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깎이 문인의 출판기념회

2008.01.06 08:12

김동찬 조회 수:1079 추천:89

   최석봉 시인이 칠순을 맞아 가진 출판기념회에 다녀왔다. 책 출판에다 칠순까지 기념하는 자리라서, 말하자면 겹경사여서, 축하도 두 배로 해야 했고 느낀 점도 두 배로 많은 출판기념회였다.
   회갑이나 칠순을 맞은 문인이 자신의 인생과 문학을 정리하는 문집을 엮고 그 출판기념회로 잔치를 대신하는 것은 뜻 깊고 문인다운 일이라 여겨진다. 연전에는 고원 시인이 다섯 권짜리 ‘고원전집’을 출판하고 팔순잔치 대신으로 출판기념회를 가진 적도 있다. 이런 분들은 소중한 인생길의 동반자였던 문학을 빼놓고 잔치를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미주에서 현재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 중에는 연세가 지긋하신 문인들이 많다. 고원, 송상옥 선생님처럼 50여 년 동안 평생 문학을 해온 원로들도 계시지만, 나이가 들어서 문학 활동을 시작한 분들도 많기 때문이다. 미주 한인 1.5세나 2세는 영어권이고, 1세 중 젊은 사람들은 이민생활에 적응하랴, 애를 낳아 기르랴, 생업에 종사하랴 글을 쓸 생각조차 하기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다.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고 정신적인 행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될 나이가 되었을 때 억눌러두었던 문학에 대한 열정을 끄집어내다 보니 한국 같으면 은퇴할 나이에 문학을 시작하기도 한다.
   최석봉 시인도 마찬가지다. 23년 동안 한 곳에서 리커스토어를 운영하다 아이들 셋을 훌륭하게 성장시킨 후에야 은퇴를 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문학 지각생인 그의 작품은 한국에서 평생 전업으로 글만 써온 작가들의 글에 비해 덜 다듬어진 느낌을 주기도 했지만 나는 오히려 그 거친 듯한 생동감이 더 좋았다. 겉만 번지레한 미사여구보다는 살아있는 진솔함이 더 문학적 감동을 주는지 그의 시집을 읽으며 몇 차례 눈물을 참아야 했다.
  제대로 몇 편 읽어보지도 않고 미주 시인들은 고향 타령만 한다고 쉽게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내가 아는 한 고향을 그리워하는 글만 쓰는 작가는 미주에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또 그걸 주제로 작품을 써보지 않은 미주 문인 또한 없을 것이다. 최 시인의 시에도 주된 모티브로 그리운 고향과 어머니가 등장한다. 그러나 서울에서 두 세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고향과 동일한 고향이 아니다. 태평양과 긴 시간을 건너와 함께 바라보는 고향이 그의 시를 읽는 우리 이민자들에게 큰 그리움으로 공감대를 덮쳐온다.
   미주 문인들의 글에는 한국의 문학 작품에는 볼 수 없는 미주 이민자의 눈물과 땀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로 담겨있다. 최 시인이 권총강도를 밥 먹듯이 당했지만 그래도 굶지 않고 가정을 꾸려갈 수 있어서 아직도 고맙게 기억되는 가게의 주소가  ‘원 원 세븐 오 에잇 베니스 블르바드’다. 이 주소에 바쳤던 긴 세월과 경험이 녹아 시가 됐고 바로 첫 시집의 제목이 되었다.  
   나이가 들어 문학을 시작하는 미주 문인들은 지나간 세월을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듯이 문학에 대한 열정을 불사른다. 웬만한 젊은이들은 흉내낼 수 없을 만큼 부지런하다. 창작교실에 밤 운전을 해서 늦게까지 참석하고 열심히 글을 써낸다. 최 시인만 해도 약 10년 동안 쉬지 않고 시를 창작해 네 권의 시집을 출판했다. 출판기념회장에서 한 시인은 모든 문학모임에 최 시인이 빠짐없이 늘 먼저 와 있었다고 기억해냈다.
   최석봉 시인과 같이 대다수 미주의 문인들은 돈이 되지 않고 권세도 누릴 수 없는 이 문학의 길에 늦게 들어서서 묵묵히 글을 쓴다. 신세타령이나 하거나 방탕한 생활을 하고 무기력한 노후를 보내는 것보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칠순에, 팔순에, 미수에, 생의 많은 고비를 넘으며 느꼈던 감동과 지혜가 담긴 글을 후학들에게 남기는 이 늦깎이 문인들에게 존경과 갈채를 바친다.


-- <미주문학> 2007년 겨울호 권두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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