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금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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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2000년의 봄

2007.11.10 05:27

윤금숙 조회 수:730 추천:108

2000년의 봄
  
  직업을 갖기에는 좀 늦은 나이에 나는 생전 처음 직장을 가졌다.
  그동안 일하는 친구들을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집에서 살림만 하는 나를 도리어 부러워하는 친구들도 있었으나 나는 더 나이가 들기 전에 일을 한번 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어느 날 나에게 기회가 왔다. 후배가 어디에선가 정보를 알아 가지고 와서 같이 시험을 보러가자는 것이었다. 후배와 나는 용감하게 공개채용으로 필기시험과 인터뷰를 거친 후, 합격통지서를 받게 되었다. 너무도 기뻐 둘이서 자축을 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이 생겨 내 자신이 대견스럽기까지 했다.
  출근 첫날 아침, 생활전선의 대열에 끼어 운전을 하는 기분이 어찌나 상쾌한지 휘바람이 저절로 불어졌다. 또 새로운 미지의 세계에 도전한다는 긍지가 생겨 가슴마저 두근거렸다. 온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다운 천연색으로 선명하게 내 눈에 들어왔다. 태양도 밝게 웃으며 내게로 다가왔고 보이지 않는 공기까지도 바람결에 내 귀를 간질이며 축하한다고 속삭였다.
  두 아이들이 집을 떠나니 빈 둥지만 덩그랗게 남아 허전한 마음을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었다. 한 때는 골프에 열중해보기도 했고 컴맹을 면하기 위해 컴퓨터에 매달리기도 했다. 그나마 컴퓨터라도 배워뒀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그러나, 설레는 가슴을 안고 희망에 부풀어 출근한 첫날부터 나는 고층빌딩 아래로 추락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초등학교 학생이 대학 강의실에 앉아 있는 것같이 모든 것이 너무나 생소했다. 특히 전문용어가 어려워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얼굴을 보고 하는 대화는 짐작이라도 하지만 가뜩이나 모르는 전문용어를 전화로도 해야되니 전화 벨소리가 울릴 때마다 가슴이 벌렁거려 말이 귀에 전혀 들어오질 않았다.
  이 일을 계속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하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두 갈래 길에서 갈팡질팡했다. 가족들은 당장 그만두라며 스트레스 받아 병 나겠다고 성화지만 나는 평생 처음 잡은 직장을 며칠 만에 그만 둘 수가 없었다. 남들보다 몇배 열심히 노력하면 되겠지 하는 결심을 하고 날마다 전문용어를 써 붙여놓고 시험 공부하듯 외웠다. 노력한 보람이 있어 차츰 차츰 일이 눈에 익고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전화는 아직도 겁이 나지만 벌렁증세는 많이 사라졌다.
  그러나 정말 견딜 수 없는 것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였다. 사무실에는 여자들이 대부분이라 더 힘이 드는 것 같았다. 전혀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트집만 잡는 동료가 있는가 하면 아주 모른 척해버리는 동료도 있었다.
친구한테 하소연을 했더니 그냥 있으면 더 밟으니까 한바탕 해주라고 한다. 하지만 일도 모르는 주제에 어떻게 백인하고 그것도 영어로 한바탕을 한단 말인가?
  그래도 몇 달 동안 여기까지 견디어 낸 것은 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수지는 30대 중반이지만 나에게는 대선배, 아니 스승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녀를 보면 잔잔한 호수를 연상케하는 차분한 행동이 첫날부터 내 눈에 띄었고 그녀가 한국인임을 알았을 때 나는 구세주를 만난 듯이 반가웠다. 그녀 역시 나와 한국말을 하면서 핏줄이 당겼는지 둘이는 금세 친하게 되었다.
  동료 중에 바바라 라는 동료가 있다. 그녀는 백인인데 키가 작고 옆으로 퍼져 그녀가 옆으로 지나갈 때는 내 숨이 헐떡거려졌다. 이마는좁고 하관이 퍼져 얼굴이 마치 사다리꼴 같은데 항상 화가 난듯 양미간을 찡그리고 있다. 그녀가 내 앞으로 지나만 가도 나는 주눅이 들 것만 같았다.
  바바라는 내가 새 직원이라는 것을 가끔 잊어버리는 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지 좀 못 알아듣기만 해도 금방 화난 얼굴이 되어 가시 돋친 말로 “이런 것도 오리엔테이션을 안 받았냐’며 따지듯 덤볐다. 그렇게 난처할 때마다 수지는 나를 자기 자리로 데리고 가 바람막이가 되어주곤 했다. 바바라를 대하는 수지의 태도는 조용했으나 어딘가 위엄이 깃들어 있어 큰 위로가 됐다.
