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금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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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그래도 행복하네요

2009.08.18 12:52

윤금숙 조회 수:666 추천:108

그래도 행복하네요

  이비인후과 진료실에 들어가자 그녀는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노인같이 보이는 그녀와 옆에 앉아 있는 남자와의 관계가 궁금했다. 남자의 나이가 모자간이라기에는 만만치 않았고 부부라기에는 좀 젊어보였다. 실례가 될까봐 관계를 묻지 않았다. 여자를 자세히 보니 이가 홈빡 빠져서 그렇지 남자와 걸맞는 나이 같기도 했다. 가만히 있어도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가 웃는 얼굴로 보여 좋은 인상이었다. 그 남자가 나를 보자마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난번에 이 병원에 왔을 때는 통역원이 없어 혼이 났는데 이렇게 와줘서 너무나 감사하다며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어떻게 오셨어요?”
  의사를 기다리는 사이에 나는 여자에게 물었다. 여자는 계속 반갑다며 웃고만 있었고 옆에 있던 남자가 나서서 먼저 말을 했다.
  “작년에 제 집사람이 죽을 뻔했었죠.”  순간 그의 눈에 눈물이 언뜻 비쳤다. 그는 그녀가 눈치 채지 않게 눈을 두어 번 껌뻑껌뻑하더니 순식간에 눈물을 삼켰다.
  “설암, 그런 거 들어보셨어요? 혀암 말예요.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었는데 글쎄, 혓바닥에 암이 생겼었답니다. 수술하고 방사선 치료를 받아 완전히 회복이 되었죠. 그런데 일 년 후 다시 턱 밑에 암이 전이가 된 거예요. 또 수술을 해서 암덩어리를 떼냈으니 살아난 게 기적이죠. 저 턱 밑에 칼자국... 수술자국 좀 보세요.”
  다행히 턱 밑이라 언뜻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목주름을 없애려다 실패한 수술자국처럼 흉터가 있었다.
  남편은 마치 본인이 암 투병에서 이겨난 것처럼 지난 일들을 힘겹게 말했다. 억장 무너지는 시간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의 얼굴은 일그러져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오늘은 왜 오셨어요?”
  “얼마 전부터 목에 혹이 생겼어요. 갑상선암인지 모른다며 조직검사를 했는데 오늘 그 결과를 들으러 왔죠.”
  그는 아내의 목을 자기 목인양 안쓰럽게 만졌다. 그녀의 목은 모딜리아니의 여인상처럼 길고 가늘었다. 그런데 목 왼쪽에 아기 주먹만한 크기로 혹이 튀어나와 있었다. 남편이 설명을 하는 동안 내내 그녀는 합죽이 입을 손으로 가리지도 않고 텅빈 굴속같은 입속을 맘껏 들어내며 웃었다. 웃는 모습이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순박하게 보였다.
  언젠가 들은 치과의사의 말이 생각났다. 아무리 독하게 생긴 여자도 앞니가 몽땅 없으면 어금니 빠진 호랑이처럼 양순하고 착하게 보인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큰 눈을 가진 그녀의 얼굴도 너무나 착해 보였다. 유심히 보니 그녀는 입만 함몰되었지 눈가에 주름하나 없이 온 얼굴이 팽팽했고 피부가 너무나 깨끗하고 맑았다. 중병을 두 번씩이나 치루고 난 사람 같지 않게 고왔다.
  내가 신기한 듯 다시 보자 그녀는 소녀처럼 볼을 붉히며 말했다.
  “글쎄, 저이가 나 때문에 작년에 지레 죽을 뻔했잖아요. 이렇게 살아난 것만도 감사하죠. 이런 어려운 일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매순간마다 감사하며 살겠어요. 우린 많은 복을 받았어요.”
  자기 아픔보다 상대방의 아픔을 말하려는 부부의 애정어린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그러는 사이에 의사가 들어왔다. 중국계 의사를 보자마자 그녀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손을 덥썩 잡으며 활짝 웃었다. “아이구, 반가워라, 반가워. 고마워요!” 그녀는 오래 헤어졌던 자식이라도 만난 듯 한국말로 거침없이 인사를 했다. “ 안녕하세요, 괜찮아요?” 의사도 약간 어색했지만 한국말로 인사를 받았다.
  그녀는 나에게 의사가 중국사람인데 한국말을 왠만큼 하고 김밥이며 잡채, 불고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남편도 옆에서 오늘은 참 반가운 사람만 만나게 된다며 거들었다.
  의사가 챠트를 들쳐보더니 조직검사를 다시 한번 해야 정확한 결과를 알 수 있다고 했다. 잠시 어두운 빛이 보이는가 싶더니 금세 표정을 바꿔 그녀는 오케이, 오케이하며 시원하게 대답했다.
  그녀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키가 작은 나는 그녀를 올려다봤다. 늘씬한 키에 군살이 하나도 없었다. 쌍꺼풀 진 눈에 오똑한 코, 틀니만 제대로 해넣는다면 중년의 미인이 될 것 같았다. 나는 넌지시 말을 뗐다.
  “젊었을 때 혹시 미인대회에 나갔던 거 아녜요?”
. 옆에 있던 남편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잠시 남편을 바라보더니 지갑에서 젊었을 때의 사진을 꺼내서 수줍은 듯 내게 보여줬다. 영화배우 못지 않은 그 모습에 나는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다. 돌아가는 그들 부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마음 속으로 기원했다. 암 환자는 하루에 한번씩 의무적으로 웃어야 한다는데 저렇게 밝게 잘 웃으니 꼭 완쾌되리라고.
  며칠 후 셀폰에 전화가 들어왔다. 잠깐 로비에서 만나자는 전화였다. 그녀는 나를 보자 반갑게 껴안더니
내 손에 빛깔 고운 종이백을 건네줬다. 그 안에는 그녀가 새벽부터 일어나 손수 만들었다는 김밥이 들어 있었다. 한 입에 쏙쏙 들어갈 것 같은 예쁜 김밥을 보자 군침이 돌았다. 중국의사한테도 전해줬다고 했다.
  “지난 번 결과가 어떻게 나왔어요? 그냥 혹이었지요?”
  그녀의 명랑하고 밝은 얼굴을 보며 나는 분명 암이 아닐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물었다.
  “갑상선암이래요. 처음 들었을 때는 잠시 절망했지요. 이번이 세 번째니까요. 그런데 지금 세상에는 수술도 할 수 없는 암이 얼마나 많아요. 그 생각을 하니 치료하면 낫는다는데 감사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담담하게 말하는 그녀의 혀 짧은 소리가 내 가슴을 찔렀다.
  “그래도 행복하네요.”
  그녀의 얼굴이 다시 함박꽃처럼 환하게 피어났다.


1월 12일 2009년
한국일보 문인광장에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