아가씨를 데려왔었다. 그 때의 설레이던 가슴은 지금 생각해도 잔잔한 흥분으로 마음에 다가온다.

  며느리를 맞았다는 사실은 생각할 수록 흐믓하고 마치 미루어 온 숙제를 끝내버린 것 같은 홀가분한 기분이 든다. 그런 아들네가 결혼 후 처음 내려온다니 콧노래가 절로 나지 않겠는가. 날마다 무슨 음식을 할 것이며 떠날 때 뭘 챙겨 보낼 것인가 궁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우선 평소 때 아들이 좋아하던 음식을 만들어 간단한 요리법까지 써 넣어 냉동을 시켜놓았다. 은근히 며느리가 아들을 위해서 만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기다리던 금요일이었다. 아들 내외는 저녁이 다 되어 도착했다. 여섯 시간나마 먼 길을 운전하고 오느라 점심도 제대로 못 먹었을 것 같아 시간 맞추어 밥도 눌러놓았고, 아들이 좋아하는 민어매운탕을 칼칼하고 감칠맛나게 끓여놓았었다. 며느리도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잘 먹는 편이니 음식 만드는 일도 즐겁기만 했다.

  아들 내외가 활기찬 모습으로 들어서니 우중충했던 집안은 금세 환해졌다. 잠시 후 그들은 케주얼한 옷으로 산뜻하게 갈아입고, 저녁은 친구들과 부부동반 약속이 있어 나가야 된다며 일방적인 통보를 하고 붕 떠나버렸다. 아들이 도착했다 다시 떠난 시간은 겨우 한 시간밖에 되지 않았다. 며칠을 준비하고 설레이던 마음은 순식간에 닭 좇던 개 꼴이 되고 말았다. 우리 부부의 스케줄은 아들 내외와 지낼 예정으로 몽땅 비워두고 있었는데 애들은 자기네들 일에만 마음을 쓰고 있는 것이다.

  시큰둥하게 두 내외가 앉아 저녁을 먹고 있자니 밥알이 모래알처럼 깔깔하다. 하지만 내일은 토요일이니 아침을 함께 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애써 마음을 넉넉하게 가졌다.

  다음날 아침 늦게 일어난 아들은 친구들과 골프 약속이 있다며 헐레벌떡 뛰어나가고, 며느리는 친정언니를 만난다면서 “어머니! 죄송해요” 하고 사라져버렸다. 토요일 하루종일 김여사는 남편한테 말도 못하고 혼자 남몰래 숨겨 놓은 애인 전화를 기다리듯 전화통에 신경을 곤두 세우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하루가 너무나 피곤했다. 밤 늦게야 아들한테서 너무 늦어 그냥 처형네서 자겠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어머니날, 교회에 가 앉아 있는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젯밤 아들의 전화가 섭섭하기만 했다. 뒤에서 조종하는 며느리의 소행이 더 괘씸했다. 통행금지 시간도 없는데 못 올게 뭐람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는 것이다.

  허전한 마음을 달래면서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서니 꽃향기가 온 집안을 은은하게 감돌고 있었다. 화려한 장미꽃이 식탁을 장식하고 있는 것이다. 남편이 혹시 내 마음 상한 것을 알고 사다 놓은 것일까.

  김여사는 꽂혀 있는 카드를 열어보았다.

  “어머니! 건강하세요. 사랑해요.”

  며느리의 반듯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그 사이에 아들 내외가 다녀간 모양이다.

  “누가 비싼 꽃 선물하랬나.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걸 왜 모른담.”

  불만으로 쌓였던 마음이 꽃을 보고서도 풀리지가 않았다. 어머니날을 같이 지내기 위해서 온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종일 소식이 없다가 저녁이 다 되어서야 애들한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친정식구랑 시간 다 보내고 시어머니한테는 겨우 자투리시간만 내주는 것 같아 마음이 언짢았다. 가고 싶지 않았지만 남편의 성화에 못 이겨 마지못해 따라 나섰다.

  아들 내외는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환한 미소로 우리를 맞이했다. 아들의 얼굴을 보자 단단히 굳어졌던 마음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구러진다.

  “어머니! 죄송해요. 어젯밤에 꼭 들어가려고 했는데 너무 늦어서...”

  미안해 어쩔 줄을 몰라하는 며느리의 한 마디에 며칠 동안 쌓였던 심사가 봄눈 녹듯 사르르 풀려버렸다. 며느리 눈밖에 나서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약은 생각이 떠올랐다. 저녁 식사는 즐겁기만 했다.

  “어머니! 맛있게 잡수셨어요?”

  며느리는 예쁘게 포장한 선물상자를 내놓으면서 별것 아니니 나중에 풀어보라 한다. 수줍은 듯한 그 표정에서 갓 시집 온 시골색시 같은 순박함이 풍겨왔다. 김여사는 집에 오자마자 급한 마음으로 선물상자부터 열었다.

  “어머! 숄이네, 내가 보라색을 좋아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보라색 털실로 촘촘하게 짠 숄이 김여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여사는 너무나 감격해서 마치 며느리가 옆에 있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남편은 아무 말없이 흐믓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남편 보기에 좀 멋적었지만 솔직한 감졍표현이 무슨 잘못인가 싶어 김여사는 한껏 기분을 냈다.

   두손으로 살며시 숄을 집어 들었다.

  “어머니! 늘 어깨가 시리다고 해서 집에서 둘르시라고 열심히 짠것이에요. 애용해 주세요.”

  조그만 카드에 며느리의 미소와 함께 사랑이 담뿍 담긴 글이 적혀있었다.

  숄을 어깨에 두르기 전에 며느리를 껴안듯 가슴에 꼭 품어 보았다. 며느리의 마음이 따뜻하게 가슴 속 깊이 전해져 왔다. 직장을 다니면서 시간 날 때마다 한 바늘씩 시어머니를 위해 정성껏 짯을 것이다. 실 한올한올이 더 소중하게 김여사의 마음에 감동으로 다가왔다.

  콧잔등이 시큰해지며 눈시울이 젖어왔다. 항상 딸 없는 것이 한이 되어 자상한 딸 같은 며느리를 얻고 싶었는데, 그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딸을 얻었다는 기쁨과 더불어 김여사의 가슴엔 사랑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2001년 6월 26일 미주 중앙일보에 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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