  그래서 수지가 결근하는 날은 엄마품을 떠난 아기 같이 하루 종일 볼안ㅎㅔㅆ다.
  어느 날, 나는 우연히도 바바라한테 온 전화를 받게 되었다. 잠시 메시지를 받으려는 순간 전화가 끊겼다. 바바라가 나타나 누구인가를 묻지 않았다고 소리를 지르며 터무니없이 화를 내는 것이다. 동료들이 일하다 말고 나를 모두들 쳐다봤다. 그들의 눈빛은 모두가 딱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나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뛰어들어가고 싶었다. 건녀편에 있던 수퍼바이저가 와서 전화 받는 연습을 잘 하라며 따끔하게 내게 말했다.
  수퍼바이저까지 냉냉하게 말하니 바바라는 더 의기양양해서 찬바람을 한 보따리 남겨놓고 사라졌다.
  점심시간이 되어 밖으로 혼자 나왔다. 드높기만한 하늘은 내 사정을 아는지 모르른지 너무나 파랗고 아름다워 눈물이 났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할 수록 모른 척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수지가 야속하고 괘씸했다.
  ‘어쩌면 그렇게 창피를 당하고 있는데 소 닭 쳐다보듯 하고 있을 수가...’ 그녀가 조금만 도와줬던들 이렇게 외롭고 억울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그까짓 못된 미국 여자야 잊어버리면 그만이지만 같은 한국사람끼리는 왠지 더 섭섭하고 괘씸하기까지 했다.
  그런 일이 있었던 며칠 후, 수지는 대학원 진학을 위해 직장을 그만둔다고 했다. 마지막 날 수지는 점심시간에 나를 불렀다. “바바라는 누구한테나 다 그래요. 지금 맞서면 불리하니 꾹 참고 피하는 길이 상책일 것 같아요. 그리고 바바라를 불쌍하게 생각하세요. 자랄 때, 마약에 알콜에 많이 힘들게 자랐대요. 그냥 불쌍한 여자라니 봐주세요. 힘들지만 곧 나아질 거예요. 모르는 것이 있으면 언제라도 저에게 전화를 하세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어린 사람답지 않게 넉넉한 마음으로 나를 껴안았다. 오히려 내가 그녀 앞에 아주 작게 느껴졌다.
  그런데 수지가 떠나고 난 다음 이상한 일이 생겼다. 수지가 없으면 나를 마음놓고 못 살게 하리라는 예상을 뒤엎고 그녀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백팔십도로 바뀌었다. 직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수지가 나를 얼마나 배려해주고 떠났는 지를 알게 되었다. 가슴이 저리도록 고마웠다. 잠시 수지에게 섭섭한 마음을 가졌던 내 옹졸함이 부끄러웠다.
  바바라가 수퍼바이저 방에 불려가 주의를 들었단다. 수지의 말을 들어준 부퍼바이저 또한 너무 고마웠다. 집에 오자마자 수지한테 전화를 해서 자초지종 상황을 얘기했다. 수지의 차분한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흘러나왔다.
  “혹시 역효과라도 나면 어쩌나 하고 망설렸는데 정말 다행이에요. 직장이라는 곳이 다 그래요.”
  그동안 내가 뭘 너무 모르는 우물안 개구리였음을 고백했다. 사실 나는 미국 온지 30년이 되도록 일다운 일을 해본 적이 없이 살림만 하고 살아 사회생활을 전혀 몰랐다. 가족을 책임진 가장들의 고충을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우물안 개구리처럼 사는 것이 여자한테는 좋은 세상일지도 모르는데, 왜 우물 밖으로 튀어나와 사서 고생을 하세요? 일하는 것이 그렇게도 즐거우세요?”
  그녀는 인생경험을 다 한 사람같이 말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그런 말을 귀가 아프게 들었는데 수지도 똑같은 말을 했다. 친구들은 지금 내가 얼마나 버티나 내기까지 걸고 지켜보고 있는 정도이다. 그래서 도중하차는 더 더욱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수지의 그 다음 말은 나에게 다시 큰 힘이 되었다.
  “하지만 그 용기에 놀랐어요. 건전한 사고방식과 열심히 노력하며 일하는 모습에 감탄했어요. 틀림없이 잘 하실 거예요. 바바라가 또 언제 변할지 모르지만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잘 해주면 나아질 거예요.”
  수지의 천사 같은 마음씨와 젊은 사람인데도 경망되게 행동하지 않고 지혜롭게 일 처리를 하는 마음에서 뜨거운 정을 느꼈다. 내게 다가왔던 시련이 어느새 나를 떠나 멀리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커튼을 열고 창문을 열었다. 여름내 무성했던 나뭇잎들이 낙엽이 되어 날아가버린 양상한 나뭇가지를 바라봤다. 지금은 추위에 떨고 있지만 봄이 되면 파릇파릇 새 잎으로 피어날 것이다. 나 또한 이 어려움을 이기고 힘찬 발걸음으로 2000년을 맞으리라.
    

1999년 12월 27일
미주 한국일보 문인광장에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